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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영광과 이슬람 시아파의 심장인 테헤란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다. 이란의 히잡 시위로 인해 2023년도 현재 여행 가기가 머뭇거려지는 곳이다. 현재 이란의 정식 국호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으로 이슬람의 율법이 생활 속에 깊게 드리워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근대화를 원하지만 권력을 잡은 이슬람주의자들이 강력하게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분위기는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편이다. 언젠가 이란이 변한다면 테헤란은 역동적이고 활기찬 매력적인 도시가 될 것이다.

“테헤란은 활기찬 대도시”
테헤란시는 2023년 인구가 약 930만 명인 이란의 수도로 이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이란 산업의 절반 이상이 테헤란에 집중되어 있는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고, 지구에서 21번 째로 큰 도시다. 사계절이 뚜렷한 테헤란은 이란 고원의 북서부 해발 1,2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부에는 알보르즈 산맥이 있고 이란 최고봉인 다마반드 산이 있다. 겨울은 강수량이 많기 때문에 테헤란 부근의 산에는 스키장들이 많지만 테헤란 도시를 벗어난 남쪽으로는 중앙 사막이 펼쳐져 있다.

“테헤란의 역사”
테헤란은 기원전 6천년 전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고 9세기에는 마을이 있었지만 주목받는 곳은 아니었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해서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수도 테헤란은 역사가 짧은 편이다. 테헤란은 카자르 왕조의 모하마드 칸 아자르가 이곳에서 즉위한 후, 1796년 카자르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발전했다. 모하마드 칸 아자르는 기존 수도들인 시라즈(Shiraz)나 이스파한(Esfahan) 대신 소도시 테헤란을 선택하는 것이 기득권 세력들을 상대하는데 유리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도 테헤란의 인구는 8만에 불과했다. 카자르 왕조의 뒤를 이어 1925년 성립된 팔라비 왕조에서도 테헤란은 계속 이란의 수도였다. 팔라비 왕은 근대화를 위해 옛날 성곽과 구식 건물들을 철거하고 신시가지와 건물들을 건설했다. 팔라비 왕조 성립 당시 시가지가 크게 확장되었고 30만이었던 인구가 1966년에눈 272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1977년에는 테헤란에 서울로, 서울 공원을 건설했다. 한국에서도 같은 해에 수교의 의미로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를 만들었다. (기존의 삼릉로를 테헤란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팔라비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된 후, 테헤란은 폐쇄적인 도시가 되었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스커드 미사일의 공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시절에 소련식의 집합 주택이 난립하면서 테헤란서는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현재는 50층이 넘는 아파트 등 초고층 건물의 빌딩이 늘고 있다.

“테헤란과 근교의 볼거리”
테헤란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는 아니지만 이란의 수도이기에 많은 것들이 있다. 우선 그래드 바자르(Grand Bazaar)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거대한 시장이다. 길이가 10km가 넘는 여러 개의 길로 나누어져 있으며 길마다 다양한 유형의 상품들이 몰려 있다. 상점 외에도 모스크, 게스트 하우스 및 은행들이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테헤란의 랜드마크는 아자디 타워(Azadi Tower)다. ‘아자디’란 말은 ‘자유’를 의미하는데 팔라비 왕조 시대인 1966년 건축가 호세인 아마나트의 설계로 착공하여 1971년 이란 건국 2500주년 축제의 일환으로 완공되었다. 아자티 타워, 즉 ‘자유의 탑’은 건물이 매우 현대적이고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감탄한다.
니아바란 궁전(Niavaran Palace Complex)은 카자르(Qajar)와 팔라비(Pahlavi) 시대의 궁전 건물과 기념물로 구성되어 있고 골레스탄 궁전(Golestan Palace)은 로즈 가든 궁전으로도 알려졌는데 옛 카자르 왕실의 궁전이다. 테헤란 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기념물 중 하나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원, 왕실 건물, 18~19세기 이란 공예품과 유럽 선물 컬렉션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 보석 보물 창고(The Treasury of National Jewels)도 볼만하다. 이곳에는 30개의 왕관, 보석으로 장식된 12개의 검과 방패 등 수많은 귀중한 보석과 접시, 귀금속 등이 전시되어 있다. 타비아트 다리(Tabiat Bridge)는 테헤란에서 가장 큰 육교로 270m 길이인데 모다레스 고속도로를 지나 탈레가니 공원과 아보-아타쉬 공원이라는 두 공원을 연결한다. 타비아트는 페르시아어로 "자연"을 의미하는데 매우 아름다워서 여러 건축상을 수상했다.
테헤란은 근교에도 매력적인 관광지가 있다. 19세기 궁전, 폭포 등이 있는 여름에 캠핑하기 좋은 아프제, 고대 유적지, 사과, 체리, 호두, 배, 베리와 같은 다양한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원들이 있으며 폭포와 계곡이 있는 아랑게, 큰 강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아하르, 모스크와 성들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 바르간, 아름다운 강과 정원이 있는 코르단, 다양한 동굴과 폭포, 과수원이 많은 관광지 탈레간, 해발 약 2,700m에 위치해서 구름바다를 볼 수 있는 필반드 등 테헤란 근교에도 방문할 곳이 많다.

“이란의 근대화 역사와 이슬람 공화국”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이기에 이란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란은 근대화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의 갈등이 고조된다. 이 와중에 외세의 간섭, 전쟁 등으로 혼란에 빠진다. 특히 러시아는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다. 그후 이란은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과 계속 전쟁을 치른다. 1921년이 되어서 전쟁이 끝났는데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사망했고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 그들을 보호하려 한 무슬림들마저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시절의 카자르 왕조는 세계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영국의 지원을 얻은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를 대신 하여 팔라비 왕조를 연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레자 샤 팔라비왕은 1941년 6월, 영국이 이란 내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팔라비 왕은 이를 주권 간섭으로 보고 거부했다. 이로 인해서 1941년 8월 25일에 영국과 소련이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레자 샤 팔라비 왕은 1941년 9월 16일에 퇴위한 후, 당시 21세의 젊은 왕세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왕이 된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내내 이란은 영국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국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소련 군대는 이란을 떠나기를 거부하다가 소련에게 유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946년 5월에야 소련군이 모두 이란 영토에서 퇴각하였다.
그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이란의 근대화를 내세우며 이란에서 이슬람적인 종교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밀경찰로 반대자들을 탄압하며 독재 정치를 펼쳤다. 이것이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진적인 이슬람 율법학자였던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난다. 호메이니는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1964년에 출소한 이후 이란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에 그의 연설을 담은 테이프가 이란에 퍼지면서 호메이니는 주요 반정부 인사가 된다. 그후 1970년대 들어 이란 경제가 안 좋아지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정부의 부패로 인해 국민들은 불안해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팔라비 왕조가 취한 급진적인 근대화, 서구화 정책 때문이라 생각했고 항의 시위가 일어난다. 결국 1979년에 팔라비 왕조의 반대 세력들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고 레자 팔라비 국왕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새로운 구심점이 된 인물은 호메이니였다. 그는 다시 이란에 귀환하면서 왕정을 폐지하고 1979년 4월에 국민투표를 거쳐서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란 신정체제로 전환한다. 1979년 12월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신정헌법을 제정했다.
초기에는 급진적인 이슬람화에 반발하여 전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지만 이슬람 정부는 무력으로 강경하게 진압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왕정에 대항할 때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웠지만 정권을 잡은 후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 정부는 팔라비 국왕의 송환을 미국에게 요구했지만 미국 정부가 거절했다. 그러자 1979년 11월 4일에 무슬림 학생들 일부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였으며, 52명의 외교관들과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을 협박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즉시 이란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는 동시에 구출 작전을 폈으나 작전은 실패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에 모든 인질들이 국내로 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이 사태도 끝난다. 한편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팔라비 국왕은 이후 이집트로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 27일에 암으로 이집트에서 사망하였다.
1980년 9월 22일에는 이라크 군대가 이란 서부 지역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는데 전쟁은 1988년까지 약 8년을 끌었다. 이란의 전쟁 사상자는 약 23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1989년에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총리가 취임하였으며 친자본주의 정책을 피고 경제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정책들을 펴기 시작하였다. 다만 여전히 급진 이슬람 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1997년에 라프산자니 총리는 중도 개혁주의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하타미 총리는 이란을 조금 더 자유주의적, 민주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2013년 6월 15일에는 로하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는 타국가들과 관계를 점차 개선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2017년과 2018년에 이란에서는 종교 최고지도자에게 이란이 처한 어려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1주일가량 이란 전역의 인터넷이 끊긴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체포되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022년 9월에 20대 여성이 의문사로 죽는다. 이란계 쿠르드족 여성인 마흐사 아마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잡혀간 뒤 사망한 것이다. 이 소식은 sns를 통해서 급속하게 퍼져 나갔고 이란 여성들은 분노했다. 여성들은 책임자 처벌, 엄격한 히잡 착용법 폐지, 도덕 경찰 폐지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여성, 삶, 자유'를 외쳤는데 여성들의 당당한 시위는 과거에는 없던 것이다. 남성 우위의 의식을 가진 이란 남성들도 시위에 동참하고 나섰다. 이제 ‘여성의 권리’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들이 나오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종말을 요구하는 반체제 시위로 번졌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고 있다. 오래된 이슬람 독재가 숨막힌다는 것이다. 이 시위는 수도 테헤란의 부유한 지역에 사는 중산층부터 약 1200km 떨어진 남동부 발루체스탄과 같은 낙후된 지역에 사는 노동자 계층까지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1년이 지난, 2023년 9월 현재 그때만큼의 열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추모 집회를 열고 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지만 이란 정부 역시 강경 진압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히잡을 미 착용했을 경우 더 심한 법으로 대처하고, 이런 시위에는 서방 언론들의 선동이 있다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체제, 정권, 종교는 계속 세월이 가면서 변한다. 이란은 계속 변화 중이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이란은 현재 이슬람교의 시아파의 종주국이며 수니파의 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와 갈등 관계에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 관계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 사후(632년)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분열에 의해 형성된 양대 종파다. 현재 전 세계 이슬람교도 가운데 수니파가 전체의 83%를 차지하는 다수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다. '수니'란 말은 쿠란(이슬람교의 경전)과 함께 '무함마드의 순나(말과 행동,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한 이후 후계자 아부바크르가 1대 칼리프가 된다. 그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장인이며 동료이고 보호자이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그를 매우 아끼고 신뢰했다. 그는 무함마드를 극도로 혐오하던 우마르(훗날, 2대 칼리프가 됨)와 메카 최대의 부호였던 우스만(훗날, 3대 칼리프가 됨)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후계자 지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후, 아부바크르는 1대 칼리프(선지자 무함마드의 계승자, 대리자라는 뜻)가 된다. 그가 추대되는 과정에서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와 갈등이 있게 된다.
아부바크르가 재임한 기간은 2년이지만 그는 이슬람을 널리 퍼트렸다. 그는 죽으면서 우마르를 2대 칼리프로 지정했고 우마르 다음에는 3대 칼리프로 우스만이 된다. 우마르와 우스만은 아부바르크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결국 무함마드의 핏줄이 아닌 사람들이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수니파에서는 이렇게 이어지는 칼리프 통치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아부바르크를 무함마드 다음으로 존경하고 있다.
반면에 시아파는 아부바르크를 비난한다. 그가 무함마드에게 충성하고 그를 보필했던 이유는 권력을 위해서였고, 무함마드는 사실 그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에게 칼리프를 시키려고 했지만 아부바르크가 권력을 찬탈했다는 것이다. 이런 초기의 갈등이 점점 역사 속에서 갈등과 투쟁의 양상으로 번져나간다.
어쨌든 2대 칼리프 우마르는 약 10년간, 정복 지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쿠란을 편집했으니 그에 의해 이슬람교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정복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적들이 많아졌고 결국 기독교 노예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3대 칼리프가 된 우스만은 12년간 칼리프로 있으면서 정복지를 넓혔으나 이집트의 반란군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급기야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656년의 일이다. 4대 칼리프가 시아트 알리다. 그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으로서 무함마드의 사위이기도 했다. 결국 무함마드의 핏줄이 칼리프가 되었고 그는 656년부터 661년까지 5년 동안 4대 칼리프로 군림했지만 그 시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하고 있었다. 옴미아드 가문의 무아위야와 알리는 심한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661년에 알리는 살해당한다. 그때부터 알리를 따르는 이들이 시아파가 되고, 과거의 칼리프들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이들이 수니파가 된다. 시아파에게는 알리가 매우 중요하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들만이 진정한 무함마드의 후계자이며 그를 초대 이맘(이슬람의 통치자)으로 숭배한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직계 후손 11명만이 정당한 후계자이며 무슬림 공동체의 최고지도자이자 종교지도자로 본다. 반면에 수니파는 공동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프를 인정하고 있다.

수니파는 이슬람의 경전 쿠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도 중요시한다. 수니파는 이슬람의 교리가 하디스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글로 기록된 것들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반면에 시아파는 이맘(이슬람교의 통치자)이 중요하다. 이맘의 해석이 중요하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수니파는 쿠란을 영원하다고 보고 그 해석에 충실한 반면, 시아파는 이맘을 무함마드에 버금가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보고 그들의 쿠란 해석을 신봉하고 있다. 이란에서 종교 지도자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맘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제도에서 비롯된다.
또 시아파는 유일신 고백, 예배, 헌금, 라마단 중 금식, 성지 순례 등 수니파의 5개 기둥 외에 지하드(성전/종교적 투쟁)와 선행을 추가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영토와 신념,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성전에 나설 수 있다고 한 지하드 개념 때문에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두 종파의 적대 관계는 4대 칼리프인 시아파의 알리가 반대파에 암살당하면서 시작되었지만 특히 1926년 친서방 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건국되어서 수니파의 본거지가 되고,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이 시아파의 본거지가 되자 양쪽의 종교적인 갈등은 중동 패권을 둘러싼 국제정치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양국의 갈등은 1980년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 때 사우디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폭 지원하면서 극에 달했다.

“이란의 시아파”
이란의 이슬람화는 이슬람 세력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633년–654년) 이란 지방에 있던 사산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슬람화되었는데 이란의 이슬람은 초기 수니파 시기와 16세기 이후의 시아파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6세기 초까지는 이란인들은 수니파를 믿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세워진 사파비 제국은 열두 이맘파에 바탕을 둔 수피파를 근간으로 삼았고 이후 시아파를 국교로 삼아 강제적인 개종을 주민들에게 강요하였다. 1500년 이스마일 1세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하고 수니파를 시아파로 강제 개종시키면서 수많은 수니파를 학살했다. 사파비 제국은 이후로도 2백 년에 걸쳐 강제 개종 정책을 지속하였고 결국 이 지역 무슬림은 대부분 시아파가 되었다. 오늘날 이란 국민의 90%가 시아파다. 나머지 10%는 수니파로 주로 쿠르드계 이란인, 이란내 투르크멘인, 발루치족등의 소수민족들이 믿고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란은 이슬람화되었지만 아랍화되지는 않았고 페르시아인으로 남았다. 잠시 아랍에 의해 지배당했고 이슬람을 들여왔지만 이란인들은 시아파를 선택했는데 이란이 갖고 있던 독특한 요소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 이란은 이슬람화 되면서도 자신들이 갖고 있던 페르시아 문학, 철학, 의학, 예술을 결합시켜서 독특한 문화를 꽃 피었으며 문학, 과학, 기술, 의학 등에서 수백 명의 학자가 출현했다. 이들의 업적은 유럽에까지 흘러들어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시아파의 배타성으로 인해, 다른 지역 무슬림들 역시 시아파를 배척했기에 시아파는 이슬람 세계에서 소수로 남게 되었다. 시아파 성직자들은 수니파를 시아파로 개종시키는 것을 지하드(성전)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