마케도니아(Macedonians)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의 문화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흥미롭고 독특한 문화를 지닌 나라이므로, 스쳐가면서 가볍게 한번 보는 것 보다는 자세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중세 수도원들, 오래된 터키시장, 그리스 정교회 성당, 최신의 상가 등이 있다. 백 파이프의 저음소리, 터키식 다진 고기구이, 발칸 부레크 (치즈나 고기파이) 등도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녹지가 많고 숨막힐 정도로 매혹적인 나라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행객들에게 호의적이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남쪽 끝에 위치했던 지독하게 빈곤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여행지로 더없이 즐거운 곳이 될 것이다. 최근 세르비아와 나토의 격돌처럼 발칸반도는 분쟁이 잦은 불행한 지역이었고, 알바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등에 끼어 있는 마케도니아는 그 위치 때문에 늘 정치적인 화약고였다. 다행히 코소보 에서 있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이 이곳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알바니아 난민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해 나라가 심각하게 불안정해졌다.
  • 통계 자료
  • 국명: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공화국
    면적: 25,700평방km
    인구: 200만명
    수도: 스코피예(Skopje)
    인종: 마케도니아 슬라브인(66%), 그리스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세르비아인, 집시
    언어: 마케도니아어
    종교: 대부분의 알바니아인과 터키인은 이슬람교, 슬라브인은 그리스정교
    정체: 신생 민주주의
  • 지리 및 기후
  • 국토의 많은 부분이 600-900m 높이의 고원지대이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 지르는 바르다르(Vardar)강은 수도 스코피예를 지나서, 그리스 테살로니키 근처의 에게해로 흘러간다. 남서쪽의 오흐리드(Ohrid)호수와 프레스파(Prespa)호수는 알바니아를 지나 아드리아해로 물이 빠진다. 이들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들이고 오흐리드 호수는 가장 깊다. 북서쪽의 사르 플라니나(Sar Planina)는 코소보와 국경을 이루는데 이 지역에 있는 티토프 브르흐(Titov vrh)는 마케도니아 최고봉으로 높이는 2750m이다. 비톨라(Bitola)의 서쪽 펠리스테(Pelister), 오흐리드호수와 프레스파호수 사이의 갈리치차(Galicica), 오흐리드와 테토보 사이의 마프로보(Mavrovo) 등 세 군데의 국립공원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겨울에는 에게해의 따뜻한 바람이 바르다르 (Vardar) 계곡까지 불어오므로 마케도니아 북쪽 나라들의 전형적 기후인 대륙성기후를 누그러뜨린다. 기온은 북쪽에 있는 나라들보다는 높지만, 11월에서 2월 사이에 눈이 많이 내린다.
  • 역사
  •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세계를 정복했던 때부터)의 대부분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는 국명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항상 논란을 제기한다. 로마인이 고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을 기원전 2세기중반에 정복했었고, 기원4세기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 이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배하는 동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7세기에 정착하여 이 지역의 민족성을 바꾸어버린다.
    이 지역은 9세기 불가리아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에 의해 점령당한다. 그 후 짜르 사무엘(Samuel)의 지배하에서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의 중심이 된다. 1014년 사무엘이 비잔틴제국에 패배함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국가에 의해 번갈아 지배되는 긴 세월이 시작되었다. 1389년 터키가 세르비아에 대승하여 발칸국가들은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역문화 또한 변하였다.
    1878년 러시아는 터키를 패배시킨 후,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이양한다.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중심에 그들의 강력한 기지를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서방 강대국들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를 터키에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1893년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위해 마케도니아 내 혁명기구(I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sation)를 조직하며, 1903년 5월 일린덴(Ilinde) 봉기로 투쟁의 절정을 이룬다. 이 후 3개월 동안 잔인하게 억압 당한다. 민족지도자였던 고체 델체프(Goce Delcev)는 반란이전에 죽었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연합하여 터키에 대항했던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때는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배척하고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한 IMRO는 세르비아 왕권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에 대해 베오그라드의 전시정부는, 마케도니아 언어는 물론 마케도니아란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응한다. 일부 IMRO 요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가리아의 점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티토의 빨치산에 가담하다. 전쟁 후 마케도니아는 미래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완전한 공화국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에 1943년 동의한다. 1952년 최초로 마케도니아 문법이 출판되었고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마케도니아인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종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한 베오그라드 정부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의 요구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74%가 독립을 원하였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정부는 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베오그라드는 마케도니아 주둔 연방군대를 철수하도록 협조를 했고, 분할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와 철로 등이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중반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지대, 특히 잠재적인 화약고인 코소보와 가까운 지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천 여명의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은 그리스북부 지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국명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마케도니아의 외교적 승인을 미루었다. 그리스는 만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사용하면,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마케도니아 영토에 대한 권리의 실질적인 합법성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하는 수 없이 1993년 4월, '잠정적으로'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이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유엔이 재가해 줄 것을 신청한다.
    2년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1993년 12월, 강한 그리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럽연합의6개국과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1994년 2월 미국도 FYROM를 인정한다. 그러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통상 금지를 선언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무역항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폐쇄한다. 마케도니아가 국기를 바꾸고 국호에 관해 그리스와 협의에 들어 간다는 동의를 한 후인 1995년 11월 통상금지령은 철회된다. 곧 이어 협의가 시작되었으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이 차량폭발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지금까지 이 난제 해결을 위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코소보사태를 기억한다. 1999년 3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코소보 폭격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피난처를 찾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로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분쟁을 한번에 종식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의 군부대를 폭격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난에 허덕이는 마케도니아에 수십만의 난민이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 경제
  • 국내 총생산 GDP : US$ 95 억
    1인당 국민 총생산 GNP : US$ 3,659
    주요산업: 석탄, 기계 및 장비, 식품, 담배
  • 문화
  • 현재 마케도니아 인구의 66%는 마케도니아 슬라브인들로 이들은 그리스어를 말하던 고대 마케도니아인들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많은 인종학자들은 마케도니아인을 불가리아인종으로 여기며, 불가리아정부의 공식 입장도 마케도니아인을 불가리아인으로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소수의 마케도니아인 만이 지지한다. 알바니아인도 소수민족 중 커다란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 북부 그리스에 거주하는5만 명의 마케도니아인들은 스스로를 '슬라브말을 쓰는 그리스인: Slavophone Greeks' 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정부에 의해 동화압력을 받고있다. 마케도니아어는 남부 슬라브언어의 일종으로 서부와 동부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마케도니아 문학언어는 벨레스(Veles), 프릴레프(Prilep), 비톨라(Bitola) 등에서 말해지는 중부 방언에 근거한다. 마케도니아어는 불가리아어와는 연관성이 많아 다른 슬라브어와 구별되는 불가리아어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키릴문자는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성 키릴(St Cyril)과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에 의해 9세기에 개발된 알파베트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 문자는 오흐리드의 한 수도원에서 규율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동 슬라브를 거쳐 전파되었다. 거리이름은 키릴문자로만 쓰여져 있고, 도로표시는 키릴과 라틴어 모두로 표기되어 있다. 마케도니아 민속음악에서 백파이프의 일종인 가예다(gajda)의 저음과 두 줄에 의한 탐부라(tambura)현은 플류트의 일종인 카발(kaval)과 커다란 원통모양의 북 인 타판(tapan)의 배경음을 연주한다.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마케도니아 민속무용을 테스코토(Teskoto)라고 부른다. 이것은 남성무용으로 타판과 커다란 관악기 주르라(zurla)에 맞추어 춤추는데 매우 느리게 시작하여 갑작스럽게 빨라진다. 이 춤은 마케도니아 국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것을 상징하며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무용수들이 공연한다.터키식의 다진 고기구이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먹을 수 있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재미는 덜하지만 셀프서비스 음식점이 있다. 치즈나 고기파이인 발칸부레크 (Balkan burek)와 요구르트는 값싼 아침 식사용으로 적합하다. 프라이팬에 콩을 요리한 마케도니아식 그라브체 나 타브체(gravce na tavce)와 오흐리드 송어는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 축제 및 행사
  • 마케도니아인들은 1월 7일에 그리스 정교회의 크리스마스, 이어 13일을 새해로 축하한다. 그 외에 군사적 사건을 둘러싼 국가적 특별행사가 많이 있다. 1903년의 봉기를 기념하는 일린덴(Ilinden)의 날은 8월 2일, 공화국의 날 (Republic Day)은 9월 8일, 1941년 빨치산의 날(Partisan Day)은 10월 11일이다. 오흐리드에서 7월 초 열리는 발칸 민속무용과 음악제(Balkan Festival of Folk Dances and Songs)에는 주변 발칸국가의 민속 단체들이 많이 참석한다. 7월 중반부터 8월 중반까지 열리는 오흐리드 여름축제(Ohrid Summer Festival)에서는 고전음악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시인들은 8월말 스트루가(Struga )에 모여 국제 시축제(International Festival of Poetry)를 연다.
  • 여행자 정보
  • 비자: 영국과 유고슬라비아 여권 소지자는 비자가 필요 없다. 캐나다인, 미국인, 오스트레일리아인 등은 비자가 요구되며 발급비 없이 국경에서 받을 수 있다.
    건강상 유의할 점: 햇볕에 의한 화상, 국경지에서 폭격의 위험이 있다.
    시간대: 그린위치 표준시 보다 1시간 빠르다.
    전압: 220볼트, 50헤르츠
    도량법: 미터법
  • 경비 및 환전
  • 통화: 마케도니아 데나르 denar (MKD)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 2-10
    중급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10-25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25 이상
    저렴한 숙박: US$10-40
    중급호텔: US$40-70
    고급호텔: US$70 이상
    마케도니아의 호텔은 대단히 비싸기 때문에 여행비용에서 큰 지출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호텔 보다는 개인 민박집을 구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하루에 US$ 20-40 정도로 지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하루에 US$ 50은 지출해야 최소한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좀더 구미에 맞는 생활을 하려면 하루에 거의 US$ 100은 필요하다.
    지금 데나르는 안정된 화폐이지만 마케도니아 밖에서는 그 가치가 없다. 여행자수표는 대부분의 은행에서 수수료 없이 환전할 수 있다. 스코피예와 오흐리드 전역에 소규모의 개인 환전소가 많이 있고, 제시하는 환율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 여행 시기
  • 에게해가 가까이 있는 덕택에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여름에도 쾌적하므로 마케도니아 여행에 특별히 피할 시기는 없다. 7월과 8월은 축제를 볼 수 있으므로 가장 여행 적기이다. 발칸 민속무용 및 음악제가 오흐리드에서 7월초 열리며 오흐리드 여름축제도 7월말에 개최된다.
  • 주요 여행지
  • 스코피예
  • 바르다르 강을 끼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피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발칸반도의 교차로에 즉, 이웃나라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중간 지점에 거의 정확하게 위치한다. 바르다르강이 에게해로 유입되는 지점인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는 남동쪽으로 260km에 있다. 로마인들은 오래 전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르다니아(Dardania) 주의 중심지였던 스추피(Scupi)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슬라브, 비잔틴, 불가리아, 노르만, 세르비아인 등을 포함한 점령자들이 터키가 들어왔던 1392년까지, 그리고 터키점령이 끝나고 스코피예를 1912년까지 점령했다.
    1066명의 사망자를 발생한 1963년의 대지진 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온 원조 덕택에 오늘날 볼 수 있는 현대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당시 계획자들은 불필요하거나 지나치게 큰 건물을 세우는 등 잘못된 방식으로 돈을 써버렸다. 이러한 건물들은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늘날 허물어 지고 있다. 우체국 건물과 그 옆의 전화국 건물은 불필요한 건축물의 분명한 실 예이다.
    스코피예의 중심가는 대부분 보행자지역이며, 바르다르강 위에는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해주는15세기 터키식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북쪽에 있는 1466년에 지은 다우트 파샤(Daud Pasha) 목욕탕은 한때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이었다. 시립미술관에는 돔 형태로 지은 6개의 방이 있다. 도시 북쪽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으며, 1824년에 만들어진 정밀하게 조각된 그리스정교회 성상(iconostasis)이 있는 스베티 스파스(Sveti Spas)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건축되었던 17세기에는 어떤 교회도 이슬람사원 보다 높이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절반은 가려져있다.
    재래시장 근처의 마케도니아 박물관은 이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현대식의 흰 건물 안에 있으며, 터키시절 무역상들이 묵던 큰 여관 쿠르숨리 한(Kursumli Han)의 뒤에 있다. 스코피예의 옛날 동방시장지역은 유럽에 남아있는 시장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 오흐리드
  • 마케도니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자연 구조호인 오흐리드 호수는 수심이 290m로 유럽에서 가장 깊고, 세계서 가장 오래된 호수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 450평방km의 3분의1은 알바니아에 속한다. 해발 695m의 산으로 에워싸인 아늑한 호수의 마케도니아쪽은 더욱 아름답고 해변과 언덕으로부터 전망이 뛰어나다.
    오흐리드시는 마케도니아 여행의 중심지이다. 이 곳의 30여 군데의 ‘문화유적지’는 여행객들을 바쁘게 한다. 아마도 오늘날 볼 수 있는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은 로마시대 유적일 것이다. 오흐리드 즉 리흐니도스(Lihnidos)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연결짓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 위치하며, 로마 원형극장의 일부가 구시가에서 발견되고 있다. 비잔틴제국이 지배할 때 오흐리드는 마케도니아의 감독제(주교) 교회제도(episcopal centre)의 중심지이었다. 893년 최초의 슬라브대학이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였던 오흐리드의 주교 클리멘트에 의해 이곳에 설립되었으며, 10세기부터 1767년까지 동방교의 총주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8년 오흐리드 대주교제도의 부활과 1967년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의 독립은 근대 자주독립국가의 지위를 향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오흐리드에서 더 유익한 하루를 보내려면 알바니아와의 국경지역인 오흐리드 남쪽 30km지점의 호수가 언덕에 있는17세기 스베티 나움 (Sveti Naum)교회를 보러 순례여행하기를 권한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 비톨라(Bitola)
  • 과거 유고슬라비아 최남단의 도시이자 마케도니아 제2도시인 비톨라는 그리스와의 국경 바로 북쪽 산악지대 사이에 있는 높이 660m의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구 시장지역은 다채로운 구경거리가 있지만 편의시설이 부실하다. 호텔은 너무 비싸고, 그리스를 오가는 통과지점에 있지만 국경까지 가는 버스나 기차가 없어 통과지점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도시이다. 반면 오흐리드와 스코피예로 가는 버스 편은 좋다. 비톨라에서 헤라클레아(Heraclea)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필립 II세가 세웠던 헤라클레아(Heraclea)는 약 2 세기 후 로마인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비아 에그나티아의 중요한 활동지가 되었던 곳이다. 기원 4세기부터 6세기까지 감독제 교회제도에서 주교좌가 있던 곳이다.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미 로마 목욕탕, 포티코(주랑현관), 극장 등을 볼 수 있다.
  • 트라브니(Travnik)
  • 오흐리드호수 북쪽 끝에 있는 이 소도시는 알바니아의 슈코드라(Shkodra) 근처의 아드리아해로 호수물을 흐르게 하는 치미 드림(Crni Drim) 강에 의해 나눠져 있다. 토요일이면 스트루가(Struga)에 대형 시장이 서고, 해마다 8월말이면 국제 시 축제를 위해 이곳으로 시인들이 몰려온다.
  • 스트루가(Struga)
  • 북서 보스니아에 있는 브르바스(Vrbas) 강가의 주요한 교차로에 있는 이곳은 오늘날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의 수도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은 많지 않으며, 1993년 이 지역 세르비아주민들은 도시의16군데 이슬람 사원을 절대 폭파시키지 않겠다고 확인했다. 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곳은 아마도 브르바스강을 따라 있는 16세기 요새와 그 안의 잡초가 무성한 원형극장이다. 원형극장의 벤치는 전쟁 중 연료로 써버렸다고 한다. 시내 중심가의 대통령 궁은 1998년 1월부터 보스니아-세르비아정부가 차지하고 있다.
  • 레저스포츠
  • 마케도니아 최고의 스키휴양지는 테토보(Tetovo)의 서쪽에 있는 사르 프라니나(Sar Planina)의 남쪽 경사지에 위치한 고도1845m의 포포바 사프카(Popova sapka)이다. 국립공원 펠리스테르(Pelister), 가리치차(Galicica), 마브로보(Mavrovo)는 어디에서나 하이킹을 즐길 수 있고, 이는 시골을 둘러 보기에 좋은 방법이다.
  •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
  • 유고슬라비아 항공사 JAT의 운항중지로, 많은 지역 항공업체는 스코피예에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도시들로 가는 직항 편 제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흐리드에도 국제공항이 있다. 공항 출국세는 약 US$12이다.스코피예의 국제버스정거장에는 소피아, 티라나, 이스탄불, 베오그라드행 버스가 매일 있고, 뮌헨행은 일 주일에 2번 있다. 크로아티아를 오가려면 베오그라드와 헝가리를 경유해야만 한다. 알바니아를 오갈 때 버스로 스코피예와 티라나를 여행하거나, 걸어서 오흐리드 근처의 스베티 나움에서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스코피예와 베오그라드 간에 급행기차가 니스(Nis)라는 곳을 경유하여 하루에 5회 운행한다. 스코피예와 테살로니키 사이는 하루 두 번 기차편이 있다. 그리스로 들어가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면 테살로니키까지만 편도표를 사고, 다시 거기에서 아테네행의 표를 사는 것이 좋다. 마케도니아와 불가리아를 연결하는 직행 기차 편은 없다. 소피아와 스코피예 간의 기차여행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고 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권하고 싶지 않다.
  • 국내 교통편
  • 스코피예에서 오흐리드, 비톨라 등으로 가는 버스편은 꽤 자주 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버스여행은 잘 발달되어있다. 오흐리드를 오가는 버스는 항상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그에 비해 마케도니아 기차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면 지방기차로 스코피예에서 비톨라까지 230km거리를 가는데 4시간이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