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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프놈펜은 과거의 크메르루주에 의한 참혹한 학정이 서려 있는 가난한 나라지만 공항에 내리면 편안한 기분이 든다. 낮은 하늘에서 오는 푸근한 기운 때문에 그렇다. 도심지는 낡은 건물로 가득 찼고 시클로, 모터 바이크,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묘한 생동감에 차 있다. 혼란스러워보이는 움직임 속에서 살려고 하는 욕망과 노력들이 도시를 활력 있게 만들고 있다.

“프놈펜은 낙후되었지만 활력이 넘치는 곳”
캄보디아는 옆 나라 태국이나 베트남에 비하면 훨씬 낙후된 곳이다. 수도 프놈펜은 치안이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밤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매우 순박하고 친절한 편이다. 이제 캄보디아도 점점 발전하는 가운데 비즈니스를 할 줄 알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순박한 면이 많은 곳이다.
메콩강과 쌉 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는 프놈펜에는 왕궁과 사원들이 있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프놈 펜'이라는 명칭은 이 거리의 언덕에 세워져 있는 사원인 와트 프놈(Wat Phnom)에서 유래한다. 프놈 펜은 '펜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펜 부인은 믿음이 깊은 여성으로 강을 따라 흘러온 불상을 건져서 사원을 만들고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그 사원을 ‘왓 프놈’(언덕 위의 사원‘이라 불렀고 그 언덕을 프놈펜이라 부르다가 도시 이름이 되었다. 프놈펜은 1년 내내 평균 최고기온이 30도를 넘고 1년중 5개월은 평균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을 육박하는 무더운 나라다. 1년 내내 평균 최저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늘에 앉아 있으면 시원해서 살기 좋다는 말도 있다.

“프놈펜의 역사”
1431년 캄부자 왕국(앙코르 왕국)은 시엠립 근처의 앙코르 유적지에서 프놈펜 근처의 ‘우동’이란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16세기 무렵, 네 개의 큰 강이 만나는 곳인 프놈펜은 교역이 번창한 곳이었지만 습지대였다. 스페인인이나 네덜란드인, 혹은 화교나 일본인이 무역으로 다수 왕래했는데 캄부자(앙코르) 왕국은 1866년 수도를 ‘우동’에서 프놈펜으로 옮겼다.
그러나 앙코르 왕국(캄부자 왕국)은 태국의 시암 왕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존립마저 위험하게 되었다. 태국은 캄보디아의 서북부 지역, 즉 바탐방과 시엠립 지역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했었고 베트남은 19세기 중엽 아예 캄보디아를 말살시키기 위해 베트남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베트남은 미개한 캄보디아인들을 개화시킨다는 명분 하에 베트남어를 교육시키고, 식탁 예절도 베트남식으로 바꾸라고 했으며 캄부자(앙코르) 왕국의 왕을 마음대로 폐위시키며 속국으로 다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프랑스는 캄부자 왕국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1863년 보호조약을 맺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프랑스가 없었다면 아마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에 의해서 양분되고 국가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호해주겠다는 프랑스 역시 1884년에는 더욱 강화된 조약을 맺음으로써 본격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후 1920년대에 프놈펜은 ‘아시아의 진주’로 명성이 높아졌고 프놈펜 국제 공항도 건설되었다.
그후 캄보디아는 1953년 독립했고 1960년대까지는 이웃 나라의 내전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웠다. 프놈펜은 '동양의 파리'로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고 치안도 좋은 도시였다. 그러나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에 의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미국은 북 베트남과 전쟁을 하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기 위해 라오스나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했다. 농촌 각 지역에 폭격을 퍼붓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민들이 난민이 되어 프놈펜으로 모여들었다. 그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모두 공산화된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에 의해 프놈펜은 함락되었고 시민들은 처음에 그들을 환영했지만 지옥이 시작된다. 그 유명한 ‘킬링 필드’에서 수백만 명의 자국 국민을 학살한다. 그후 베트남군과 함께 온, 훈센 총리가 장기집권을 했지만 개혁개방을 이끌어서 정치적으로 안정화되었고 지금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하고 있다.

“프놈펜의 볼거리들”
프놈펜에는 왕궁, 실버 파고다, 와트 프놈, 국립박물관, 독립기념탑 그리고 크메르 루주 시절 강제 수용소였던 ‘뚜올 슬렝 박물관’등이 있다. 왕궁 옆의 실버 파고다는 방콕에 있는 왓 프라깨우와 비슷한 양식으로 그것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1892년 나무로 만들었다가 1962년에 다시 건축했는데 왕궁은 들어갈 수 없지만 그옆의 실버파고다는 볼 수 있다. 1킬로그램짜리 은색 타일 5천 개가 뒤덮인 바닥 때문에 실버 파고다로 불리고 이 파고다 안에는 9,584개의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에메랄드 부처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언덕에는 와트 프놈이 있다. 프놈은 언덕이란 뜻으로 이 사원에서 프놈펜이란 이름이 유래된 곳이다.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낚는데 메콩 상류에서 4좌의 불상이 흘러 내려 왔다. 독실한 불교도였든 뻰(Phen) 부인이 이 불상을 건져내 안치한 곳이 와트 프놈이다. 여기서 프놈펜 (Phnom Pen)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으며 현재는 복을 빌거나 시험 잘 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사원이 되었다.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크메르 조각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앙코르 이전 시대인 푸난과 첸라(4~9세기), 인드라바르만 시대(9~10세기), 고전 앙코르 시대(10~14세기)에서 출토된 수많은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저녁마다 전통 무용도 공연하고 있다.
뚜올슬렝 박물관(Tuol Sleng Museum)은 정치범 수용소였다. 1975년에 Tuol Svay Prey 고등학교는 폴포트(Pol Pot)의 보안군에 의해 인수되어 보안 교도소로 알려진 감옥이 되었다. 그곳은 캄보디아 공산 정권 최대의 구금 및 고문 중심지가 되었다.
크메르 루주가 멸망한 후, 이곳은 그들의 범죄를 증언하는 ‘뚜올슬랭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가면 그 시절의 상황, 고문 시설, 고문당하던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 수가 있다. 기구와 그림을 통해서 끔찍한 시절을 돌이켜볼 수 있다. 그곳에는 참혹한 흑백 사진의 방도 있다. 크메르 루주는 사진으로 그 시절 수감자의 모습도 남겨 놓았는데 거의 모든 남성, 여성 및 어린이가 나중에 사망했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에서 온 몇몇 외국인들도 이곳에 갇혀 있다가 살해되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곳에 억류되었던 약 20,000명의 사람들은 고문을 받은 후 킬링필드로 갔고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죽거나, 학살당했다.
그후 혁명이 광기에 이르면서 이제 그곳에서 사람들을 고문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고문을 당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들 권력층에서도 계속 권력 다툼, 내부 숙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사람들을 고문하던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다. 1979년 초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해방시켰을 때 이곳에는 단 7명의 포로만이 생존해 있었고 대부분은 죽었다. 녹슨 침대, 고문 도구, 벽에 붙어 있는 불안한 초상화들을 보면 사람들을 몸서리를 치게 된다.

“점점 발전하는 프놈펜”
프놈펜은 과거와 달리 밝고, 현대화되고 있다. 곳곳에 멋진 호텔들도 들어서고 세련된 레스토랑, 카페등도 생겼다. 캄보디아는 가장 비참했던 시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프놈펜에 우울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은 프싸 뚤떰뿡(Phsar Tuol Tum Poung, 줄여서 TTP라고도 함)이라는 캄보디아 관광 시장에 가서 즐긴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영국, 프랑스 풍의 술집, 식당들이 곳곳에 있고 밤에는 바싹 레인 (Bassac Lane) 이라는 거리가 흥청거린다. 캄보디아의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인데 치안은 예전에 비해 좋아졌지만 여럿이 가는 것이 좋다. 지금은 소매치기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스마트폰 등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채 가는 사건들이 보고되고 있다.

“킬링 필드의 현장”
프놈펜 근교에 학살의 현장, ‘킬링 필드’가 있다.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장이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한 증오심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보기 위해서 들러 볼만한 곳이다. 킬링 필드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전 캄보디아에 퍼져 있는 학살의 현장이다. 그곳에는 사람을 죽인 구덩이와 발굴된 수많은 해골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상황을 알려면 캄보디아 역사를 좀 알아야 한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 공산군은 프놈펜과 전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대 개조 작업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약 1, 2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후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과 헨 삼린이 이끄는 캄푸챠 민족구국전선이 프놈펜을 점령하면서 폴포츠의 크메르 루주군을 몰아냈다. 그들로부터 해방시키고 났을 때 프놈펜의 도시 인구는 5천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모든 시민들이 다 시골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영양 부족, 학살 등에 의해서 죽었던 것이다. 프놈펜 근교의 킬링필드에서 죽은 사람드은 약 2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킬링 필드는 전국에 있고 약 1, 2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크레르 루주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키우 삼판은 그의 논문 ‘캄보디아의 경제와 산업발전’에서 캄보디아가 세계 경제에 통합되는 것은 국가 발전을 저해할 뿐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농업이 발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농촌, 도시를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농촌 위주의 사회를 먼저 건설하고 그후에 도시를 발전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와의 통합은 지주들의 부만 더욱 늘릴 뿐이며 여태까지의 정부는 그들을 위한 정책만 폈다고 비판했다. 그 경제구조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편입됨으로 인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왔기에 캄보디아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서는 도시 거주민들을 농촌 등 생산 현장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따로 놀았다. 크레르 루주의 병사들은 지식과 이상에 따라 싸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빈곤과 울분을 떨치기 위해 총을 든 사람들이었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도시민을 밀어낸 이상의 무모함, 식량의 부족, 병사들의 증오심, 잔학성이 결합되어 학살이 시작되었다. 식량 증산 운동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현장에서 일을 하는 도시민들은 먹지도 못하면서 하루에 10시간–12시간씩 노동하며 기아와 더위에 시달리다가 영양실조, 질병으로 인해 죽고, 학살당했다.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 중에는 15세 미만의 젊은 소년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가난에 찌든 무산계급으로 자산가와 얼굴 하얀 도시민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들에게 도시민들은 동포가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었다. 결국 정권 우두머리였던 폴포트의 위대한 공산주의 사회, 앙코르 왕국 시절의 위세를 떨치겠다는 이상은 엄청난 학살, 지옥으로 끝났다. 쌀 증산이 이루어지지 않자 1년 뒤 캄보디아는 더 심한 기근에 직면했고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혁명 구호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사회에는 오로지 당과 선전, 선동만이 있었다.
또한 권력층 안에서도 권력 투쟁이 생겼다. 처음에 타인들을 고문하던 이들이, 권력 투쟁에서 패하자 이제 그들이 숙청되고 고문당했다. 그후, 캄보디아는 사이가 안 좋던 베트남과 영토분쟁을 했고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진격하면서 폴포트의 황금기는 끝났고 그는 서북부 지역의 밀림으로 도망갔다. 크메르 루주군은 그곳에 거주하면서 계속 저항하다가 1998년 4월 15일, 폴포트는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측근에 의해서 화장되었다고 한다. 설에 의하면 베트남군을 등에 업고 온 훈센 정권이 크메르 루주군을 압박하자 이에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이 폴포트를 훈센에게 넘겨주겠다고 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폴 포트가 자살했다고 한다. 혹은 ‘따 목’이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폴 포트를 죽인 후,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그랬다는 설도 있다.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그렇게 끝을 맺었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으나 그로 인해서 캄보디아는 ‘똑똑한 사람들’이 다 죽어서 발전이 늦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캄보디아는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