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끈 여행공식 09 : 여행 동반자와 싸우지 않는 방법은 Break를 갖는 것이다.
성공적인 6개월 신혼여행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함께 있지만, 각자의 숨 쉴 틈, 즉 Break를 갖는 것이다. 지금의 여행 트렌드와 달리 1990년대 초반에는 장기 배낭여행자가 흔했고, 숙소의 기본값은 도미토리였다. 신혼여행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난했던 우리는 6개월의 신혼여행 동안 가장 많이 머문 곳이 커플스 도미토리였다. 싱글룸이나 더블룸보다 훨씬 저렴했고, 남자 도미토리·여자 도미토리·믹스드 도미토리 사이에 묘하게 존재하던 그 공간은, 여러 쌍의 연인이 같은 방에서 각자의 밤을 보내는 곳이었다.
하와이의 어느 커플스 도미토리에는 프랑스, 노르웨이, 캐나다, 영국 커플이 있었고, 아시아 대표로 우리가 있었다. 밤마다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질 것 같지만, 현실은 모두 조용히 각자의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이른 아침 햇살 속에서 자고 있던 젊은 노르웨이 커플의 풍경이다. 왜 비너스상이나 다비드상이 색시하지 않고, 아름다운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멕시코시티에서는 커플스 도미토리가 없어 아내는 여자 도미토리, 나는 남자 도미토리에서 지냈다. 일본인 여주인이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에는 장기 체류 중인 일본 여행자들이 많았고, 우리는 과테말라 비자를 받기 위해 닷새쯤 머물렀다. 그런데 넷째 날이 되자 묘한 일이 벌어졌다. 장기 여행자들이 하나둘 비싼 싱글룸과 더블룸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더니, “정말 독한 한국 신혼부부에게 졌다”며 남자 도미토리를 비워줄 테니 아내를 데려와 함께 자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1993년, 다른 여행자들을 도미토리에서 밀어내고 남자 도미토리에서 신혼밤을 보내는 전설 같은 커플이 되었다.
우리의 이동 경로는 지금 생각해도 숨이 찬다. 김포에서 출발해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샌디에이고를 거쳐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를 지나 마이애미에서 뉴욕까지 자동차로 종단했다. 이후 파리, 런던, 터키, 인도 북부, 방콕에서 싱가포르까지 기차 여행, 발리, 퍼스에서 시드니까지 버스 여행, 뉴질랜드를 거쳐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오버랜드 여행을 했다. 그 시절에는 세계일주 항공권도 없었고, 우리는 김포-하와이-샌프란시스코 편도, 그리고 뉴욕·런던·시드니에서 가장 저렴한 편도 항공권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며 길을 만들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는 오토바이를 빌려 아내를 태우고 섬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지며 사고가 났고, 우리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때 아내 손등에 남은 꿰맨 상처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허니문의 추억이자, 결혼을 기억하게 하는 피의 맹세다. 위치도 손등이라 결혼반지 대신 훌륭한 상징이 되었다. 반지보다 편하고,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다.
1993년의 인도와 태국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인도 여행으로 체력이 바닥난 나는 방콕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회복하려다 오히려 식중독에 걸려 응급실에서 이틀을 보냈다. 밤 12시, 택시를 타고 도착한 병원에서 1차 진단을 한 의사가 “콜레라”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아내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준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최종 진단은 식중독이었고, 입퇴원을 반복한 끝에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당시 동남아 최고의 가성비 여행지였고, 발리 쿠타 비치는 여행자들의 천국이었다. 지금은 브랜드 숍이 가득하지만, 그때는 로컬 수공예품 가게와 저렴한 호텔, 해변이 어우러진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태국 카오산, 네팔 카트만두와 함께 3K로 불리던 여행자 집합소였다. 우리가 묵은 방갈로는 화장실이 딸린 엔스위트 룸에 2인 숙박 2달러, 아침으로 바나나 팬케이크가 나오고 커피와 티를 방까지 가져다주었다. 빨래 서비스도 저렴했지만, 1~2달러를 아끼겠다고 뒷마당에서 손빨래를 했다. 빨래줄 옆에서 당시 광고처럼 “빨래 끝!”을 외쳤지만,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동네 불량배들이 담을 넘어 들어와 우리의 빨래를 몽땅 훔쳐갔다. 비싼 옷은 없었지만 재킷까지 합치면 족히 100달러는 되었을 것이다. 2달러 숙소에 묵다 결국 100달러를 쓴 셈이다. 여행은 절약뿐 아니라 인생의 순리도 가르쳐 준다.
6개월의 허니문을 마치고 마지막 여행지였던 중국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조국의 따뜻한 품이 아니라 항만 조사실이었다. 당시 중국은 ‘특정국가’로 분류돼 사전 허가 없이 입국하면 여권법 위반이었고, 우리는 홍콩에서 허가 없이 입국한 상태였다. 반성문 마지막 문장에 “모범적인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라고 적으며, 우리의 신혼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돌이켜보면 6개월의 허니문은 인생에 펼쳐질 동고동락을 미리 압축해 경험한 시간이었다. 24시간, 365일 함께 지내며 이미 권태기를 겪었고, 하루의 Break 후 다시 만날 때는 이산가족 상봉처럼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직장이나 사업을 하며 쉽게 만들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 6개월은 너무도 짧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6개월 신혼여행은 가장 가성비 높은 인생 여행이자, 결혼이라는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리허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