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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왕국의 영광이 그대로 남아 있는 페르세폴리스

c.pixabay.com/Peggychoucair

페르세 폴리스 (Persepolis)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그 시절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페르세 폴리스에 가려면 일단 꽃과 정원과 시의 도시인 시라즈(Shiraz)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약 60km 떨어져 있으므로 택시나 미니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하메니드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도시로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였었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시절의 웅장한 유적지에는 익숙하지만 페르시아 왕국의 영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곳에 가면 그 웅장한 규모앞에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페르세폴리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라는 뜻의 ‘파르사’로 불렸는데 이를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로 옮기면서 ‘페르세(페르시아인들)’와 ‘폴리스(도시)’라는 단어를 합해서 페르세폴리스란 이름으로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 뜻은 역시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다.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비록 폐허지만 페르시아 왕국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부터 건설되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최초로 이곳에 도시를 정한 것은 키루스 2세지만 다리우스 1세 때부터 궁전, 테라스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해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0년 그리스의 아테네와의 전쟁, 즉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왕이다. 그 전쟁으로 인해 다리우스 1세가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성기를 지나서 차차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그리고 그의 아들 다리우스 2세를 거쳐 다리우스 3세까지 오는 동안에도 페르세폴리스에서 계속 궁전들이 들어서고 온갖 보물들이 쌓여 부귀영화를 자랑했다. 다른 민족이 세웠다가 점령된 후 페르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나머지 수도들과 달리 처음부터 페르시아인들이 세운 도시로,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상징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 때인 기원전 333년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입하자 페르세폴리스는 최후를 맞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곳을 점령한 뒤 방화로 파괴했고 그 후 페르시아의 중심지는 다른 곳이 되면서 페르세폴리스는 지금처럼 폐허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197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c.unsplash.com/ali-mousavi

“페르시아의 역사”
페르시아의 역사를 말할 때는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페르시아인, 이란 영토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수많은 왕조들을 통합해서 말한다. 인도·유럽 계통의 이란인들이 이란 고원에서 지배 세력이 된 시기는 철기 시대, 즉 기원전 9세기 중엽이었고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 초에 메디아 왕조를 탄생시켰다. 메디아 인이 북서 이란을 통치했을 때인 기원전 8세기 초의 수도 엑바타나(현 하마단)에서 건축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기원전 550년에는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었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고 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워 인근의 도시 국가들마저 무릎을 꿇리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후 키루스는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리디아, 바빌론, 이집트를 정복하고 발칸과 동유럽으로, 서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나가면서 거대한 대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최대 판도는 현대의 이란 전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 해안가 대부분, 그리스 북동부, 불가리아 남부, 북마케도니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이며 고대 이집트를 장악하고 그 손길을 리비아와 쿠웨이트,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까지 뻗쳤으니 당대의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국이였다. 기원전 480년 경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구는 약 5,00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 인구의 44%를 자신의 신민으로 거느렸다. 이 기록은 그 이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바빌론에 갇혀있던 유대인들을 풀어주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왕의 길'과 같은 거대 도로나 선진적인 우편제도를 운용하였고 공식 언어를 제정하여 전국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었다.
이런 페르시아 제국을 조상으로 둔 이란인들은 역사적인 자부심이 강하다. 로마 못지 않은 영토를 다스렸던 페르시아 제국 즉, 아케메네스 제국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00년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 즉,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그때부터 아케네메네스 제국은 발칸 지역과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서쪽으로 후퇴했고,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메케네스 제국이 망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란 지방은 기원전 200년경에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이란 계열의 파르티아 제국이 등장한다. 파르티아 제국은 국력을 신장하면서 서방의 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싸우면서도 약 500여 년 동안 존속한다. 그리고 224년경에는 사산 제국이 파르티아 제국을 승계하여 새롭게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사산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토를 대부분 수복할 정도로 그 힘이 강성하였는데 크테시폰을 수도로 하였으며 인근의 로마 제국과 서유럽, 아프리카와 저 멀리 있는 중국과 인도까지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이 시기가 이란 문화와 국력의 최절정기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사산 제국은 로마와 약 700년 동안 계속 전쟁을 하는 바람에 국력이 저하되었으며, 후대에 아랍의 무슬림들에 의해서 정복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란인들은 지금 이슬람을 믿고 있어서 문화적, 종교적으로 고대의 페르시아 왕국, 즉 아케네메네스 제국이나 사산 제국과 연결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조상이 이룩한 자랑스러운 고대사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서방 세계와 싸우고 있다.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사건은 7세기 무렵에 이란 영토로 들어온 이슬람에 의해서 종교가 변했다는 것이다. 야즈드에 지금도 있는 극소수의 조로아스터교 신자 외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슬람화 되었다. 바그다드에 중심을 둔 아바스 칼리파조가 약 200년 동안 이란 지방을 지배하였지만 느슨한 틈을 타서 거의 독립국 같은 자치권을 누리면서 이 시기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찬란한 문화와 힉문들이 꽃피었다. 물론 과거의 조로아스터교가 아니라 이슬람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의 ‘이슬람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다. 이 시기는 10세기와 11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아랍 정복자들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이들을 몰아내고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적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페르시아 민족주의 계열 시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후 이 지역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이 이주해오면서 투르크-페르시아 문화가 꽃피었는데 1219년부터 1221년까지 몽골 제국의 침입을 받은 후,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이 시기에 대략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달하는, 전 국민의 4분의 3이 사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란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인구를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 후, 1370년에, 또 다른 정복자였던 티무르가 페르시아를 150여 년간 지배하면서 에스파한에서 약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학살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티무르 제국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거의 페르시아인처럼 동화되었다.

1500년 초에는 이란 땅에 이슬람의 시아파가 들어온다. 수도를 타브리즈에 두고, 사파비 왕조를 세운 이스마일 1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란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당시 페르시아 사회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는 이를 뒤집고 시아파를 내세우며 강제적으로 교파를 바꾸었다. 결국 이란에서 시아파가 많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란은 현대까지도 주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시아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가다. 사파비 왕조는 서쪽에 접경하고 있는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의 재위기인 1500년대 후반부터 16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때 국력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후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기울기 시작하다가 사파비 왕조는 1722년에 파슈툰 반란군들이 수도 에스파한을 점령하면서 멸망하고야 만다.
그후 혼란기에 접어들고 여러 왕조가 등장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서 위축되는데 1870년대 초에는 이란 전역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인구의 20%에서 25%가량에 이르는 1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외세에 시달리다가 1905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났고 1906년에는 첫 이란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으로 국회가 열리면서 근대화의 길에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근대화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의 갈등이 고조되는데 이 와중에 외세의 간섭, 전쟁 등으로 혼란에 빠진다. 특히 러시아는 1911년에 이란 북부를 점거하였다. 그후 이란은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과 계속 전쟁을 치룬다, 1921년이 되어서 전쟁이 끝났는데 이 시기에 최소 2백만 명에 달하는 이란인들이 전투에 휘말려 사망했고 공장들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 그들을 보호하려 한 무슬림들마저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시기의 이란은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극도로 약했고 이 상태가 거의 몇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절의 카자르 왕조는 세계대전 동안 주권조차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1921년에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레자 샤가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결국 카자르 왕조도 멸망하고야 만다. 레자 샤는 이란의 총리에 직위한 이후, 1925년에 국왕직에 올랐다. 그후 근대화와 이슬람화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현재는 이슬람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니 이란 사람들도 역사 속에서 어마어마 하게 죽고, 시달림을 당한 민족이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333년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점령당하고 파괴당한 후, 지금까지 약 1700년의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그 장엄한 스케일에 감탄한다. 폐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의 유적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서 얼마나 페르시아 문명에 거창했는가를 알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에 들어가는 입구에 라마수(Lamassu) 두 마리가 있다. 라마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동물로 아시리아의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는데 인간의 머리에 황소나 사자의 몸, 새읠 날개를 갖고 있는 성스러운 동물이며 신이다.
좀 더 들어가면 아파다나가 나온다. 크레스크세스 1세 때 지어진 것으로 사신들을 접견하던 알현실로 쓰였는데 아파다나를 오르는 계단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비단, 향료, 염소 등을 바치는 행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거대한 건물 뒤로 다리우스 궁전, 그 뒤로 크세르크세스 궁전으로 이어진다. 보물창고도 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곳에서 보물을 옮기느라 2만 마리의 노새와 5천 마리의 낙타를 동원할 정도로 엄청난 보물이 있었다고 한다.
타차라 궁전은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궁전으로 다리우스 1세 때 완성되었다. 동서 30m 남북 40m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궁전의 한 가운데, 가로 세로 각각 4개씩 1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메인 홀이 있고 메인 홀 북쪽으로는 대기실 또는 접견실로 사용된 두 개의 작은 홀이 있다. 이런 곳에는 수많은 부조가 있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의 부조, 태양의 신 미트라의 부조,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 등도 보이는데 여행자들이 구분이 잘 안되므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다. 페르세폴리스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건축을 잘 알려주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