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고원을 품고 있는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
두샨베(Dushanbe)는 타지키스탄의 수도로 시장이 서던 월요일을 뜻하는 타지크어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두(Du)는 '두 번째', 샨베(Shanbe)는 '토요일'이므로 '토요일에서 두 번째 날'이 되므로 월요일을 의미한다. 1927년 스탈리나바드라고 불렀으나 1961년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두샨베는 교통의 요지로 인구는 약 58만 명이며 건물이나 길이 널찍널찍해서 상쾌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타지키스탄이란 나라도, 두샨베란 도시도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타지키스탄의 동쪽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쪽은 우즈베키스탄, 남쪽은 아프가니스탄, 북쪽은 키르기스스탄이다. 인구는 2023년 현재 약 1천만 명이고 면적은 남한의 1.4배 정도다. 남한의 인구와 비교해 약 20%n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 남한의 1.4배에 살다보니 인구 밀도가 매우 낮다. 국토의 93%가 산악 지역이고 전체 평균 고도가 3,186m이다. 타지크인은 84%가 살고, 우즈베키스탄인이 14%이 살고 있는데 고려인도 64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전체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두샨베의 인구는 약 80만 명인데 두샨베는 19세기까지는 마을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공산세력이 중앙아시아에서 오면서 그에 저항하는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반혁명군이 두샨베에 모여들어 저항했지만 결국 1922년에 볼셰비키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그리고 1929년에 두샨베와 그 일대는 ’타지크 자치 공화국‘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스탈리나바드’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탈리나바드는 1961년 스탈린 격하 운동의 일환에 따라 옛 이름인 두샨베로 바뀌었다.
두샨베는 관광 자원이 많은 곳이 아니다. 도심지에는 집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멀리 흐릿하게 산들이 보이지만 두샨베에서 자연이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샨베의 도로는 넓고 건물들은 큼직큼직하고 웅장해서 시원해 보인다. 교외에 이스칸데르 쿨 호수가 있거 파미르 하이웨이를 따라 파미르 고원에도 가볼 수 있다. 타지키스탄은 파미르 고원을 품고 있는 나라다.
“두샨베의 볼거리”
두샨베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같은 관광지가 아니다. 볼거리가 있는 중심지를 돌아보는데도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내 중심지의 루다키 공원에 볼거리들이 모여 있다. 우선 이곳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국기 게양대가 있다. 높이 165m라는데 가장 높은 곳은 사우디 아라비아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변동이 생겨서 지금은 세 번째 높이라고 한다.
사실, 별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현지인들은 그것을 강조한다. 루다키 공원 근처에는 사만 왕조의 건국자인 이스마일 소모니를 기리는 동상과 탑들이 있다. 타지키스탄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사만 왕조에서 찾고 있다. 타지키스탄의 국장이 장식된 개선문과 대통령궁도 근처에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제일 큰 도서관과 타지키스탄 국립 박물관도 있으니 루다키 공원은 시내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타지키스탄 국립 박물관은 타지키스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알기 위해서 들러볼 만한 곳이다. 지하에는 자연사 관련하여 특히, 파미르 고원에 대한 자료와 설명이 있고, 1층에는 고대사 유물을 전시했다. 2층에는 사만 왕조, 근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는 미술관이 있다. 또한 두샨베에는 메흐르곤 시장이 있다. 두샨베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의미는 우정이라는 뜻인데 궁전처럼 엄청나게 지붕이 높은 건물 안에 시장이 있다.
“두샨베와 히사르의 역사”
원래 두샨베 서남쪽 10km 지점의 히사르 (히소르)가 옛날부터 이 일대의 중심 도시였다. 해발 700m의 언덕에 위치한 히사르는 키루스 대왕시절부터 요새가 세워져 박트리아-토하리스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거점이 되었는데 1513년 사마르칸트와 함께 두샨베 지역은 부하라 칸국에게 지배당했다. 이후 히사르 지역에는 술탄국이 세워져 부하라 칸국에 군사력을 제공하는 등 속국으로 있다가 17세기 들어 부하라 칸국에게 병합되었고, 동시에 타지크 인들이 유입되었다. 1711년 우바이둘라 칸이 암살된 후 부하라 칸국이 약화되자 히사르는 재차 독립했다. 그러나 20세기 소련 시절에 인근의 시장에 불과하던 두샨베가 근대 도시로 개발되면서 히사르는 소외되었고, 현재는 두샨베의 위성도시로 남아있다.
“타지키스탄의 역사”
현재 타지키스탄의 영토는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세월 속에서 수많은 왕조들이 이곳을 점령해서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고, 또 타지크인들 역시 현재의 타지키스탄 영토에만 산 것이 아니라 부하라, 사마르칸드, 발흐 등지에서 활동했기에 타지키스탄의 역사는 우즈베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역사와 겹친다.
자료의 부족으로 별로 밝혀지지 않다가 1933년 남부 타지키스탄의 산꼭대기에서 한 목동이 먼지 더미 속에서 도자기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양피지에 쓰인 수많은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공격하기 전에 판자켄트의 통치자 데바슈티치(Dewashtich, 재위 721~722)가 도주하면서 무그산에 묻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밀랍과 송진으로 단단하게 밀봉한 덕에 1933년까지 잘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그 기록에 의해서 이 지역의 고대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대부터 파미르 고원의 판자켄트에서 서쪽으로 15km 거리에는 사라즘(Sarazm)이란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4천년경에서 3천년경 사이에 건설된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3천년경에 건설되었는데 이미 파미르 고원 일대에 인더스 문명보다 1천 년 앞선 문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타지크인들이 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의 후손은 아니다. 타지크인들은 그후, 기원전 2천년년경 볼가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캅카스 일대에 있던 인도 유럽어족 유목민들의 후손이다. 특히 이란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트란스 옥시아나로 이주한 인도 유럽어족들이 타지크인들의 직계 기원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머리털이 붉고 파란 눈동자가 특징이다. 인도 유럽어족들은 우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곡식을 재배하기에 적당한 땅이 나타나면 파종을 하고 몇 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고갈되거나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부족원 일부가 우마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거주 영역을 급속히 넓혀 나갔다. 기원전 12세기와 9세기 사이, 인도 유럽어족은 여러 곳으로 뻗어 나갔는데 그들 중의 일부가 오늘날 타지키스탄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집단은 주로 고대 이란계 종족인 박트리아인과 중앙아시아 문화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소그드인(Sogd人)이었다. 그들은 BC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귀속되고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이면서 페르시아화가 되었다.
그러나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 타지키스탄 지역을 정복하자 헬레니즘화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소그드인 출신 록사나를 왕비로 맞아 타국에서 결혼한다. 이 과정에서 부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결혼을 강행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셀로우코스 장군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향수병 때문에 그리스에 돌아가고 싶어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불만을 품고 종종 폭동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Kingdom)이 건국된다.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영토와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중심지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지키스탄은 이들의 영향력 하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스계의 박트리아 왕국이 토하라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동하여 오아시스 도시들을 거점으로 국제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그들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부로는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가고, 남부로는 인도의 쿠샨왕조의 영토로도 갔다. 그들이 쿠샨 왕조의 불교를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타지키스탄 일대에 전파했다.
타지키스탄을 지역을 근거지로 한 소그드인들은 에프탈 족과 서돌궐 제국 등 여러 유목 민족과 협력하며 고대 말부터 중세 초까지 실크로드 교역의 실세가 되었다. 6세기 중반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북인도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무역로가 뚫리면서 타지키스탄 산악지대는 무역로로 번성하게 된다. 그후 7세기에 튀르크 민족에게 점령당한 타지키스탄은 점차적으로 튀르크화 되었고, 7세기에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이슬람 제국에게 무너지면서 8세기 무렵에는 타지크족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그런 가운데 소그드인들은 튀르크와 혼혈을 이루며 튀르크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9세기 초반, 즉 819년, 타지키스탄 지역에는 사만 왕조가 들어선다. 타지크인들에게 사만 왕조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사만 왕조로부터 타지크족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사만 가문은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신들이 사산 제국의 귀족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나, 사만 가문의 기원은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소그드인들로 보인다. 사만 왕조가 주조한 화폐에는 아랍어 문자와 함께 과거 사만 가문을 상징하던 불교의 만다라 문양이 함께 새겨져 있다.
사만 왕조는 아랍제국의 압바스 칼리프조에게 충성을 했지만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사만 왕조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부하라, 사마르칸트, 이란 동부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 걸친 호라산 지역을 지배했다. 타지크인들은 이 사만 왕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훗날의 타지크인들은 세월 속에서 소그드인, 박트리아인, 호라즘인, 토하라 등등의 후손이 섞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1300년 전 시절의 사만 왕조와 민족이 그대로 내려와서 현대 타지키스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민족이 혼합되는 가운데 타지크인들이 형성된 것이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그 기원을 영광스러운 사만 왕조에 두고 있다.
마치 현재 한국인이 실제적으로는 고대부터 북방에서 온 인종, 남방 해양에서 온 인종 등이 합해지면서 만들어졌지만 ‘단군의 자손’이라 내세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타지키스탄인들의 생각을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우즈베키스탄인들도 자신들이 티무르 제국을 몰아냈으면서도 자신들의 영광을 티무르 제국에서 찾고 있는 것처럼, 왕조보다는 그들이 형성시킨 문화를 자기들이 계승했기에 현대의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이 지역의 나라들은 서로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르지만 동시에 겹치는 부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소그드인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즉 페르시아-이슬람 문화에 동화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상실했지만 소그드인들의 문화는 완전히 사멸되지는 않았다. 사만 왕조는 상인들과 장인들을 우대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마다 숙소를 세웠는데 이는 후대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의 정책으로 계승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의 소그드인들은 위구르 제국으로 흡수되면서 고대 소그드 문화는 중세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위구르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또한 오늘날 타지키스탄 일대에서 출생하여 사만 왕조에서 활동하던 이븐 시나는 중세 의학을 집대성해서 세계 의학 역사에 획을 그었다. 사만 왕조 시절, 부하라에는 서점이 흔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 이븐 시나는 우연히 부하라 시장의 한 가판대에서 알 파라비아의 주석이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책을 떨이로 파는 것을 집어왔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 시절 부하라의 왕실 도서관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그리스와 인도의 고전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번성하던 사만 왕조였지만 999년. 튀르크계 왕조였던 카라한 칸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급속히 국력이 약화되면서 튀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타지크족들의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그 주변에서 번영했고 영향력을 발위했다. 그 시절 사만 왕조가 믿던 이슬람교는 시아파의 이스마일파였다. 그러나 사만 왕조가 무너지면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는 이스마일파가 소멸된다. 다만 타지키스탄 동부 산악지대와 파키스탄 일부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이 10세기말까지 부하라를 수도로 하는 사만 왕조는 찬란한 문화를 누리며 번영하였지만 10세기 말 투르크에 의하여 멸망했다. 그리고 13세기에는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타지크 지방이 점령되는 가운데 엄청난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새로 일어난 티무르 왕조가 타지크족을 지배했다. 타지크족은 원래 페르시아 문화권에 포함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인의 혈통을 가진 유일한 민족이었지만 투르크족의 영향력이 강력해지면서 점진적으로 투르크계 우즈베크 민족의 영향력 안으로 흡수되었다. 16세기 이후 강력한 투르크족이 등장했고 종교도 시아파에서 수니파로 바뀌었다. 타지크족은 수세기 동안 투르크계인 우즈베크족과 동화되어 거주함으로써 투르크 문화권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15~16세기에서부터 18세기까지 타지크인들은 우즈베크 민족 국가인 부하라 칸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때 이란어 계열인 타지크어는 부하라 칸국의 지배적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투르크어족 민족이 지배를 했지만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언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유명한 도시인 사마르칸트에 가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의 주민 70%는 타지크족이고 타지크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부하라에는 타지크인들이 더욱 많아서 90% 정도가 타지크어를 쓰고 있다.
황폐화되었던 트란스 옥시아나 지방은 티무르 제국이 건설되면서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는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면서 얻어온 금은 보화들을 특히 자신의 본거지였던 사마르칸트 건설에 투자한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모인 타지크인들은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런데 우즈베크 족이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면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은 부하라 칸국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타지키스탄 일대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타지크인들의 거주지는 북부 타지키스탄, 남부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분할되었다.
그후 소련이 점령하면서 ‘부하라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이 형성되었고 타지크족과 우즈베크족은 그 안에서 1920년부터 1924년까지 같이 있었지만 그 후 타지크족들이 자치를 선언하면서 독립했고 1929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타지키스탄으로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1992년 이후부터 1997년까지 타지키스탄에서는 내전이 발생되었다. 공산당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 있었는데 내전이 끝난 후, 여전히 공산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타지키스탄의 제3대 대통령은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92년 11월 20일 이후 대통령이 되어서 현재까지 31년 동안 장기 집권하고 있다. 사실상 유일 정당이나 마찬가지인 인민민주당(PDP)의 대표로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대표적인 일당 독재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