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오유 정상등반(8,201m)

상업등반대의 등장은 일반인들이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등반활동에 참가할 수 있게 하였다. 40대만 되면 히말라야 등반의 생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되던 당시 상업등반대는 국내 산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실버 산악인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히말라야 고봉 등정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상업등반의 시작은 히말라야 등반경험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히말라야 등반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봉우리, 초오유

초오유 산(Cho Oyu)은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고봉으로 네팔과 중국의 국경에 솟아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초오유’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지어졌는데, 신성을 뜻하는 ‘초’와 여성을 뜻하는 ‘오’, 그리고 터키옥을 뜻하는 ‘유’의 합성어로 청록 여신이 거주하는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 고산들이 그러하듯, 네팔 쪽으로 상당한 급경사가 있는 초오유의 남면은 장장 2km에 달하는 넓고 긴 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티베트쪽으로 떨어지는 북면은 비교적 완사면으로 형성되어있다.

초오유 정상등반의 시작

초오유는 1952년 에베레스트 남면 정찰대원이었던 에드먼드 힐러리와 에릭 쉽튼에 의해서 처음 기록되었다.

당시 북서릉 6,800m까지 접근한 기록이 유일하였지만, 이후 1954년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경등반대가 네팔과 티베트의 교역로이자 남체 바잘에서 가까운 낭파라 5,716m를 넘어서 북서릉을 통하여 등정에 성공하였다. 8,200m가 넘는 고소임에도 불구하고 산소 보급 없이 등정에 성공한 사실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측인 네팔 쪽에서 2개의 루트가 개척되었고, 티베트 쪽에서는 4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티베트쪽 등반은 네팔 하이웨이를 경유하여 티베트의 딩그리에 도착하면, 차량을 이용해 5,100m까지 접근 한 후 다시 야크의 도움으로 5,750m 벽 하부까지 접근하여야 한다. 벽 하부에 전진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면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한국원정대는 1989년 대구경북연맹팀이 네팔쪽에서 낭파라를 넘어 서면으로 등정하였다. 하지만 정상 등정 의혹이 제기 되자 그로부터 3년 후 서울, 울산 합동대의 남선우, 김영태가 도전하여 다시 한 번 등정에 성공하였다. 이후에 많은 원정대가 도전을 하였고 30~40여명의 등정자가 나왔다.

  ▶ 1994년 초오유 정상(8,201m)등정에 성공한 한왕용 대장
  

  ▶ 험준한 바위와 설산이 빚어내는 장엄함이 아름다운
  초오유(8201m)의 전경

히말라야 8,000m 봉우리는 더 이상 슈퍼 알피니스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 동안 히말라야는 슈퍼 알피니스트들의 도전 대상지로만 생각되었다. 일반인들에게 8,000m 고봉은 감히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업등반 회사가 생겨나고 일반 아마추어 등산인을 도우면서부터 현실은 달라졌다. 1985년 미국의 사업가 딕베스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에베레스트에 등정함으로써 아마추어도 마음만 먹으면 세계 최고봉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지금까지 8,000m 14좌 중 가장 등정자가 많은 산은 어디일까? 바로 초오유다. 왜 유독 초오유에만 등산인들이 몰리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14좌 보다 어프로치가 짧고, 난이도가 낮고, 사고율이 적어 등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많은 등산인들은 상업등반 회사의 도움으로 8,000m 14좌 중 가장 쉬운 봉우리 초오유를 먼저 등반한 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글 한왕용
사진 한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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