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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진보의 도시면서 전통의 흔적을 간직한 니카라과의 도시, 레온

c.unsplash.com/hermes rivera

19세기 초반 니카라구과가 독립하던 시기에 레온(Leon)은 자유주의자들이 선호하던 도시였고 보수주의자들은 그라나다를 선호했다. 결국 타협에 의해 1858년 수도는 마나과가 되었다. 레온에는 자유, 혁명의 흔적들이 건물, 거리 예술, 그래피티, 기념물들에 남아 있다. 레온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구시가지 ‘레온 비에호(León Viejo)’는 1524년 프란시스코 에르단데스 데 코르도바가 건설했지만 모모톰보 화산 분화에 뒤따른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새로운 레온이 1610년 현재의 위치에 건설되었다. 구시가지는 1960년에 발굴되었고 202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레온은 자유, 진보주의자들이 선호하던 도시”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가 1956년 9월 21일 이곳에서 시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 의해 암살된다. 이곳은 자유, 진보주의자들의 아성으로 정부군과 격전도 벌이는데 특히 구시가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었다. 니카라과가 낳은 자랑스러운 문인 ’루벤 다리오‘가 1916년 49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후, 레온 대성당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 식민주의자에 맞서 싸운 민족 영웅 ’미겔 라레이나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 중 하나이다.
이처럼 레온은 강렬하고 정치적인 에너지가 맴돌았던 곳으로 근대의 정신들이 거리의 기념물, 미술관, 그래피티 등에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혁명, 내전이 근현대사에서 큰 사건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국제적인 식당, 학생들의 열정적인 지식에 대한 탐구, 활기찬 밤 문화, 생태 관광 비즈니스, 부티크 호텔 및 서핑 리조트 등이 발전하고 있고 진보적인 모더니즘과 창의성을 수용하고 있다.

“레온의 볼거리

레온에는 니카라과의 기념비적 유산들이 풍부하다.

세계문화 유산인 레온 대성당은 . 1747년과 1814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식민지 시대 바로크 건축 양식이다. 튼튼하게 지어져서 화산 폭발, 지진, 전쟁을 견뎌냈다. 1824년 보수 세력에 의한 도시 포위 공격과 1979년 6월과 7월 봉기 중에 정부군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사이의 전투에서도 버텨냈다. 이 안에는 시인 루벤 다리오의 무덤도 있다.
세례 요한 수티아바 교회는 대성당 다음으로 가장 큰 교회다. 건설은 1698년에 시작되어 1710년 8월 24일에 완공되었다. 이 교회는 교회 옆에 정착한 원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것이다. 세인트 프랜시스 교회는 1639년 프레이 페드로 데 수니가(Fray Pedro de Zúñiga)가 설립한 니카라과에서 가장 오래된 수녀원 중 하나이며 라 메르세드 교회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사원이다. 이곳은 레온시의 다른 건물과 함께 국립 예술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 2월 9일 국가 역사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샌재신토(San Jacinto) 온천은 León 시에서 30km 떨어져 있는데 땅속의 마그마에 의해 발생하는 가스 상태의 물로 주변의 진흙이 끓어오른다. 이곳에 오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화산 진흙을 이용하여 작은 진흙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니카라과의 역사”
니카라과의 역사를 알면 그 사회를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고, 유적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모든 나라의 정치를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니카라과는 매우 격렬한 혁명을 겪었고 지금도 그 와중에 있는 나라이기에 니카라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스페인의 식민지화 이전 지금의 니카라과 지역에는 니카라오족, 초로테가족, 미스키토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 유럽에 알려지고 이후 1524년 스페인의 정복으로 식민지가 될 때 격렬하게 저항한 니카라오(Nicarao)라는 원주민 종족의 이름을 따서 '니카라과'라는 이름이 생겼다. 식민지 니카라과에서 원주민들은 대농장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유럽인들이 옮겨 갖고 온 천연두, 황열병 같은 젼염병에 의해 목숨을 많이 잃었다. 노동력이 필요한 백인 농장주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게 된다. 대농장이 성장하게 되자 스페인 본국은 중남미의 식민지 지역의 통제를 강화하고 제3국과의 무역을 금지하자 백인 농장주들은 본국의 억압, 규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에 앞장선다.
이것은 우리처럼 원래 있었던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던 것이 아니라, 백인 농장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결국 1821년 니카라과 지역은 독립하지만 멕시코 제국의 한 부분으로서였다. 그때까지는 니카라과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러다 1823년 멕시코에서 떨어져 나온 지역이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었는데 1838년에 해체되면서 각각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나키라과로 독립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니카라과에는 북부 레온 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 중심의 보수주의자의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백인 농장주들은 종교적, 경제적, 사상적으로 더 보수적인 사람들과 좀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이며,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인 용병을 고용해서 한때 힘을 발휘했으나 물러가고 보수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저항했다. 1893년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성향의 장군 호세 산토스 셀라야(José Santos Zelaya)는 현대화 계획을 추진한다.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와 달리 개혁을 원했다. 그는 교회의 땅을 뺏어서 커피 농장으로 만들었으나 1909년 12월 실각한다. 하지만 정권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은 1912년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니카라과 자유, 진보주의자들에게 그 시절의 미국은 의지하고 싶은 나라였다. 미국은 과거 자신들의 종주국이었던 보수적인 스페인과 달리 자유, 진보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반미적인 성향의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장군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는 미 해병대를 공격했다. 1933년 미 해병대는 철수했다.
영향력 있는 반미적인 성향의 산디노는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 의해 암살당한다. 1936년 ‘소모사 가르시아’는 정부를 무너트린 후 193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친미적인 그는 독재자 소리를 들었고 1956년에 암살당했지만 그의 장남을 거쳐 차남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아 데바일레’가 권력을 잡는다. 그후 미국이 그들을 지원하고 투자하면서 경제는 발전한다. 하지만 소수 권력자들만 이득을 취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진다. 이들 ‘소모사 일가’의 독재는 40여년간 이어진다.
처음에는 자유주의,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던 세력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가운데 부패한 장기 집권, 독재 정권이 되자 이제 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연합전선이 생긴다. 1960년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결성되었다. 니카라과에서 일어났던 처음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과 갈등은 이제 친미적인 독재 집단과 반미적이면서 민족, 자유를 내세우는 세력 간의 대립으로 변하다가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가세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를 했지만 그 연합 세력 안에는 이제 독재를 반대하는 자유주의 성향, 반미 성향의 지식인들도 함께 가세한다. 니카라과 혁명의 시작이었다. 소모사가 1978년 자신들에게 반대하던 언론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를 살해하자 약 1년 동안 혁명전쟁이 반발했고 1979년 7월 마침내 소모사 일당이 해외로 망명함으로써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니카라과는 5만 명이 죽고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산디니스타 혁명정권은 정권을 잡자, 독재자 소모사의 추종 세력을 제거하고, 국가 재건위원회를 구성해 토지 개혁과 국유화 등을 시도하였다. GDP의 41%에 달했던 소모사 일가의 소유 재산을 빼앗고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문맹퇴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문맹률을 50%에서 13%로 떨어트렸다. 또한 전국적인 의료 보건 제도를 도입하여 영유아 사망률을 크게 떨어트리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 재건 위원회내에서도 좌우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전선’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지만 거기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자유, 진보적인 성향의 지식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정권은 경제 재건을 위해 쿠바와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나 이것은 오히려 미국이 개입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1982년 경제 제재 조치를 취했고 1983년에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서 북동부 지역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의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내전 속에서 또 3만 명이 죽게 된다. 산디니스타 정권은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쿠바, 불가리아에 의존했지만 그 시절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르던 소련은 니카라과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했고 쿠바, 불가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니카라과의 경제는 엉망이 되어갔다.
그후 1988년 3월 산디니스타 정권과 콘트라 반군은 협상을 했고 1990년 2월 치뤄진 총선과 대선에서 산디니스타의 좌파는 정권을 잃었다. 우파인 ‘비올레타 차모로’가 당선된 것이다. 비올레타 차모로는 1978년 소모사 독재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언론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친미적인 장기 독재 정권 ‘소모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인 산디니스타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했지만 그들의 성향은 자유, 진보였다. 이들이 공산주의자인 ‘오르테가’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1990년 4월부터 1997년 1월까지 그녀의 집권 기간 동안 언론자유는 향상되었고 경제난 완화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일단 물가를 잡았지만 산디니스타 정권 시절에 도입된 사회보장 정책이 축소되고 빈부 격차는 악화되었다. 정권 지지율이 낮아진 우파는 좌파의 산디니스타와 협정을 맺으려 하자 미국 정부는 원조를 축소시키며 압력을 행사했고, 친미 세력인 콘트라 계열 세력이 반발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렇듯이 ‘소모사 독재 정권’을 물리친 후, 우파와 좌파는 현실 정치 속에서 싸웠는데 좌파의 중심에는 ‘다니엘 오르테가’가 있었다. 그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에서 활동하며 지도자 역할을 했고, 46년간 독재를 해온 ‘소모사 집안’의 독재 정권을 무너트린 후, 실질적으로 1979년부터 국가재건회의를 이끌다가 1984년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0년까지 니카라과 대통령이었다. 1990년 선거에서 ‘비올레타 차모로’에게 패한 후 제1야당의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후 권력을 쉽게 잡지 못했다.
비올레타 차모로 후에 1996년 대선에서는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 출신인 우파 ‘알레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후 외국인 투자가 늘어났고 공공투자가 진행되면서 경제는 좋아졌지만 그 과실이 전체 국민에게 돌아가지 못했으며 실업률은 여전히 13%에 달했다. 그러나 2001년 대선에서도 좌파 오르테가는 집권하지 못했다. 좌파인 그가 집권하면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니카라과 국민들은 다시 우파인 ‘엔리케 볼라뇨스’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는 집권 초반 개혁 드라이브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목하에 ‘알레만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즉 우파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엔리케 볼라뇨스’ 대통령도 재임 후반기는 공공요금 인상을 하고 내우외환의 연속인 가운데 퇴임 후에 구속된다. 한편 그는 임기 말년에 ‘낙태 금지법’을 통과시키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우파의 분열 속에서 좌파 오르테가가 재기한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르테가가 당선된 것이다. 그는 과거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에 맞추어서 우파적인 친 기업 정책을 피면서도 쿠바와 베네수엘라 등으로부터 의료와 석유지원을 받는 투 트랙 전략으로 서민들의 빈곤을 줄여 나갔다. 그는 점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도 그의 달라진 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서민들도 그를 지지했다. 그는 이런 지지도에 힘입어 2011년 대선, 2016년 대선, 2021년 대선에서 연거푸 당선되었다. 그는 1984년에서 1990년까지 약 6년간의 대통령에 있었고 2006년부터 2023년 9월 현재 17년째 계속 대통령에 있다. (앞으로 별 일이 없는 한 2026년까지 대통령이기에 최소한 26년간 대통령에 있게 되고 1979년부터 약 6년간 국가재건회의를 이끌던 기간까지 합하면 그는 32년간 권좌에 있게 된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권력을 잡겠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그의 2021년 대선에서 지지도는 75%였다. 이런 지지도라면 2026년 대선에서도 당선될 확률이 많다. 또한 2017년부터 그의 부인이 부통령이 되면서 집안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전통을 계속 잇고 있다.

이런 통계와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보면 안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장기 독재에 대해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2018년 반정부 시위 탄압을 하는 가운데 4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 그 이유는 2018년 4월에 연금개혁안을 시행하겠다는 발표 때문이었다. 반발이 거세지고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 간의 충돌이 이어졌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 또한 친 정부 민병대원들에 의한 학살자도 595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니카라과 정부는 강력하게 시위대, 반대파들을 탄압하고 있다.
한편 2021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정부는 유력한 야권 인사들을 무더기로 잡아 들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크리스티아나 차모로’(69)로 그녀는 오르테가와 대선에서 맞서 싸울 유력한 인사였는데 돈세탁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녀의 오빠도 9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들은 1990년 대선에서 ‘오르테가’를 꺾고 대통령이 되었던 비올레타 차모로의 자식들이다. ‘크리스티아나 차모로’는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 현 대통령 ‘오르테가’를 앞질렀다고 한다. 그녀말고도 약 46명의 야권 인사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대선이 치러졌었다. 오르테가는 야당 대선 주자가 없는 가운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대통령이 되었었다.
결국 오르테가는 1980년대의 젊은 시절 좌파, 민족, 사회주의 신념으로 싸웠다면 2000년 대에 들어와서는 우파, 대기업의 눈치도 보면서 노회하게 현실과 타협하고 동시에 서민들을 위한 포퓰리즘적인 정책도 함께 취하면서 지지의 폭을 넓혔지만 요즘 와서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정치적 언동은 조심하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살펴보아야지 토론을 하는 것은 자칫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니카라과 사회”
니카라과는 코스타리카, 파나마와 함께 치안이 양호한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밤에 돌아다닌다고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덜 벌어지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과에서는 강도, 절도, 소매치기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야간 외출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근처의 온두라스나 엘살바도르와는 다르다.
2018년 4월부터 대도시 지역에서 오르테가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지면서 군경의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했고 있고 약탈 사건도 간간히 벌어지는 등 치안 상황이 상당히 나빠졌다. 니카라과의 정치권, 상층부는 우파, 좌파 할 것 없이 대체적으로 부패했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 사회 격변기에 있고 경제적 사정이 어려우면 사람들이 성정이 거칠어지니 늘 조심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