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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중세 도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c.unsplash.com/Jaanus Jagomägi

발트 3국,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중에서 에스토니아는 ‘발트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수도 탈린(Tallin)을 갖고 있다. 특히 탈린의 구시가지는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건물들이 보존된 도시 중의 하나라 구시가지 전체가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탈린의 구시가지”
탈린의 구시가지 전체는 유네스코에 의해 인정된 세계 문화유산인만큼 13세기, 14세기의 중세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고풍스런 도시다.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처럼 탈린의 구시가지도 걷는 그 자체가 행복한 곳이다. 탈린의 구시가지 지역은 중세시대의 독일 귀족들이 살던 톰페아(Toompea) 언덕과 상인들과 평민들이 살던 언덕 아래 자치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구시가지 지역은 규모가 작은 편이라 도보 여행을 하며 돌아보기에 좋다.
구시가지의 동남쪽에 신시가지가 있고 동북쪽에 항구가 있으며 외곽지대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들은 1960-80년대 소련에 의해 개발된 것들로 그 시절에 에스토니아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렇게 인구가 이주한 탓에 1980년대만 해도 러시아인이 에스토니아인보다 많았었다. 지금도 탈린에는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인구의 40%가 러시아인이다. 탈린 시내에서는 에스토니아어 못지않게 러시아어도 많이 쓰이고 있다. 2011년 탈린은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이 무렵에 도시가 정비되면서 구소련 시절의 흔적들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탈린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쾌속선을 타면 2시간 만에 발트해를 건너올 수 있어서 헬싱키 사람들이 주말에 탈린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물가가 싸서 그런 점도 있었는데 지금은 에스토니아가 유로화를 쓰면서 물가 차이는 많이 좁혀졌다. 기후는 꽤 추운 편이다.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5도인데 가끔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고 눈도 많이 온다. 예전에는 북유럽을 여행하다가 핀란드에서 잠시 들르는 도시였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고 들르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의 발트 3국을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탈린과 에스토니아 역사”
탈린의 옛 이름은 레발(Reval)이다. 에스토니아 북부의 레발라 지방에서 따온 이름인데 탈린이란 이름은 에스토니아어로 ‘덴마크(Taani)의 도시(Linn)’라는 뜻이라고 한다. 1918년 에스토니아가 1차 독립을 하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에스토니아의 출발점이 덴마크에서 왔기 때문이다.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들이 세운 성채에 성을 세우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226년~1227년, 탈린은 교황의 직접 지배하로 들어가면서 카를 형제의 십자군 기사단 소속이 되었고, 이 지역은 요새(castrum)와 도시의 저지대(suburbum)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1230년 기사단은 고틀란트(Gotland) 출신의 독일 상인 200명을 탈린으로 불러들였다. 상인들은 성 니콜라스(St Nicholas)에게 봉헌된 새 교회 주위에 정착했다. 이곳에 기존에 살던 에스토니아인과 스칸디나비아인,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수도회를 따랐고 각 수도회는 성 카트린 수도원과 천사장 미카엘의 시토 수녀원을 건설하였다.
그후 탈린은 1248년에 뤼베크 법령(Lübeck statute)을 채택하고, 1285년 한자(Hansa) 동맹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한자(Hansa)는 13세기 초에서 17세기까지 독일 북부 도시들과 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이 뤼베크를 중심으로 모인 무역 공동체다. 이것은 상인 조합이 발전한 형태로 이들 간에는 국경도, 관세도, 경제에 대한 정치의 부당한 개입도 없었다. 그러니까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와 비슷한 형성과정을 거쳤다. 처음부터 민족의식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도시로서 출발한 것이다. 탈린은 발트 지역과 러시아 내륙 사이의 교역로에서 주요 거점 도시가 되어 발전한다. 1310년 거대한 도시 성벽이 세워지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14세기에 급성장했다.
그런데 도시는 1346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가 재정난을 타파하고자 튜턴 기사단에게 이 도시를 판다. 그후 튜턴 기사단은 리보니안 기사단에 이 도시를 매각했다. 새로운 주인이 된 리보니안 기사단은 톰페아 성을 재건하여 강력한 성으로 만들었고 15세기에는 새로운 시청과 공공건물들을 여러 채 건설했다.15세기부터 탈린은 쇠락하기 시작했지만 멋진 건물들은 계속 건설되었다. 그런데 1561년에는 스웨덴이 탈린을 정복하였고, 1684년의 대화재가 발생했고 1710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침체기에 접어들고 탈린은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발트 함대의 기지가 되었다. 그 후 계속 러시아 지배에 있다가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내전이 발생하자 에스토니아는 1918년 독립을 하고 탈린이 수도가 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에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의해 다시 점령당한다. 1944년에 도시는 독일군으로부터 심한 폭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지만 훗날 재건된다. 전쟁 중에서도 탈린의 구시가지는 보존이 잘 되었다.
소련이 멸망하던 무렵인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구시가지에서 시작한 ‘발트의 길’(Baltic Way)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이곳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까지 왔었다. 발틱 3국 시민 200만 명이 참가해서 675km에 이르는 ‘발틱의 길’이란 인간 띠를 만들어 소련에게 독립을 요구한 이벤트였다. 이 시위는 발트3국 국민들의 연대 의식과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고 결국 독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에 독립하고 이어서 1991년 8월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도 독립했다. 이 ‘발트의 길’(Baltic Way)은 2009년 유네스코의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민들의 중세 분위기가 감도는 구시가지의 저지대”
구시가지는 동쪽의 거대한 연필처럼 솟아오른 비루 문(Viru Gate)을 통과하면서부터 나타난다. 비루문은 원통형 건축물 위에 뾰족한 붉은 지붕으로 덮여 있는데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6개 문 중의 하나로 1355년에 세워졌다. 원래의 모습은 파괴되고 현재는 쌍둥이 탑만 남아 있다.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가면 카타리나(Katarinaa) 거리가 나온다. 골목길에는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고, 그 시절의 건물들, 가게들, 레스토랑, 카페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다. 모양이 같은 세 개의 건물은 ‘세 자매’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15세기에 생긴 건물로 중세 시대 때는 독일 상인들의 주거지였고 또 상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뾰족한 지붕을 가진 세 건물은 형태가 같지만 중앙의 건물은 노란색이고 그 옆의 건물은 상아색이라 조금 차이가 나는데 현재는 호텔로 쓰이고 있다.
근처에는 성 카테리나( St. Catherine) 교회도 있고 미술관도 있다. 조금 올라가면 14세기에 건설된 시청사가 나오고 그 앞에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이곳은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로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서 우뚝 솟은 첨탑이 눈에 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시민들의 중심지로 광장 주위에는 높은 박공 지붕을 갖고 있는 가옥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시청광장에서 기사들의 검투사 시합이나 정기적인 시장이 열렸고 크리스마스 때는 이 광장에서 파티도 했었다. 또한 사형집행 등이 이루어지는 중세시대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시청 앞 광장은 문화의 중심지로써 비정기적으로 다양한 공연을 하고 시장도 들어서는 곳이다.
시청광장 근처에는 관광안내소가 있고 광장 주변에는 다양한 나라의 식당들, 카페들이 모여 있는 골목길도 있다. 또한 건물들 사이에 들어선 하리우 거리 공원(Harju Street park)이 있고 근처에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 미술관과 루터 교회도 있어서 천천히 저지대를 거닐며 건물을 감상하고 에스토니아 역사 박물관, 에스토니아 건강 박물관, 에스토니아 자연사 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들과 기념품 숍들을 돌아보며 중세 서민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귀족들이 살던 톰페아(Toompea) 언덕”
고대를 향해 올라가면 톰페아(Toompea) 언덕이 나온다. 영주나 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언덕의 중앙 지역으로 오면 성 마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 있고 더 내려오면 알렉산더 네브스키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Aleksander Nevski katedraal)이 나온다. 19세기에 미하일 프레오브라첸스키가 설계한 이 건축물은 공공 기부금으로 건설되었다. 화려한 돔 위의 십자가들이 매우 인상적인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교회다. 들어가면 매혹적인 교회 내부를 볼 수 있다. 그후 서쪽으로 가면 톰페아 성이 나온다. 9세기 요새 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성으로 현재 그 자리에는 에스토니아 의회가 자리 잡고 있다. 연한 핑크색 빛의 건물이 웅장하다.
언덕의 북쪽 방면으로 가면 코투오차 전망대(Kohtuotsa vaateplats)를 지나 파트쿨리 전망대(Patkuli vaateplat)까지 갈 수 있다. 이곳은 구시가지에서 가장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주황색 지붕과 뾰족한 성문들이 어우러진 탈린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북쪽으로는 발트해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구소련의 공장 지대, 동쪽으로는 중세 독일 상인들의 흔적이 보인다.
탈린 항구 쪽, 즉 구시가지 북쪽으로 가면 성 올라프 교회(Oleviste kogudus)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회당 양식으로, 탈린 특유의 매우 높은 둥근 천장과 정교한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14세기에 지은 침례 교회로 번개를 여러 차례 견뎌낸 124m 높이의 탑을 갖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16세기 탈린을 방어하던 요새 중 하나인 ‘뚱뚱한 마가렛(paks margareeta)’ 성벽이 보인다. 1592년에 세워졌는데 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이 성 탑은 매우 튼튼하다. 성안에는 감옥이 있었고 그 감옥의 교도관이 뚱뚱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지만 실제로 성 탑이 매우 뚱뚱해 보인다. 현재는 에스토니아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밖으로 나와 도로를 건너면 탈린 항구로 이어진다.


“표트르 대제의 흔적 남은 카드리오르그 공원”
구시가지에서 동쪽으로 약 2,3km 떨어진 곳에 카드리오르그(Kadriorg) 공원이 있다. 숲이 울창하고 호수들이 있으며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18세기 제정 러시아 시절, 표트르 대제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조성한 것으로 공원에는 바로크 양식의 카드리오르그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현재 카드리오르그 미술관이 되었고 궁전 내부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러시아의 16~19세기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 공원의 바로 남쪽, 호수를 끼고 있는 패 공원(Pae park)에는 현대적인 쿠무 박물관(KUMU Kunsti muuseum)이 있다. 2006년에 문을 연 에스토니아 최대의 박물관으로 2008년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