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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예루살렘이었던 다민족이 사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c.pixabay.com/peggy_marco

빌뉴스(Vilnius)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구시가지의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빌뉴스는 알프스 북쪽에서 가장 큰 바로크 도시이자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로 구시가지는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구시가지 중의 하나여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험난한 역사를 겪어왔다. 그런 힘든 역사에서 피어난 가상의 평화로운 공화국 ‘우주피스 공화국’이 매년 4월 1일(만우절)날 기념식을 갖는 독특한 곳이다.

“리투아니아의 예루살렘으로 불렸었던 수도 빌뉴스(Vilnius)”
빌뉴스는 면적 401k㎡에 인구는 59만 3,436명(2023,7)이다. 서울은 605.21k㎡에 940만 9466명인 것을 비교하면 도시의 인구밀도가 매우 낮고 한산하다. 빌뉴스에 있는 건축물들, 특히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 자체를 걷는 것 자체가 여행이다. 빌뉴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합해져서 연방 국가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다양한 민족이 사는 도시로 유명했다. 러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동방 정교회가 있었고, 폴란드로부터 영향받은 가톨릭 성당, 유태인들의 시나고그 회당, 개신교 교회, 그외 타타르족이 지배를 한 결과 이슬람의 모스크까지 들어선 국제적인 도시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홀로코스트 대학살 이전에는 빌뉴스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중심지 중 하나였다. 빌뉴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아서 ‘리투아니아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붙은 적이 있었고 나폴레옹은 1812년에 이곳을 통과하며 ‘북쪽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홀로코스 이후 유대인들은 학살되어서 예전과 같지 않다.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는 2009년에 오스트리아 린츠와 함께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도시지만 험난한 역사를 갖고 있다. 빌뉴스는 물론 리투아니아 전체가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나라의 존립 자체가 힘든 시기를 산 적이 있다. 리투아니아뿐만 아니라 발트 3국이 모두 그런 신세였다.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총칭으로 발트 3국을 다 합해도 한반도의 75% 정도 면적이다. 그만큼 작은 나라들이다. 이민족과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에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1918년에 독립하여 세 공화국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발트 3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40년에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그 이후로 독일군의 점령 때(1941∼1944)를 제외하고는 민족 공화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민족, 언어 면에서 에스토니아인은 우랄계,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슬라브계 소수민족에 속한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영향으로 독립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다가 1991년 8월, 보수 군부세력의 쿠데타 실패 후인 9월 4일 러시아연방 최고회의에서 승인됨으로써 51년 만에 이 나라들은 독립했다.

“리투아니아와 빌뉴스의 험난한 역사”
빌뉴스(Vilnius)라는 이름은 리투아니아어로 잔물결을 뜻하는 빌니아강(Vilnia River)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게디미나스 공작이 꿈속에서 철갑을 두른 늑대와 여러 늑대들이 울부짖는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을 이교도 성직지가 ‘이곳에 나라를 세우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 말에 따라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빌니아 강에서 이름을 따와서 빌뉴스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14세기의 문서에도 이 도시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1323년에 빌나(Vilna)로 처음 언급되었다. 14세기에 리투아이나는 기독교의 튜턴 기사단의 침략을 자주 받았었다.
14세기 후반에 ‘요가일라’라고 하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폴란드 왕이 되면서 16세기 중반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형성된다. 이 연방의 통치자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왕이라는 두 가지 직함을 가졌었다.이렇게 되자 리투아니아와 빌뉴스는 문화적으로 수준이 더 높았던 폴란드에게 동화가 된다. 폴란드인들이 많이 와서 살았으며 다양한 민족들도 와서 살게 된다. 그러나 17세기에 모스크바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약탈당했으며 학살당했다. 또한 1710년에는 페스트로 35,000 명의 주민이 사망했고 1737년, 1741년, 1748년, 1749년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에 인구 56,000 명으로 빌뉴스는 러시아 제국에 속한 도시 중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평가받았다.
그후 리투아니아 영토는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왕국으로 분할된다. 이에 리투아니아인들은 1794년 봉기를 일으켜서 빌뉴스에서 러시아인을 추방했으나 1795년 4월 3차 분할 후, 러시아에 다시 합병된다. 러시아 통치 기간 중 성벽이 파괴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하자 리투아니아인은 러시아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러시아가 계속 지배한다. 1831년 11월 러시아에 대해 봉기했지만 빌뉴스 대학은 폐쇄되었고 러시아의 탄압은 지속되었다, 1861년, 1863년 리투아니아는 계속 봉기했지만 주민들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이처럼 리투아니아 그리고 발트 3국 또한 우크라이나등의 러시아에 대한 저항은 요즘의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발생한 일이었다.
빌뉴스에는 유대인들이 많았었다. 1897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인구 154,000 명 중 유태인은 64,000명(약 40%)으로 이디시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폴란드인은 30.1%였고 러시아인이 20.9%, 벨라루스인은 4.3%, 리투아니아인은 2.1%에 불과했다. 같은 년도에 빌뉴스 근교의 농촌과 소도시를 포함해서 낸 통계에서는 벨라루스인 56.1%, 리투아니아인 17.6%, 유대인 12.7%, 폴란드인 8.2% 러시아인 4.9%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리투아니아인은 농촌에 좀더 많이 살았고 수도 빌뉴스에는 이민족들이 더 많이 산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0세기 초의 빌뉴스의 인구 중에서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약 500년간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살면서 실제로 폴란드의 정치, 힘, 문화, 종교가 지배하는 가운데 폴란드인과의 결혼을 통해 순수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에 동화된 결과였다. 피도 폴란드인과 섞이고, 언어도 폴란드어를 쓰고, 종교도 폴란드가 믿던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발생했다.(이것은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 지방과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의 영향, 동부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그 결과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속사정은 복잡하다. 이번의 러시아 침공으로 인해 반러 정서가 더 확산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독일군이 점령했을 때 리투아니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러시아군에 저항했으나 독일이 전쟁에 진다. 그후 폴란드군이 빌뉴스를 점령했고 러시아는 빌뉴스에서 물러난다. 이 무렵, 1916년 독일이 시행한 빌뉴스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인구의 50.2%가 폴란드인, 43.5%가 유대인이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했다고 한다. 1922년에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합병당하는데 폴란드 입장에서는 소유권을 주장할 만했다. 리투아니어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소수였다. 국제 사회는 1923년 빌뉴스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한다. 그후 폴란드 정부는 저항하는 리투아니아 민족을 탄압하고 문화 동화 정책을 핀다.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투옥되고 추방되었다.
(그런데 인구 조사에서 파악하는 폴란드인들은 순수 폴란드인이라기 보다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인 것 같다. 그래서 폴란드계라고 해서 무조건 폴란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리투아니아인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운동이 계속 있어 왔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나치 독일이 부상하자 리투아니아는 중립을 지킨다. 독일군이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하자(물론 리투아니아도 함께), 독일과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서로 분할 통치한다. 그 시절 폴란드에 속해 있던 빌뉴스 지역은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은 주민들을 억압하고 자산과 공장을 소련 영토로 옮겼다. 그리고 리투아이나에 소련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소련 정부는 1939년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넘긴다.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동안 리투아니아에 짙게 깔렸던 폴란드 색을 걷어 내고 독립하고 싶어했지만 소련은 1940년 8월 3일 리투아니 전체를 합병해버리고 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어 소련 연방에 속하게 만든다. 이후 주민 2, 3만 명의 도시 주민이 체포되어 소련 극동 지역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그동안 서로 불가침 조약에 의해 소련을 침범하지 않던 독일은 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222일, 소련을 전면적으로 침공한다. 이에 리투아니아인들은 반 소련 봉기를 시작하면서 독립을 선포하고, 리투아니아 임시정부를 만들었지만 1941년 6월 24일 빌뉴스를 점령한 독일은 이곳을 통치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이곳에 살던 유태인들이 학살당한다. 유태인 인구 265,000 명 중 약 95%가 살해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패망하자 19944년 7월, 빌뉴스는 다시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한다. 전쟁으로 인해 1939년에서 1949년 사이에 빌뉴스는 인구의 90%를 잃었고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유태인 인구는 거의 전멸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빌뉴스에는 이웃 지역과 리투아니아 다른 지역, 소련의 외딴 지역(특히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에 살던 이들이 빌뉴스로 이주했다. 소련은 빌뉴스에 대규모 산업지역을 만들고 공장을 건설했다.
그후 빌뉴스의 인구 구성이 바뀌었다. 1931년에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 인구의 0.8%에 불과했지만 1959년에는 34%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폴란드인은 65.5%에서 20%로 감소했으며 러시아인은 3.8%에서 29%로 증가했다. 엄청나게 많았던 유태인은 27.8%에서 7%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빌뉴스는 소련 공산정권에 대한 반체제 인사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던 무렵인 1990년 3월 11일 소련에서 탈퇴하고 리투아니아 독립 공화국을 복원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자 소련은 1991년 1월 9일 군대를 보내서 국립 라디오 및 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tv 타워를 공격해 최소 14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7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소련은 1991년 9월 마침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고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빌뉴스가 되었다.
이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그 외의 발트 3국은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소련), 독일이라는 강대국 그리고 과거에는 폴란드 사이에 끼어서 험난한 역사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폴란드 역시 영토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 지역에서 폴란드는 나름대로 강대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발트 지역의 나라들은 늘 다른 나라에 점령당하는 험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그후 빌뉴스는 빠르게 변화하며 현대적인 유럽의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역사적인 건물의 대부분이 개조되었고 빌뉴스는 오스트리아의 린츠와 함께 2009년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고 2023년 NATO 정상회담이 빌뉴스에서 열렸다. 2001년 인구를 보면 리투아니아인이 60%를 차지하고 폴란드계는 20%, 러시아계가 14%라고 한다. 30-40% 정도를 차지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학살과 이민으로 인해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리투아니아는 현재 유럽에 속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해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현재 리투아니아도 자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2012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28.2명의 자살율로 세계 4위인데 이 수치도 80~90년대 소련 말기, 붕괴 이후의 경제난 때문에 늘었던 자살률에 비하면 낮아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8년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하면서 OECD 자살률 1위가 되었다고 한다. 2018년 대한민국 자살률은 26.6명인데 그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8년도에서 2020년까지 3년간의 통계를 종합해보면 한국이 1위고 리투아니아는 2위다. 슬로베니아도 그 뒤를 따라서 3위다.(참고로 2022년 한국의 자살률은 25.2 명으로 낮아졌다.)
리투아니아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농촌이 보수적인 카톨릭이고 가부장제이다 보니 도시의 젊은 여성들이 농촌으로 결혼하지 않으려 하고, 그러다 보니 농촌의 노총각들이 소외감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도 비슷한 문제가 있지만 동남아시아에서 결혼 오는 여자들이 있는데 리투아니아는 그런 형편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자살률은 나라마다 요인과 사정이 다른데 리투아니아의 경우도 이런 문제가 있다.

“몽상인가, 현실인가? 만우절에 독립기념식을 하는 우즈피스 공화국(Republic of Uzpis)”
빌뉴스에는 작은 공화국이 있다. 일명 우주피스 공화국((Republic of Uzpis)이다. 이 작은 지역에 가면 그들이 만든 기념물도 있고 흔적이 남아 있으며 자체 정부, 헌법을 갖고 있지만 겉보기로는 평범한 마을이다. 그래서 거창한 기대를 하고 오면 좀 맥이 빠질 수 있디.
그러나 매년 만우절, 즉 4월 1일이 되면 그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주피스(Uzpis)’란 ‘강 건너 편’이란 뜻으로 빌 뉴스 구시가지를 벗어나 빌리나 강 건너마을에 있다. 이곳에 사는 예술가들이 모여 1997년 4월 1일 우즈피스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공화국을 세웠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국기와 대통령도 있고 헌법도 있다. 해마다 4월 1일에는 기념행사를 하고 국경을 이루는 다리를 건너면 국경 검문이 있고 세관 검사도 한다. 방문객에는 여권이나 손, 팔 등에 도장을 찍어준다. 이렇게 하루 동안만 존재감을 드러내며 지역 주민과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지역은 한동안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보헤미안적이고 자유방임적인 분위기로 인해 파리의 몽마르트르 및 코펜하겐의 프리타운 크리스티아니아와 비교되었다.
우주피스(Užupis)는 작은 마을이고 크기가 약 0.6 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하며 약 7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에서 약 1,000명이 예술가다. 한쪽은 빌니아 강을 경계로 구시가지와 분리되어 있고, 또 한쪽에는 가파른 언덕이 있고, 근교에는 소련 통치하에 건설된 산업 지역이 있다. 16세기에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대부분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사망했으며 오르막에 있는 그들의 유대인 묘지는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다. 버려진 집들에서는 주로 노숙자, 매춘부, 불법 거주자 등이 살았으며 1990년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이 지역은 도시에서 가장 방치된 지역 중 하나였다. 동시에 이 지역은 소비에트 시대부터 가난한 예술가와 보헤미안들의 거주지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빌니아 강 근처의 버려진 건물에서 살고 있다. 그 예술가들이 일을 벌인 것이다.

이 공화국은 형식상 입헌 공화국이며 대통령은 로마스 릴레아키스, 총리는 사칼라스 고로데키스, 상원의장은 알기만타스 레케비치우스다. 상하원도 있는데 우주피스 공동체의 명예롭고 책임 있는 회원들의 모임이 상하원이다. 이 모임도 세월이 가면서 발전했다. 1998년 3월 1일에 독립을 선포하고 2001년에 헌법을 제정했는데 그중에서 그들의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을 부분적으로 소개한다.

1. 모든 사람은 빌니아강(Vilnia River) 옆에 살 권리가 있고 빌니아 강은 흐를 권리가 있다.
2. 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가 있다.
3. 모든 사람은 사랑할 권리가 있다.
4. 모든 사람은 사랑받지 못할 권리가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5. 모든 사람은 구별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
6. 모든 사람은 게으름을 피울 권리가 있다.
7. 개는 개가 될 권리가 있다.
8.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9.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10. 누구도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11.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할 권리가 있지만 축하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12. 모든 사람은 권리가 없을 권리가 있다.
13. 패배하지 말라.
14. 반격하지 말라.
15. 항복하지 말라.

흔히 그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모토는 ‘패배하지 말라, 반격하지 말라, 항복하지 말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몽상가적인 예술가들이 만우절날 벌이는 하나의 해프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곳에 가면 별로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만든 ‘천사의 탑’이 있기는 하다. 2002년 4월 1일, 중앙 광장에 나팔을 부는 천사상이 제막되었고 그것은 부활한 우주피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낙서 같은 것, 담벼락에 그들을 홍보하는 문구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강변의 레스토랑과 카페.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몽상과 현실 사이에 교묘하게 걸쳐 있다. 독립 기념일을 만우절로 삼은 것도 절묘한 장치다. 거짓말 같기도 한데 실제로 그날 입국 검사를 하고 도장을 찍어준다. 그리고 우주피스 외무부는 전 세계적으로 500명 이상의 대사를 임명했는데 대사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특정 주나 지역에서 공화국과 헌법을 대표하는 대사도 있고, 윙윙거리는 새의 대사, 인류에 대한 지식의 대사, 거리에서 휘파람을 부는 대사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공화국의 정신을 공유하는 대사도 있다고 한다.
자칭 공화국의 주민들은 매년 4월 1일(만우절) 우주피스의 날에 이 독립을 기념하는데 우주 피스 공화국의 대통령 로마스 릴레이키스는 시인이자 음악가이자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2013년에 티베트의 14대 달라이 라마가 방문했고 2018년에 다시 와서 공화국의 ‘티베트 광장’에 나무를 심었다. 티베트의 14대 달라이라마는 종교의 지도자이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신적 지도자다. 그가 와서 이 공화국을 축하해주고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로 인해, 환상같기도 하고, 장난같기도 한 우주피스 공화국은 현실감을 갖게 된다.
또한 각국의 대사 중, 뮌헨 주재 우주피스 공화국 대사관은 예술과 AI 기술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인공 지능을 사회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잘 알려진 대사로는 실험 영화 제작자 Jonas Mekas, 미술 평론가 Konstyantyn Doroshenko, 지식 디자이너이자 개방형 혁신 촉진자 Eveline Wandl-Vogt, 숙련된 디자이너 Nelly Ben Hayun 박사 등이 있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우주피스 공화국의 시도가 단지 장난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민족주의, 민족 감정,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지고 나라조차 없어지고, 서로 증오하고 학살한 그런 역사 속에서 나온 절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현실로 알고 아득바득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도 환상이다.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을 외치며 광기를 보였던 나치즘도 가고, 볼세비키즘을 내세우던 러시아의 공산주의도 망했다. 그들이 힘을 발휘했을 때는 그것이 현실 같지만 그것이 망하고 나면 한갓 환상이 된다. 우주피스 공화국의 주장이 환상, 몽상처럼 여겨지는 것은 현실적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과 엉뚱함은 망할 일도 없고 현실 속에서 꿈과 이상이 되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해갈지 흥미로운 일이다.

“동유럽 지성의 산실, 빌뉴스 대학교”
빌뉴스 대학교는 우주피스 공화국 근처에 있다.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대학으로 발트 3국에서 가장 오래됐고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대학교다. 1579년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왕 스테판 바토리가 만든 예수회 대학으로 동유럽 지성의 산실이었다고 한다. 빌뉴스 대학교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발트의 길(Baltic Way)이 시작된, 빌뉴스 대성당”
빌뉴스 대성당은 리투아니아의 가장 오래된 교회로 600여년 이상의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 리투아니아인들이 믿던 천둥과 비의 신인 페르쿠나스 신전터 위에 지은 교회로 성당 앞의 광장이 메인 광장이다. 이 광장은 ‘발트의 길’(Baltic Way)의 시작점이었다. 1989년 8월 23일 발틱 3국 시민 200만 명이 참가해서 675km에 이르는 ‘발틱의 길’이이란 인간 띠를 만들어 소련에게 독립을 요구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대성당 앞 광장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까지 675㎞ 에 달하는 거리를 인간들이 손을 잡고 인간사슬을 만드는 거대한 시위였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대략 1, 2백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위는 발트3국 국민들의 연대 의식과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고 결국 독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유 선거를 통해 1990년 3월 리투아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국가들 가운데 처음으로 독립을 했고 이어서 1991년 8월에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이 ‘발트의 길’(Baltic Way)은 2009년 유네스코의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의 궁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자와 미래의 폴란드 왕을 위해 15세기에 건설된 궁전이다.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 일라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함께 다스리게 되면서 미래의 ‘리투아니아-폴란드 연방’국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를 위한 궁전이다.

“게디미나스 성 탑”
이곳은 빌뉴스를 최초로 만든 게디미나스와 관련된 성탑으로 1933년 폴란드 건축가에 의해 재건된 벽돌 탑이다. 리투아니아에서 가톨릭 순례의 주요 장소이자 가장 중요한 종교, 역사 및 문화 기념물 중 하나다.

“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
빌뉴스에서 샤울레이까지는 214km 떨어진 곳으로 라트비아와의 국경 지역에 있어서 라트비아 가는 길에 누구나 들르는 곳이다. ‘십자가 언덕’을 보기 위해서다. 가는 동안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는데 샤울레이 근처의 낮은 언덕에 가면 십자가들이 빽빽이 들어선 십자가의 숲이 나타난다. 그 기이하고도 장엄한 광경 앞에 서면 신기하지만 그 내력을 알고 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리투아니아는 근처 나라에 비해서 기독교, 즉 카톨릭을 늦게 받아들인 나라였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발트 지역의 신들을 믿었는데 이로 인해서 13세가, 14세기에는 튜튼 기사단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뒤늦게 카톨릭을 믿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종교심은 매우 깊었다. 현재 리투아니아 국민의 90%b 이상이 카톨릭 신자인데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 일라가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해 동맹을 맺으면서 폴란드가 믿고 있던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1389년의 일이다.
현재 빌뉴스에서 라트리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샤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관광지다. 이 십자가 언덕에는 18세기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분할 당했던 시절, 전쟁터에 나간 자식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십자가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에 속하게 되면서 소련 정부는 종교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없앴다. 그러나 주민들은 계속 십자가를 세웠다. 무덤 위에 새우는 것이 아니라 언덕 위의 곳곳에 세웠는데 소련 및 리투아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이 낮에 그 십자가를 없애면 주민들은 몰래 밤에 나와서 다시 십자가를 세웠다는 것이다. 철거하면 다시 세우는 일종의 저항 운동이 1944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반복된 것이다. 이것이 축적되면서 십자가들이 숲을 이루었고 현재 약 5만 개의 십자가들이 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염원을 안고 세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던 소련 정권이 오히려 무너졌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곳에서 가서 십자가의 숲을 보면 감동을 받게 된다. 이념과 공산주의에 맞선 종교심과 자유를 위한 비폭력적 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곳에 가서 이곳은 희망, 평화, 사랑, 희생, 비폭력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