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Bosnia)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교차지점에 있는 나라이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끼어 디나리치 알프스(Dinaric Alps)에 걸쳐있으며, 동서가 만나 처음 악수를 나누고 의견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늘 분쟁지역이 되어왔다. 기독교, 회교, 정교회 권력의 지배를 교대로 받아가며 이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다문화 환경에 익숙해졌으며, 어느 정도 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992년 조화롭던 사회구조는 베오그라드의 연방군과 세르비아 관료의 도움을 받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깨어진다. 3년의 내전은 한때는 모두가 서로 이웃이고 같은 남부 슬라브 계통인 이들 회교 슬라브인, 정교회 세르비아인, 카톨릭 크로아티아인이 서로 대항하게 하였다. 전쟁은 나라의 사회기반구조를 황폐화시켰고, 수 백만에 이르는 난민을 만들었다. 또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인종 청소’라는 말을 현대 용어에 소개했다는 불명예스런 평가를 받게 했다. 이제 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났고, 여행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지만,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다시 여행객의 유입을 자랑 삼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통계 자료
  • 국명: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공화국
    면적: 51,200평방km
    인구: 430만명(전쟁 전)
    수도: 사라예보 (Sarajevo)
    인종: 보스니아인(44%), 세르비아인 (31%), 크로아티아인(17%), 기타(8%)
    언어: 세르보- 크로아티아어(종종 보스니아어로 불린다.)
    종교: 이슬람정교회(40%), 정교회(31%), 카톨릭(15%), 개신교(4%), 기타(10%)
    정체: 신생 민주주의
  • 지리 및 기후
  • 최근 뉴스보도에서 빈번히 다루어지는 톱날같이 화살머리모양으로 생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남부의 중앙에 있으며 그 크기는 스로바키아나 미국 테네시주 보다 조금 크다. 아드리아해 바로 동쪽에 위치하며 북, 남,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와 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접해있다. 남부 크로아티아를 바싹 마른 손가락정도의 굵기로 관통하여 가까스로 아드리아해와 접하며 총 20km의 해변을 가지게 되었다. 국경에 관한 데이톤 협약의 조인 후, 보스니아는 마치 환각적인 퍼즐조각같이 회교-크로아티아연합(영토의51%), 세르비아국가,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영토의 49%)으로 거의균등하게 분할되었다. 지중해, 발칸, 중부유럽의 3가지 뚜렷이 다른 생태계가 만나는 지점인 디나크 알프스는 중부와 남부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이다. 북쪽의 평원과 고원지대는 사바강에 접해 있다.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곳은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마글리치 (Maglic)로서 아드리아 해변에서 2385m높이로 솟아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체가 강한 지진대에 속한다.이 지역의 전형적인 기후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다. 사라예보의 1월 평균 기온은 섭씨1도이고 7월의 평균기온은 섭씨21도이다. 봄철은(4월, 5월) 고지대에서는 여전히 눈이 덮여있지만 풍부하고 다채로운 동식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 역사
  •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일리안족(Illyrians)이었고, 뒤이어 사라예보(Sarajevo)근처 광천 부근에 로마인들이 이주해왔다. 로마제국이 분열된 기원 395년,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국경선인 드리나(Drina)강은 서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을 분할하는 경계가 되었다. 슬라브족이 7세기경 이 지역으로 왔으며 960년 세르비아 독립국이 되었다. 1383년 최초의 터키 침공이 있었고 백년 내에 보스니아는 사라예보를 수도로 하는 터키의 한 주가 되었다. 터키가 지배하던 400여년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철저히 동화되었다. 로만 카톨릭을 믿던 크로아티아인과 정교회를 믿던 세르비아인중 상당수가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보스니아는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간의 경계가 되었다. 오토만의 지배가 느슨해진 16세기와 17세기, 터키인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제국의 전진 보루로 쓰기 위해 지배를 강화하였다. 19세기 중반 남부 세르비아인들의 국가부흥운동은 터키인에 대한 항쟁으로 이어지고, 불가리아전쟁에서 러시아에게 대패한 터키는 결국 영토를 포기하고 물러난다. 러시아의 지지를 받던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그왕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무력으로 장악한다.
    계속되는 외세의 지배에 대한 분개는,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완전히 합병했을 때 더욱 심해졌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이 합스부르그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도 (Franz Ferdinand) 대공을 암살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하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러 뛰어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 왕당파에 합병되고, 1941년에는 크로아티아 파시스트에 다시 합병된다. 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괴뢰정부는 수십 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40년대 스타일의 '인종청소'로 학살한다. 영국과 러시아군대의 도움으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휘를 받는 유고슬라비아 국민군대는 1944년 둑일군을 몰아낸다. 1948년 소련의 지도자 요세프 스탈린는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연합을 제안하지만 티토는 거절한다. 티토 정부는 공산주의정권이지만 소련위성국가는 아니었으며, 그 후 약 40년 동안 티토와 그의 후계자들은 인종문제를 진압하고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이뤄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연방을 유지한다. 1990년 11월 공화국의 첫번째 자유선거에서 공산정권은 각기 자신들의 사회를 대변하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당과 압도적으로 다민족국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원하는 회교당에 패배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대항하여 크로아티아당과 회교당은 연합하고, 1991년 10월 15일 중요한 안건에 세 민족 각자가 거부를 행사할 수 있던 관례를 깨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세르비아 국회의원들은 의회서 탈퇴하여 그들 스스로 의회를 구성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유엔에 급히 가입하자 각 당간의 대화는 파기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회교 대통령이 세르비아인들의 권리를 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오그라드 지도자들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인종학살’로부터 보호하도록 세르비아 극우주의자들을 선동하였다. 내전은 1992년 4월 사라예보의 Holiday Inn호텔에서 세르비아 저격수가 평화를 부르짖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약 5만 명의 전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의 도움을 받아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사라예보는 4월 5일 포위당하고 세르비아 포병대에 의해 포격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서부의 다른 세르비아인 거주지와 자신들과의 300km 통로를 만들기 위해 북부와 동부의 보스니아 회교도들을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잔인하게 추방하였다. 마을은 테러와 약탈을 당하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불태워졌다. 떠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학살당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측 모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1992년 6월 모스타르(Mostar)에서 헤르첵-보스나 (Herceg-Bosna) 크로아티아 공통체가 형성되었고, 그 해 11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대통령 사이의 보스니아영토 분할에 관한 협상이 결렬되자 크로아티아인과 회교도간에 격렬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스타르의 회교거주지의 작은 봉쇄는 사라예보 봉쇄 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92년 8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인도주의적인 구조활동을 펴는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11월 6000명의 유엔병력이 구호품의 운송을 보호하기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파병 되었다. 그들의 무능함은 1993년 1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부수상이 한 세르비아 검문소에서 유엔장갑차로부터 끌어내어져서 프랑스 평화유지군들 앞에서 처형될 때 극적으로 드러났다. 1993년 중반 세르비아의 ‘인종청소’가 거의 끝나 갈 때 유엔은 회교도를 위한 ‘안전지대’를 건설하는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중 하나가 스레브레니차 (Srebrenica)로 1995년 약 600명의 남자들이 ‘안전’지역에서 끌려 나와 유엔군의 시야에서 그다지 멀지않는 공동묘지에 버려졌던 악명 높은 장소이다. 한 세르비아인이 발사한 박격포가 사라예보의 붐비는 시장에 떨어져서 68명의 시민이 죽고 200명이 부상당하자 비로소 유엔은 뻣뻣한 태도를 그만두고 세르비아에 대하여 위협을 시작한다.
    1995년 8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세르비아인들은 방어적인 입장에 있고,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이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을 원하는 시점이 되기 전에 평화안을 제시한다. 당사자들간의 회의는 1995년 11월 미국 오하이오 데이톤에서 열렸고, 전쟁전의 경계선을 유지하고 두 분리된 주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회교-크로아티아 연합(Federacija Bosne i Hercegovine )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공화국(Republika Srpska)으로 남는다는 합의안이 도달하였다.(12월 파리에서 비준된다) 협약에 서명하고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군은 합의된 경계선으로 철수하였고 나토 평화유지군이 그들 사이를 완충지점을 차지하였다. 약 3만 4천명의 나토군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평화유지군으로 여전히 주둔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민간인들이 나라를 다시 재결합하고 건설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평화가 정착하였지만, 이웃 코소보의 민족간의 싸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다. 데이톤 협약에서 비준된 지도체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민주주의 체제의 나라로 남게 하였다. 대표대통령(the Chairman of the Presidency)으로 알려져 있는 현재 국가수반은 회교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Alija Izetbegovic )로 부통령인 크로아티아인 안테 옐라비치(Ante Jelavic)와 세르비아인 지브코 라디시치(Zivko Radisic)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 정부 수반들로는 각료회의(the Council of Ministers) 공동의장인 보로 보시치(Boro Bosic)와 하리스 실라이지치(Haris Silajdzic)가 있으며, 이들이 함께 각료들을 임명한다. 3명의 대통령 연합제에 더하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솔리치(Vladimir Soljic )가 있고 스르프스카 공화국(the Republika Srpska )의 대통령, 니콜라 포플라센(Nikola Poplasen )이 있는데, 그는 강경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어서 평화협상의 중계자들을 걱정시켰다. 얼마나 정치적 상황이 복잡한가를 설명하는 한 예로, 1997년 지방자치선거에 80개의 정당이 등록하였다. 보스니아 세르비안인들은 분리요구를 철회하였지만 회교와 세르비아 지도자들간의 언쟁은 평화정착을 힘들게 한다. 유엔은 헤이그에 전범으로 25명의 용의자를 수용하고 있으며 1999년 나토군은 세르비아가 운영하던 케라테름 (Keraterm) 포로수용소에서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을 처형한 혐의로 드라간 쿠룬지야(Dragan Kulundzija)를 체포하였다. 전쟁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고 국제 평화유지군도 당분간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 경제
  • 국내 총생산 GDP : US$ 184 억
    1인당 국민총생산 GNP : US$ 3,712
    주요산업: 광물, 자동차조립, 섬유, 담배, 목제가구, 탱크 및 비행기조립, 가정용품, 정유(공장은 대부분 심하게 파괴되었거나 문을 닫았음)
  • 문화
  • 역사적으로 보스니아인들은 회교, 동방정교, 카톨릭, 개신교, 유태교 등 다른 여러 종교와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해 왔다. 그들의 예술과 건축은 이러한 다양성을 반영했으며, 음식 역시 그렇다. 이러한 형제적 관용은 전쟁중의 잔혹한 한 차례의 ‘인종청소’로 살벌하게 땅에 떨어지고 만다. 전쟁 후에도 서로에게 저질렀던 잔학한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고, 관용의 정신은 전쟁 중에 불타고 폭격 입은 회교사원, 유태교회 등의 다양한 믿음의 다른 상징 등과 함께 사라졌다. 종교적 갈등은 이 황폐화 된 나라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새로이 생기기 시작한 관용과 통합에 대한 희망적 관측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공화국은 거의 모두가 정교를 믿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은 거의 모두 회교도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국에서 회교사원과 교회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종교적이므로 종교보다는 민족주의와 더 관계가 많다. 하지만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 회교도 모두는 같은 남부 슬라브 민족이므로 그들을 구별할 수는 없다. 사투리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연방에 속한 보스니아사람은 ‘보스니아어’라고 부르고 크로아티아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크로아티아어’라고 불리며, 스르프스카 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어’라고 불린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 사람들은 라틴 문자를 쓰고 세르비아사람은 키릴문자를 쓴다. 키릴문자는 30개 이상의 알파벳을 사용하며, 그 중 많은 알파벳은 영어와 같이 발음된다. 보스니아는 그 이름을 이 지역을 흐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따왔고, 헤르체고비나는 15세 터키정복 전까지 이 지역의 남쪽 일대를 지배했던 헤르체크(대공)으로부터 기원했다. 회교가정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관습으로, 주인이 슬리퍼를 준다. 일반적으로 보스니아사람들은 방문객들에게 굉장히 친절하다. 하지만 화제가 정치로 바뀌면 최선의 전략은 듣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하여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 편이 옳다고 확신한다. 이 나라가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고기구이, 양배추와 고기 스튜인 보산스키 로나치(bosanski lonac), 터키과자 바크라바(baklava), 항상 딸려나오는 치즈와 고기가 층으로 있는 뷰레크(burek)과 피다(pida) 등의 음식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채식주의자들은 선택의 폭이 좁지만 항상 치즈파이 시금치 파이인 시르니차(sirnica)나 젤라니차(zeljanica)가 있다. 투파히예(Tufahije)는 호도와 휘핑크림이 위에 덮인 애플케이크이다. 보스니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는 역사소설 3부작에서 첫번째인 드리나강의 다리(Bridge over the Drina)로 노벨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이다. 아마도 뜻밖이겠지만 보스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농구로 이 나라가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처음 듣는다면 더욱 놀랄 일은, 그들이 농구를 아주 잘 한다는 사실이다.
  • 축제 및 행사
  • 공화국의 날(Republic Day)은 연방에서는 11월 25일, 스르프스카 공화국에서는 1월 9일에 기념한다. 특정 종교 휴일과 함께, 3월 1일의 독립일, 5월 1일의 노동절은 모두 같은 날 기념한다.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해마다 사라예보 필름축제가 8월 늦게 열리며, 2월에는 겨울축제, 3월에는 연극과 음악공연이 열린다.
  • 여행자 정보
  • 비자: 최근에는 미국인과 대부분의 EU국민은 입국할 때 여권만 소지하면 된다.
    건강상 유의할 점: 진드기가 옮기는 뇌염, 간염, 광견병, 장티푸스, 여행성 설사, 터지지 않은 지뢰 및 포고령, 자동차 강도질
    시간대: 그린위치 표준시 보다 1시간 빠르다.
    전압: 220볼트, 50헤르츠
    도량법: 미터법
  • 경비 및 환전
  • 통화: 마르크와 같이 쓰인다.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 3-6
    중급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6-15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15 이상
    저렴한 숙박: US$25-40
    중급호텔: US$40-70
    고급호텔: US$70 이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경제는 현금에 전적으로 의존한 경제체제이다. 최근 도입된 독일 마르크와 1:1로 고정된 ‘공식’ 환율에 의해 가격이 책정되지만, 보스니아 디나르와 독일 마르크화가 가장 널리 통용된다. 크로아티아 쿠나와 세르비아 디나르도 해당 민족이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에서 쓰이며, 몇몇 호텔을 제외하고 미국 달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메두고르예(Medugorje)를 제외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신용카드는 널리 쓰이지 않는다. 여행자 수표는 어떤 은행에서는 현금으로 찾을 수 있지만 몇 주간의 지연을 예상해야 한다. 현금자동지급기는 아직 사용되지 않는다. 호텔의 객실료는 아주 비싸며, 특히 돈에 비하여 객실을 사정은 더욱 그렇다. 민박을 하면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레스토랑의 음식은 비싸지 않다. 고급 레스토랑과 택시를 탈 때 일반적으로 팁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 여행 시기
  • 방문 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일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릴 것을 제안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방문에 좋고 나쁜 때는 없다. 기후는 지중해기후와 중부유럽기후가 공존하며,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년 내내 기후는 온화하다. 관광객들이 지나치게 몰려드는 계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주요 여행지
  • 사라예보(Sarajevo)
  • 전쟁 전 사라예보는 회교사원, 시장, 그림 같은 옛 터키식 바자 등 과거의 풍요로운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을 간직한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였다. 1914년 프란시스 페르디난드 대공이 목숨을 잃은 운명적인 날 이후 시의 강변지대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그 사건이 있은 70년 이후 사라예보가 1984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경기장들을 방문할 수 있다. 수 백년동안 사라예보는 회교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 유태인 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의 전통은 최근 전쟁에서 세르비아에 의한 폭격으로 만 명이 죽고 5만 명이 다치면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3년간 야만적인 봉쇄기간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는 다시 한번 어느 정도의 정상을 찾게 되었다. 전차가 다시 운행되고, 많은 카페와 호텔이 다시 문을 열고 관광객들이 천천히 찾아 들기 시작하고 있다. 초기의 방문객들은 악명 높았던 전쟁터를 보려는 ‘전쟁을 좇아 다니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차츰 줄어들고 있다. 시간과 함께 행운도 따라 사라예보는 다시 한번 활동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 야이체(Jajce)
  • 야이체는 사라예보에서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로 가는 고속도로 변의 언덕이 있는 지방에 조약돌이 깔린 거리와 오래된 집들이 중세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다. 15세기의 터키지배 이전, 야이체는 보스니아의 기독교를 믿는 왕들이 거주하던 곳이며, 1943년 한동안 이 곳은 해방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1943년 여기서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의회의 2차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연방과 티토 원수를 공식적으로 피터 II세를 대치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합법적 지도자로 하는 원칙을 정하는 헌법을 선포한다. 1992년 10월 세르비아 분리주의자들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민족그룹이었던 회교도 약 3만 5천명을 잔혹하게 추방한다. 물론 민족들은 분리되어 살고 있다.
  • 모스타르(Mostar)
  • 사라예보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의 포도밭 가운데 있는 중간 크기의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의 중요한 도시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강의 교차지점에 15세기 터키인들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의 옛날 거주지, 쿠윤질루크(Kujundziluk)는 한때 회교문화를 잠깐씩 맛보려는 근처 해안 휴양지에서 매일 오는 수 천의 방문객을 맞이 하였다. 1993년 5월 시의 서부지역에 있던 크로아티아 군은 10개월간의 네레트바(Neretva)강 동쪽의 회교지역 봉쇄를 시작한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수천명의 회교도들을 추방하고 수 백 명을 학살한다. 이 과정에서 시의 16,17세기 회교사원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1993년 11월 모스타르의 푸른 네레트바강 수면에 있던 20m의 유명한 아치형의 터키식 다리가 크로아티아의 포격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현재 도시인구는 전쟁 전의 약 2분의 1이며, 도시는 회교와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도시의 매력인 중세 건물, 조약돌이 깔린 도로, 터키 기념품상회 등을 보러 방문객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지만 전쟁의 상처는 깊이 남아있다. 모스타르에 가면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보게 될 것이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 메두고리예(Medugorje)
  • 1981년 6월 24일 모스타르 바로 남서쪽의 치트루크(Citluk)와 류부스키(Ljubuski) 사이의 아주 가난한 산골마을의 십대 청소년6명이 성모 마리아의 불가사의한 출현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메두고리예에는 즉각적으로 경제붐이 일어났다. 10년후 메두고리예는 관광버스, 면세점, 기념품 매점, 자동차대여점, 여행사, 레스토랑, 반짝이는 메르세데스 택시, 교통체증 등으로 넘쳐 났다. '종교관광'은 마치 해안휴양지의 관광처럼 개발되었다. 기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내전은 순례자의 숫자를 최소로 낮추었지만 여행 편의시설들은 손상되지 않았고 새로운 열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다. 매일 미사 프로그램, 회합, 축성, 기도를 위해서 성 야메스(St James) 교회를 가보라. 만약 성야메스의 9개 교회뜰 안에 있다면, 교회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 포드브르도(Podbrdo) 옆의 출현언덕(the Hill of Apparitions)에서 월요일, 금요일 성모 마리아의 출현이 전통적으로 일어난다.
  • 트라브니크(Travnik)
  • 사라예보의 북서쪽 90km에 있는 좁은 협곡에 갇혀있는 트라브니크는 보스니아를 1699년에서 1851년까지 지배했던 터키 고관들의 부임지였다. 도시는 외교적 요충지로 성장하였으며 최근에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의 출생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의 전투가 주변 언덕에서 계속됐지만 대부분의 시가지는 부서지지 않고 남았다. 회교도의 수중에 있는 아름다운 중세시대 성, 광천수, 도심지 등은 사라예보에서 바냐 루카(Banja Luka)로 가는 하루 여행길 도중에 들릴 가치가 있다. 모하메드의 턱수염을 소장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울 헨데크(ul Hendek)의 지하 가까이 있는 여러 가지로 채색된 회교사원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 바냐 루카(Banja Luka)
  • 북서 보스니아 브르바스 강가의 교차지점에 있는 이곳은 오늘날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수도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은 많지 않다. 1993년 세르비아 지방은 이 도시의16군데 이슬람 사원을 절대 폭파시키지 않겠다고 확인했다. 유일하게 볼만한 곳은 브르바스와 나란한 16세기의 요새와 지나치게 큰 원형극장이다. 그 벤치는 전쟁 중 연료로 써버렸다고 한다. 시중심의 대통령 궁은 1998년 1월부터 보스니아-세르비아정부가 차지하고 있다.
  • 레저스포츠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풍부한 숲, 시내, 산들은 야외에서의 모험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사냥, 하이킹, 뗏목타기, 낚시를 즐길 장소는 많이 있으며, 모험을 즐기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전국의 스키휴양지와 건강 온천을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이러한 레저스포츠들을 고정 여행객들을 끌어당기도록 제대로 개발할 계획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망령은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데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전국의 숲 속에 깔린 수 많은 지뢰와 부비 트랩은 야생생물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보스니아 으로 가는 길
  • 사라예보, 모스타르, 바냐 루카의 비행장은 다시 문을 열었지만 상업항공은 단지 사라예보공항에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 항공편은 드문드문 있다. 몇 개의 큰 항공사와 많은 민간항공이 운항되지만 가격이 싼 비행기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미화 15불의 출국세가 사라예보공항을 떠날 때 부과된다. 철로는 최근 복구되고 있어 여행객을 위한 완전한 서비스는 아직 제공되지 않고 있다. 반가운 소식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르프스카 공화국 사이에 기차와 도로가 연결되었다는 것이고, 바깥 세상과의 연결도 개선되고 있다. 사라예보와 동부 및 중부 유럽 도시를 매일 연결하는 버스가 많다.
  • 국내 교통편
  • 일부도로가 전쟁 때 파괴되어 상태가 나쁘고 자동차강도를 당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동차 여행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에서 해볼 만한 선택이다. 무엇보다도 지역 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주의한 운전자들이다. 음주 운전사고가 증가하고, 큰 도시 외에는 자동차 정비업소가 드물다. 그래도 자동차여행을 원하면 다른 차량들과 같이 다니고 낮에만 운전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도시들간의 기차여행이 가능하고, 택시는 계속 도시에서 운행하고 있지만 지방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각 지역간의 버스여행도 차츰 개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