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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렌 코 계곡과 그곳에서 벌어진 비극

c.unsplash.com/Johannes Mändle

글렌코 계곡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 있는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계곡이다. 에든버러나 글래스고우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당일치기로 방문할 수 있다. 이틀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포트 윌리엄에서는 차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17세기에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었다.

“글렌코인가요? 글렌 코인가요?”
글렌코에 대해 조사하다 보면 글렌 코(Glen Coe)’와 ‘글렌코(Glencoe)’가 구분되지만 혼용해서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글렌 코(Glen Coe)는 글렌(Glen) 계곡을 말하고 ‘글렌코(Glencoe)는 그 계곡 기슭에 있는 마을의 이름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글렌코 계곡, 글렌코 마을로 분리하여 표기한다. 레벤 호수 서쪽에 있는 글렌코 마을은 레벤 호수의 글렌코 계곡을 탐방할 수 있는 좋은 베이스캠프다.

“아름다운 글렌코 계곡”
전반적으로 스코틀랜드 날씨는 5월에서 10월 사이가 가장 좋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은 눈이 부실 듯 선명하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탁 트인 길을 달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는 고지대로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로우랜드, 즉 저지대에 있다가 하이랜드로 접어들면 풍경이 바뀐다. 황량한 벌판, 산맥, 파란 하늘...다른 세계에 왔음을 실감한다. 특히 글렌코 계곡에 가까이 갈수록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기온은 섭씨 10도에서 20도 사이를 늘 유지해서 상쾌하다. 글렌코 계곡은 일년내내 아름답다. 눈이 가득 쌓였을 때나 여름에 푸르를 때나 항상 아름답다.
그러나 날씨는 예측할 수 없다. 맑은 날씨가 항상 보장되지 않기에 비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 일년 중 어느 시기에 가더라도 좋은 재킷과 좋은 신발은 챙기는 것이 좋다.

“글렌코 대학살(massacrr of Glencoe)”
글렌코 대학살은 1692년 2월 13일 스코틀랜드 고원의 글렌코 계곡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런 사건들도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인들에게 반감을 갖는 계가가 되었다. 이것을 알려면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한다.
청교도 혁명을 일으킨 크롬웰의 독재정치는 국민들에게 염증을 일으켰고 그가 죽자 잉글랜드 의회는 망명하고 있던 찰스 2세를 받아들여 왕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찰스 2세가 카톨릭을 옹호하고 전제정치를 행하자 의회 안에서 왕을 옹호하는 토리당과 의회를 존중하는 휘그당이 대립한다. 찰스 2세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카톨릭을 부활시켰다. 이에 의회는 1688년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그의 딸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한다. 1689년 공동 왕인 메리와 윌리엄 3세는 1689년 의회가 제정한 권리장전을 승인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유혈사태 없이 정권교체를 이루어서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쫒겨난 제임스 2세는 (스튜어트 왕조) 스코틀랜드계였고 그는 카톨릭을 지지했기에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와 카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임스 2세는 그 시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모두의 왕이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잉글랜드 의회의 단독행동에 의해서 물러난 것이었다.
한편, 스코틀랜드도 분열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저지대, 즉 로우랜드에는 청교도가 많아서 이들은 제임스 2세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반면, 카톨릭이 많았던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와 아일랜드는 제임스 2세를 지지했다. 이들을 자코바이트라고 한다. 즉 명예혁명에 대항하는 반혁명 세력으로 훗날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드디어 1689년 자코바이트들이 봉기했는데 이는 1690년 5월까지 대부분 진압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고지대)는 여전히 불안했다. 1690년 말, 잉글랜드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스코틀랜드 정부는 William과 Mary에 대한 충성 맹세에 대한 대가로 자코바이트 씨족에게 총 £12,000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691년 12월까지 그들 중 누구도 선서를 하지 않아서 여전히 새로운 왕 윌리엄 3세에게 저항했다. 그러자 윌리엄 3세는 충성서약을 하라고 협박을 한다. 윌리엄 3세의 위협을 받은 족장들은 쫓겨난 왕 제임스 2세에게 윌리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해도 되는지 물었다. 제임스 2세는 자신이 다시 왕이 될 가능성이 사라지자 족장들에게 새로운 왕 윌리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해도 좋다는 전갈을 보냈다. 전갈은 윌리엄 3세가 제시한 시한인 1692년 1월 1일을 몇 주 남겨놓지 않고 도착하여 몇몇 족장은 간신히 날짜를 맞추었으나 넘긴 경우도 있었다. 글렌코의 맥도널드 가문 12대 족장인 매클레인은 기한으로부터 5일이 지난 뒤에야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3세를 지지하는 캠벨가의 지휘자를 만나 윌리엄 3세에게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전달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담당 대신이었던 존 달림플은 오히려 실망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적인 하이랜드인들을 싫어했고, 차라리 그들을 힘으로 눌러서 멸족시키고 싶어했는데 막상 하이랜드의 족장들이 충성하겠다고 하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매클레인의 맹세가 시한을 어겼기에 벌을 주어야 한다고 윌리엄 3세를 설득한다. 1692년 1월 말,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 채, 윌리엄 3세의 명을 따르는 군대 120명이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 글렌코 계곡으로 온다. 그들이 맥도널드 가문의 마을에 숙박하자 자신들의 적대 세력이었지만 맥도널드 가문은 하이랜드 풍습대로 병사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존 달림플은 결국 윌리엄 3세로부터 맥도널드 가문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2월 12일, 드러먼드 대위가 은밀히 맥도널드 가문을 몰살하라는 명령서를 갖고 이곳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2월 13일 학살이 시작된다. 38명의 남자가 집에서 또는 도피하려다 살해되었고 도망친 여인과 아이 40명은 기아와 추위에 죽었다. 병사들 중에 양심을 가책을 받은 이들은 자신들을 환대한 주민들에게 위협을 알리려 했고 2명의 장교는 명령을 거부했다고 한다.
글렌코의 학살이 지금까지 극악한 범죄로 여겨지는 것은 그들을 환대하고 믿음으로 대한 이들을 배반하고 살인했다는 점 때문이다. 관련자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런 가혹한 조치를 취한 것은 다른 가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부대의 지휘자는 캠벨가 출신이었는데 15세기경부터 멕도널드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윌리엄 왕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캠벨가 사람을 학살의 책임자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두 집안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글렌코에는 맥도널드 학살 추모탑이 있다.

옛날 이야기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쉽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많지 않더라도 겨울, 병사들을 환대해주었고 충성맹세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혹한 학살을 행한 것이 가슴 아픈 것이다. 2월 중순, 눈이 오고 추운 그 겨울에 갑작스럽게 죽임을 당하고, 도망친 후에 눈과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죽어간 맥도널드 가문 사람들을 생각하면,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음산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