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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 20의 출발지이며, 코르시카 혁명이 일어났던 칼렌자나

칼렌자나(Calenzana)는 1732년 제노바의 통치자들에 맞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킨 장소였다. 현재 이곳은 GR20 트레킹 코스의 북쪽 출발점이다.(남쪽에서 시작하면 종착점)

“칼렌자나 마을”
칼렌자나는 GR20의 트레킹 출발점인 마을로 산맥 밑에 있는 포근해 보이는 마을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슈퍼마켓이 있어서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살 수도 있다. 마을에는 마을 샘터도 있다. 칼렌자나는 칼비(Calve)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갈 수도 있으며 걸어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운이 좋으면 히치하이킹을 해서 갈 수 있다. 칼비는 코르시카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바스티아 (Bastia)까지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로도 갈 수가 있다. 칼렌자나에서 걷다 보면 트레일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코르시카 공화국의 탄생”
1729년 제노바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코르시카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 코르시카섬을 지배하던 제노바인들은 코르시카 귀족들이 섬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코르시카 농민들은 1729년 세금 납부를 거부하여 전면적인 저항운동을 했는데 그 시발점이 된 것이 칼렌자나다. 그 운동이 계속 이어져서 26년간의 투쟁 끝에 1755년 파스콸레 파올리의 지도 하에 독립 코르시카 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독립은 순탄치 않았다. 제노바인들은 코르시카에 보복을 가했고 후에 제노바인들은 이 섬을 1769년에 프랑스에 매각한다. 이로써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일부가 된다. 코르시카 공화국은 프랑스에도 저항했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혁명 지도자 파스콸레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잠깐의 독립 기간동안 코르시카 헌법은 파올리에 의해 19세기 중반까지 코르시카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그만큼 코르시카인들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제노바에게 저항하면서도 이탈리아어를 쓰고 이탈리아 문화를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파스콸레 파올리는 코르시카로 돌아와 1794년에 프랑스 통치에서 코르시카를 해방시키기 위해 영국군을 부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앵글로-코르시카 군대는 프랑스군을 섬에서 몰아내고 잠시동안 앵글로-코르시카 왕국을 세웠으나 영국이 1796년 코르시카에서 철수하면서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통치로 돌아갔다.

“프랑스에 무시당한 코르시카 섬”
이 섬은 황제 나폴레옹의 탄생지인데도 나폴레옹 정부에서 무시되었다고 한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코르시카는 영국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영국은 이곳을 가지려고 했지만 나중에 프랑스 군주제가 부활되자 다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그후에도 이 섬은 프랑스에 의해서 더욱 무시되었다. 코르시카의 수도 아작시오(Ajaccio)와 두 번째 도시 바스티아(Bastia)에는 중산층이 존재했지만 코르시카 전체는 주로 자급 농업에 의존했으며 씨족에 의해 지배되는 목축 사회였다. 원시적인 모습이 있어서 코르시카인의 복수법에 의하면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 범죄에는 치명적인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821년부터 1852년 사이에 코르시카에서는 4,300명 이상의 살인이 자행되었고 19세기 전반기에는 프랑스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탈리아 문화가 지배했다. 부자들은 자식들을 이탈리아의 피사로 유학 보냈고 공식 법령도 이탈리아어로 제정되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코르시카인들은 점점 프랑스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코르시카에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들이 퍼지고, 프랑스에서 일자리를 잡을 기회가 점점 늘어났다. 또한 식민지 제국 정복을 위한 전쟁 중에 프랑스군에 복무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코르시카 출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고 훗날에도 그의 가문이 한동안 황제를 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을 기점으로 코르시카는 점점 프랑스인이 되어 갔고 1870년경에는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차별적 대우 속에서도 프랑스라는 나라를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사이공의 경우 1926년에 유럽인 중에 12%가 코르시카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조직을 설립하면서 단결력이 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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