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코쿠 88 순례길을 걷는 다양한 방법
우리에게 제주 올레길이 있고, 스페인에 산티아고 길이 있는 것처럼 일본에도 시코쿠 88 순례길이 있다. 한국의 길은 대개 자연 풍광을 즐기는 것이 많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도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다지 종교가 깅조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코쿠 순례길에서 순례자들은 하얀 순례복과 삿갓을 쓰고, 절에 들어갈 때 예를 지키는 등 종교적인 법도를 권유하고 있다. 이 순례길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구카이(空海, 774-835) 대사와 관련된 절 88군데를 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코쿠 88순례길을 걷는, 오헨로(お遍路)”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쿠카이(空海, 774-835) 대사와 관련된 절 88군데를 순례하는 행위를 오헨로(お遍路)라 부른다. 오헨로 길은 매우 길다. 1200-1400km 정도의 코스인데 오헨로는 꼭 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걷는 것 그 자체보다도 쿠카이 대사의 흔적이 있는 88개의 절에 들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200-1400km 정도를 도보나 자전거, 버스, 택시 등을 이용해 한 바퀴 돌게 된다. 즉 시코쿠 88 순례를 하는 ‘오헨로’는 트레커로서의 극기 체험, 자기 도전 같은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쿠카이 대사에 대해서 알고 불교 친화적이어야 더 의미 있는 길이다. 그러나 요즘 트레커들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풍광 좋은 해안길을 걷는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쿠카이 대사는 어떤 인물인가?”
쿠카이 대사는 시코쿠에서 태어나 불교에 입문하여 수행하다가 804년에 당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805년에 당나라의 장안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밀교의 고승 혜과(惠果)를 만나 반년 정도 밀교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그해 말에 혜과 대사가 열반에 들자 이듬해(806) 쿠카이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진언종을 창시하고 835년에 입적했다. 쿠카이는 승려가 된 뒤 사용한 법명이고 921년에 일본 조정은 쿠카이에게 코보(弘法, 홍법) 대사란 시호를 내려 지금도 일본인들은 쿠카이를 '코보다이시(홍법대사)'라고 부른다. 그의 흔적을 찾아 시코쿠 88곳의 절을 도는 순례 행위 ‘오헨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헤이안 시대 (194-1185) 후기에 원형이 완성되어 무로마치 시대(1336-1573)에 정착했고 에도시대 17세기 말부터 민중에게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오헨로에 나섰다고 한다.
“순례하기 전에 준비할 것”
순례 경로를 따라 많은 사찰과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들이 있는데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1. 삿갓(菅笠: 스게가사)
태양이나 비를 가리는 데 유용하다. 성지에서 기도를 올리거나 사찰의 승려와 대화할 때 삿갓을 벗을 필요는 없다.
2. 흰색 조끼(白衣: 하쿠이, 하쿠에)
순례자가 착용한 흰색 조끼는 순수함과 순결함을 상징한다. 과거에는 순례자가 항상 죽음을 대비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수의의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3. 염주(数珠: 주주)
염주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염주를 들면, 마음의 상념이 사라지고 좋은 기운이 온다.
4. 종(持鈴: 지레이)
불경을 암송한 후에는 항상 종을 울려야 한다.
5. 가방(頭陀袋: 즈다바쿠로)
초, 향, 이름표, 순례 책자 등을 여기에 넣는다.
6. 가사(輪袈裟: 와게사)
완전한 법의의 상징으로 그 사람의 헌신을 나타낸다. 마음에 드는 색상을 선택하면 된다
7. 지팡이(金剛杖: 곤고즈에)
지팡이는 순례자에게 순례길을 안내해 주는 고보 다이시의 현신이다. 과거에 지팡이는 순례 여정에서 죽음을 맞이한 순례자의 무덤을 표시하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
8. 명함(納札: 오사메후다)
이름, 주소, 날짜, 소원을 적고 본당과 대사당에 있는 명함 상자에 넣는다.
9. 순례 책자(納経帳: 노쿄초)
이 책자는 순례자가 각 사찰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각 성지에서 참배 후에 서명과 도장을 받는다.
물론 여행자들은 이것을 다 지키지 않으나 대개 삿갓, 하얀 조끼, 지팡이는 착용을 하고 떠난다.
“순례 방법”
순례 행위에도 민족성이 스며든다. 한국은 자연스럽게 자연을 각자 즐기며 걷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역시 개인이 자유롭게 하는 편이다. 그런데 시코쿠 오헨로는 방법과 복장과 지켜야 할 예절이 분명하면서도 실용적이다. 즉 걷지 않아도 되고 자전거나 차를 이용해도 된다.
우선 시계 방향으로 도는 준우치(順打ち)와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갸쿠우치/사카우치(逆打ち)가 있다. 갸쿠우치가 준우치보다 3배 정도가 힘들어서 대개 준우치, 즉 시계 방향으로 돈다. 끊어서 도는 것을 쿠기리우치(区切り打ち)라 부르는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계획할 수 있기에 이렇게 해도 된다. 절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꼭 1번 절부터 돌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편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절에 들를 때마다 ‘납경(納経)’이란 절차가 있다. 신사나 사찰에 참배하면 해당 시설에서 '이 사람은 언제 우리 사찰/신사에 참배했습니다.' 하는 의미로 써 주는 일종의 확인서인데, 이 또한 부처나 신령의 영험이 있다 하여 일본인들은 소중하게 간직한다. 따로 소정의 이용료를 내면서 신청해야만 한다. 납경을 신청하면 모년 모월 모일 모 시설을 참배했다고 붓글씨로 직접 쓰고 도장을 찍어주는데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특정한 신사나 사찰에 다녀왔다는 기념품 역할도 하는데 시코쿠 88개소 사찰들도 납경을 해주고, 순례용품 판매점에서도 88개 영장 순례 전용 납경장(納経帳)도 판다. 납경을 순례용으로 입는 하얀 옷에 받기도 하며 죽을 때 이 옷을 수의로 입으면 저승길을 쿠카이 대사가 인도해준다고 한다.
“참배 방법”
각 사찰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이런 예를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다.
1. 산문(山門)
산문의 왼쪽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한 번 절 한다.
2. 수옥(水屋)
이곳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 뒤 와게사와 염주를 착용한다..
3. 종루(鐘楼)
종을 한 번 울린다. 떠날 때 종을 울리면 불행이 찾아온다. 일부 사찰에서는 종을 울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4. 본당
명함과 불경의 사본을 적절한 상자에 담고 세 개의 향과 하나의 초를 켜고, 헌금함에 기부금을 넣은 후 왼쪽을 향해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불경을 외운다. 본당에서는 반야심경을 차례로 외운 후 계속해서 본존진언과 보호(寶號) 불경을 외운다. 조용히 배례를 올리는 것도 괜찮다.
5. 대사당(大師堂)
본당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를 올린다.
6. 관리사무소(納経所)
순례 책자에 도장을 찍고 서명한다.(요금: 300엔)
7. 산문
산문의 왼편으로 나가 몸을 돌린 후에 한 번 절한다.
관리사무소(납경소) 운영시간은 7시에서 17시까지이므로 시간 배정을 잘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의 불교 시도와 달리, 외국의 여행자들은 참배를 간략하게 하고 납경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도보 순례길”
가장 전통적인 순례 방법인 도보 순례를 하면 하루에 20~30km를 걷는다는 가정하에 40~50일 정도 걸린다. 매우 힘든 길이다. 거기다 여관에서 자는 숙박비, 식비만 해도 부담이 된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 숙소가 없는 구간에 있게 된다면 노숙을 할 수도 있다. 결코 방심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코쿠 순례 혼자 걷는 동행이인>(四国遍路ひとり歩き同行二人)이란 책을 구입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꼼꼼하게 숙소 정보, 편의점 위치, 코인 세탁소, 쉴 만한 곳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가기 전에 점검해 봐야 할 것”
걷는 길이 힘들면 중간중간 전철, 버스, 트램 등을 이용하면서 갈 수도 있다.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노인 단체순례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시코쿠 88 순례길에서는 치유나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상을 떠난 이를 기리기 위해,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순례의 길에 오른다. ’오헨로‘ 길에는 종교적 믿음, 신심이 중심이 되고 그것을 방문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복이 중요하다. 일본 불교도들은 그곳을 방문해서 기도하고, 납경하는데에 큰 의미를 둔다.
그러나 외국의 여행자들 대부분은 순례길을 종교적으로 접하지 않는다. 극기 체험, 문화 체험을 위해서 걷는 이들이 많다. 또한 중간중간 시코쿠의 풍요로운 자연도 경험하고 현지 주민들과 어울리는 경험이 그들에게는 중요하다. 그런데 전철, 버스 등을 이용하면 좀 맥이 빠지게 된다. 중간에 흐트러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오랜 길이다 보니 ‘이걸 왜 하나’ 하는 회의가 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기 전에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쿠카이 대사와 그가 창시한 ’진언종‘에 대해 공부하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이다.
“5일간의 셀프 가이드 순례길”
종교적 의미가 중요하지 않은 외국인 여행자들은 가장 풍경이 좋은 코스를 뽑아내서 5일 동안 걷기도 한다. 시코쿠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고 미개발된 풍경이 있는 곳이기에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 오헨로 길과 겹치면서도 아름다운 길은 아래와 같다. 수도원 숙소가 있는 산 정상 사원 마을 고야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미야지마 섬, 세토우치 내해의 도모노우라 만까지의 걷는다. 토쿠시마(Tokushima)와 카가와(Kagawa)에서 걷는 길로 산악길과 도시를 함께 걷고 하루 최대 8시간 정도 걷는다. 중간에 사찰에서도 묵고 주변의 코토히라 온천(Kotohira Spa)도 들를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