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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

c.unsplash.com/AXP Photography

부하라(Bukhara)는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흥미로운 도시로 5세기부터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또한 이슬람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서 유명하다. 부하라는 승려들이 모여서 함께 수행하는 사찰을 의미하는 비하라(Vihara, Vahara)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단일한 문화가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 인도 쿠샨 왕조의 불교문화 그리고 중국과 페르시아 사산 왕조, 튀르크족의 문화가 뒤섞인 곳으로서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사만 왕조 시절 중심지였던 부하라”
7세기,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되고 나서 사만 왕조(Samanid, 874-999) 시절에 부하라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타지키스탄은 사만 왕조를 자신들의 뿌리로 보고 있는데 사만 왕조는 튀르크계의 카라한 왕조(999-1232)에게 멸망당한다.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이란계)고 카라한 왕조는 튀르크계인데 훗날 같은 튀르크계인 셀추크 튀르크에게 병합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219년 몽골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호라즘 왕국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를 공략한다. 몽골에 의해서 황폐화된 지역은 훗날 티무르 제국(1370년-1507년)이 일어나면서 사마르칸트가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부하라 칸국, 코칸트 칸국, 히바 칸국 등이 나뉘어져 공존했는데 부하라는 부하라 칸국의 수도로서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가 되었다.

“부하라의 다양한 민족 ”
부하라의 인구는 약 26만 명인데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지만 주민 중에는 타지크인이 훨씬 더 많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역사적으로 타지크/페르시아인이 주도한 도시였고 현재에도 타지크인이 다수다. 부하라 주민의 약 90%가 타지크어를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다. 현대 국가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구 소련 시대에 인위적으로 나눈 것이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또 20세기 중반까지는 부하라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소련 해체 후,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이스라엘이나 미국 등으로 이민하면서 오늘날에는 극소소의 유대인만 남아 있다.

“부하라의 볼거리”
많은 볼거리가 부하라의 구시가지에 있다. 구시가지는 1993년 구시가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성과 역사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부하라의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천년 전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오래된 다양하고 아름다운 모스크와 분위기는 종교를 떠나서 감탄을 자아낸다. 건축물의 아름다움, 포근함 등이 피부로 느껴진다. 대상들이 머물던 카라반 사라이도 있다. 이런 곳은 대개 숙소, 식당, 상점으로 쓰이는데 그곳을 거닐다 보면 천년 전의 대상들이 카라반 사라이에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사람들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복장을 하고 있고 순박해 보인다. 이슬람교도이지만 엄격해 보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다. 구시가지의 관광지들은 매우 많지만 대부분이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어서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아르크 요새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역사적인 성이다. 척 봐도 견고한 요새인 이 성은 5세기에 처음 지어졌었는데 왕이 거주하던 곳이며 군사적 방어 요새다. 높이가 16-20m이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긴 회랑이 나온다. 골목길처럼 길이 나 있는데 안에는 모스크도 있고 광장 중앙의 단위에는 황금빛 의자가 있는데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었다.

부하라에는 수많은 모스크 및 마드라사(이슬람 학교)가 있다. 볼로 하우즈 모스크는 부하라 칸의 전용 모스크로 볼로는 지붕, 하우즈는 물을 의미한다. 즉 물이 있는 높은 지붕의 모스크라는 뜻인데 이곳에 있는 인공연못은 '천상의 연못'이라 불리고 있다. 울루그 벡 마드라사((Ulugh beg Madrasah)는 1417년에 세워졌으며 과학과 교육, 문화를 장려한 티무르 제국의 칸, 울루그 벡에 의해 만들어진 부하라의 첫 번 째 마드라사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울루그 백은 사마르칸트에도 많은 마드라사를 만든 인물이다. 이곳의 돔 내부의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압둘 아지즈 칸 마드라사는 중국과 페르시아 영향을 받았다. 교역로에 있다 보니 그런 양식이 생겨났다. 넓은 안뜰은 페르시아 풍인데 벽에는 중국에서 온 행복을 상징하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손꼽히는 건물로 1650년에 세워졌다. 또한 미르 아랍 마드라사에서는 학생들이 모여서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 이곳에는 칭기즈칸에 희생된 어린이 700명을 추모하는 탑도 있다. 차르 미나르는 녹색의 첨탑이 있는 소박한 모스크로서 마드라사를 지키는 문지기의 집이었다고 한다.

사만 왕조 당시 왕이었던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도 있다. 이곳의 진흙 벽돌은 수천 년을 견딜 수 있도록 낙타 젖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구약 성서에도 등장하는 욥의 묘라고 전해지는 차슈마 욥의 묘도 있다. 온갖 고난과 병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졌던 욥은 기독교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지만 이슬람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구약성서의 일화는 이슬람에서 다르게 해석하지만 공유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가 진실로 이곳에 묻혔는지에 대한 진위여부보다는 이슬람인들의 믿음의 상징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타키 틸팍 푸루샨은 둥근 돔과 회랑으로 연결된 전통 시장으로 온갖 중앙아시아의 물건들을 팔고 있는데 유명한 새처럼 생긴 부하라 새가위도 볼 수 있다. 입구의 문이 매우 넓다. 낙타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라비 하우즈(Lyabi – Hauz)는 타지크어로 ‘연못의 둘레’라는 뜻인데 1620년에 만들어졌다. 연못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어서 시민과 여행자들의 휴식처다. 오래된 뽕나무 고목이 인상적이다.
칼란 미나레트(Kalan Minaret)도 매우 인상적이다. 푸른 색, 우뚝 솟은 거대한 굴뚝 같은 이 미나레트는 밤에 피운 불이 초원의 빛이 되었다고 한다. 대상들에게 이 불빛이 초원에서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밤에 보면 어욱 환상적이다. 그 옆의 칼란 모스크는 12,000명이 예배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사원이다.

“우즈베키스탄은 교역로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부하라에 많은 역사 유적지가 있는 이유는 중국에서부터 로마까지 가는 교역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자료는 강국(康國)으로 불린 사마르칸트, 안국(安國)으로 불린 부하라, 석국(石國)으로 불린 타슈켄트(Tashkent) 등의 도시들을 모두 속특(粟特) 즉 소그드(Sogd)인의 도시라고 불렸다. 소그드인들은 중국 대륙에서부터 동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무역을 담당한 상인들이었다. 소그드인들의 문화는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Afrasiab)이나 판지켄트(Panjkent) 등의 유물과 벽화에 나타나고 있는데 부하라도 그들의 무대였었다.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에서 많은 활약을 했었고 그들이 활동했던 소그디아나 지방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화가 열린 곳 중의 하나고 기원전 1000년 중반에는 마라칸다(사마르칸트) 등의 도시가 흥했었다.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정복되었고, 기원전 4세기말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었다.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중앙아시아 지대를 지배하고 있 페르시아 세력을 무너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제국을 세웠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부하 장군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 왕국이 쇠퇴하자 왕국의 태수 중 한 명인 디오토투스가 기원전 246년에 박트라(현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를 수도로 한 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박트리아 왕국은 전성기 때, 동쪽으로는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타림 분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이란),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Sogdiana), 남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소그드인들은 박트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지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의 지배계급은 그리스계 출신이고 그리스어가 공용어였으며 그리스 화폐가 통용되는 헬레니즘 국가였다. 그들은 기원전 2세기 전반부터 간다라 지방에 그리스문화를 전파하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불교 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탄생했다.
그러다 서쪽에서 침입한 파르티아 왕국에 의해 국력이 쇠했다. 파르티아 왕국은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후 226년까지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한 왕조로 전성기의 영토는 이란 지방을 중심으로 서로는 시리아, 동으로는 인도 북부에 달했다. 이란 북부의 유목민 부족들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칭했다. 이 나라를 중국에서는 안식국(安息國)이라 불렀는데 그들이 소그디니아(사마르칸트, 부하라 지방)를 다스린다.
그러다 기원전 2세기에 이 지역은 북쪽에서 남하한 월지(月支,Yuezhi)국이 점령한다. 월지는 기원전 1천년경 중국 간쑤성 서부의 초원지대에 살았던 유목민들로 기원전 176년 흉노에게 큰 패배를 당한 후, 일리 계곡(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으로 이주했다가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에 정착한다. 지금의 부하라, 사마르칸트, 이식쿨 호수 등의 지방이다.
한편 중국의 한무제(BC156~BC87)는 월지가 훙노족에게 패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연합하여 흉노족과 싸우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한무제는 장건에게 이 길을 가서 월지국에게 함께 흉노족을 칠 것을 제안하라고 한다. 이길은 목숨을 건 모험의 길이었다. 장건은 흉노 출신 감부(甘父)를 길잡이 삼아 100여 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해서 서역 지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하서(河西) 지역에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건은 그곳에서 10여년간 억류를 당했고 흉노 여인을 처로 얻어서 아들까지 낳았지만 기회를 노리다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서쪽으로 수십 일을 여행한 끝에 아랄 해로 흐르는 시르 강 상류의 페르가나 지방, 즉 대완(大宛)에 도착했다. 페르가나 지방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이며 수도 타슈겐트에서 남동쪽으로 239km 떨어진 타지키스탄, 키르키스스탄 국경 지역이다. 대완 왕은 장건에게 호의적이었고, 장건은 비로소 월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장건은 강거(康居)를 거쳐 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다.
장건은 한 무제의 뜻을 전하며 월지 왕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지는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며 주변 대하(大夏)국을 복속시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월지로서는 굳이 한나라와 동맹하여 흉노를 공격할 까닭이 없었다. 1년 남짓 머무른 장건은 월지를 떠나 귀로에 올랐지만 다시 흉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년 정도 억류되어 있던 장건은 군신선우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흉노인 아내와 시종 한 명을 데리고 탈출하여 기원전 126년경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안을 출발한 지 약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비록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장건은 서쪽 지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보고했고, 이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후 박트리아의 다섯 개의 주요 월지 부족 중 하나인 쿠샨족이 이웃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서기 3세기에 크게 일어난다. 쿠샨 제국은 북쪽의 타림 분지의 투르판에서 남쪽의 인도-갠지스 평원의 파탈리푸트라까지 뻗어 있었다. 쿠샨 제국은 실크로드 무역을 발전시켰고 인도에서 부흥한 인도 대승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많은 학자들은 월지가 인도 유럽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란(페르시아) 즉, 인도 유럽어족의 백인계인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의 무역을 담당했으며 북쪽에서 남하하는 유목민, 튀르크계와 혼혈이 되는 가운데 지금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 특히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문화는 2, 3천년간의 역사 전개 속에서 인도 유럽어족인 이란(페르시아계), 튀르크계들의 피와 문화와 종교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형성되었는데 현대의 우즈베키스탄의 정체성은 이슬람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러났다.

“부하라 가는 길”
역사를 알고 나면 부하라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 시절, 소그드인들의 활약, 박트리아 왕국, 파르티아 왕국, 월지국, 장건, 쿠샨 왕국 그리고 티무르 제국, 사만왕조, 부하라칸국 등을 상상하고, 수많은 왕국의 역사가 혼재하며 지금도 다양한 인종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라 큰 흥미를 갖겠지만 여행은 ‘현재’에 일어나는 것이기에 현실은 상상과 좀 다를 수 있다.
사마르칸트에서 기차를 타고 온 관광객들은 부하라역에 내리게 되는데, 이곳은 부하라 시내와 좀 떨어진 '코곤(Kogon)'이란 곳이다. 이곳에서 부하라 시내까지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 기사들의 바가지가 심하다고 한다. 물론 그런 정보가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녀서 여행자들도 쉽게 당하지는 않지만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밤에 기차역에서 나오면 택시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여행자들은 약자가 된다. 그런 실랑이를 하기 싫다면 밤늦게 도착하는 경우 역 부근의 숙소를 잡고 1박을 하는 것도 요령이다.
부하라 역 부근에는 아미르 궁전이 있으므로 먼저 이곳을 보는 것이 좋다. 부하라 역에 밤에 도착하면 근처의 호텔에서 1박한 후, 다음날 오전에 부하라 칸국 아미르 궁전을 돌아보고, 만약 밤 기차를 타서 오전 일찍 도착하면 마찬가지로 먼저 궁전을 돌아본 후, 부하라 시내에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