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네팔로의 시간 여행, 카트만두 계곡(파탄, 박타푸르)

네팔 중부에 위치한 카트만두 계곡(Kathmandu Valley)은 네팔의 종교, 정치, 문화가 다 축적된 지역이다. 계곡은 우리가 생각하는 좁게 깊이 파인 계곡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토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진 네팔에서, 평평한 분지처럼 보이는 지형을 계곡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등 주요 도시들이 있다. 네팔에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치트완 국립공원 등의 자연도 있지만 활짝 꽃피었던 힌두교, 불교문화의 유산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카트만두 계곡과 더르바르(Dubar, 궁전)와 광장” 타원형 그릇 모양의 카트만두 계곡은 녹색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드넓은 계곡은 예전에 거대한 호수로 덮여 있었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Manjushri)이 지혜의 검을 들어 벽처럼 막고 있는 산을 갈라 길을 내고 물을 모두 빼내 최초의 정착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카트만두 계곡에는 네팔 내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 네와르(Newars)족은 이 계곡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토착 원주민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힌두교와 불교에 관련된 왕궁, 건축물들이라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만들어냈다. 각 도시에 있는 ‘더르바르(Durbar) 광장’은 네팔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더르바르(Durbar)’는 왕궁을 의미하고 그 왕궁 주변에는 힌두교, 불교 사원, 탑, 박물관 등이 모여 있다. 네팔의 역사와 문화, 건축, 예술품이 다 모인 곳으로 세 도시에 있는 더르바르(왕궁)과 그 앞의 광장 전체가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외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스와얌부(Swayambhu)의 불교 스투파(불탑), 보드나트(Bauddhanath)의 불교 스투파, 파슈파티(Pashupati)의 힌두 사원, 창구 나라얀(Changu Narayan)의 힌두 사원 등이다.안타깝게도 이곳의 건축물들은 2015년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볼거리들은 남아 있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왕궁, 포탈라 궁전” 포탈라 궁은 7세기 중반에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송첸캄포가 요새처럼 지은 것인데 세월 속에서 낡고 전쟁을 겪어가면서 파괴되었다. 그후 1645년에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폐허 위에 재의 포탈라 궁을 만들었다. 포탈라 궁전은 밖에서 보면 13층 구조이지만 실제는 9층이다.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은 10만㎡가 넘는 거대한 궁전이다. 천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이자 요새이며 궁전이고 이 궁전을 짓는 데에는 7천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약 1,500명의 장인들이 장식을 했다고 한다. 1만 개가 넘는 작은 사원들이 안에 존재하며, 20만 개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다. 달라이 라마들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대까지 이 궁전에서 살며 통치했었다.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가 초대 왕인 송첸 감포의 궁전에 이런 종교적 건물을 세운 것은, 불교가 정치 권력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포탈라 산은 불교 신화에 따르면 보리살타 아발로키테슈바라(관세음 보살)가 살았다는 장소이기도 해서 신성한 상징이었다. 현재 궁전은 관람객이 너무 많이 와서 하루에 1600명만 방문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하고 하루에 6시간만 관람할 수 있다. 포탈라 궁안에는 홍궁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티베트어로 포당 마르뽀(ཕོ་བྲང་དམར་པོ།, pho brang dmar po)라고 하며, 주로 종교 의식이 열리는 공간이다. 포탈라 궁의 상부에 있으며, 많은 복합 건물 구불구불한 통로 사이로 사원과 장서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사원과 기도실들과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이 있다. 홍궁이 부처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백궁은 인간들을 위한 세속적인 공간이다. 백궁은 티베트어로 포당 까르뽀(pho brang dkar po)라고 하며, 달라이 라마도 이곳에 거주했었다. 포탈라 궁의 하부 쪽에 있으며 최초의 백궁은 제5대 달라이라마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1649년 그의 왕조가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 제1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루어졌다 포탈라궁 내부는 백궁 일부의 방 이외는 원칙적으로 비공개고 홍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옥좌와 영탑 등이 공개되고 있다. 포탈라 궁전 앞에는 거대한 해자(호수)가 있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해자였다. 호수를 건너 도달하는 포탈라궁은 세속을 떠난 성지였고, 불교에 있어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강과 산과 궁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 해자를 모두 메우고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어버려서 옛날의 상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현생 인류 초기 때부터 인간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이르러, 티베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락연맹이 형성되다가 7세기에 최초로 티베트고원의 각 부족을 통일한 티베트 왕조(토번왕조, 吐蕃王朝)가 나타났ㄷ. 티베트 왕 송첸감포는 641년 당태종(太宗)의 조카이며 수양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을 하면서 당과 티베트(토번) 사이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손첸감포는 문성공주를 위해서 새로운 궁전을 지었지만 그 궁전은 거의 파괴되었다. 티베트는 869년부터 반란이 일어나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살해되고 877년 멸망한다. 그리고 1239년까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 시대가 계속된다. 그후 1253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몽케칸(헌종)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를 장악했다. 또 쿠빌라이칸(세조)는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고승 파스파를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쿠빌라이칸은 원(元)으로 국호를 정하고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티베트는 원의 지배하에서 정교가 일치하는 지배 체제가 확립된다. 청대 초기에는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포탈라궁은 1642년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통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합한, 상징적인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포탈라 궁전을 확장, 개축했다. 사원의 기본 골조와 건물을 짓는데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내부의 인테리어와 장식을 끝마치는 데는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1649년, 백궁이 완성되자 달라이 라마와 정부 기관들은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겨울 궁전으로 쓰였다. 그의 사후 12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어 1690~94년에는 홍궁이 마저 증축되었다. 그 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Panchen Lama)가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티베트 상류층의 일부와 결합하여,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려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 이듬해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연합군의 개입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끝에 1951년 5월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라싸에 중국의 민간 주재 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 후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제14대 달라이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국은 새 판첸 라마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전시효과를 노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그후,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때와 1961, 1962년의 기근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게릴라전이 계속됨으로써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 연금되었다가 사망했다. 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든 후 지배하고 있다. “겔룩파와 달라이 라마 14대” 험준한 산악과 거친 기후에서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은 토속종교인 ‘본교’를 믿고 있었다. 주술신앙인데 7세기 무렵 송첸캄포(569-650) 왕은 불교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도에 신하를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했 그후 티송 데첸왕(755-781)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많은 인도 승려들을 티베트로 초빙했다. 이들 중에 밀교에 능한 파드마 삼바바와 샨타락시타라는 인물이 있었다. 파드마 삼바바가 창시한 티베트 불교 종파를 ‘닝마파’라고 부르는데 ‘오래된 파’를 의미한다. 그후 티베트는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면서 세력간 다툼이 벌어졌었다. 샤카파는 계율을 강조하고, 각규파는 밀교의 비법을 은밀히 전수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14세기에 샤카파, 각규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개혁을 주도한 파가 겔룩파다. 겔룩파는 계율을 중시하며 학문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다. 겔룩파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황모파라고도 하며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라이라마 14대도 겔룩파다. 그런데 11세기 초 티베트 중부의 각규파 사원인 ‘랄룽사원’에서 창파 갸레이 예셰 도르지(1161~1211)에 의해 설립된 ‘드럭파-각규파(일명 뇌룡파)’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천둥 때 승천하는 용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뇌룡파라고 이름지었는데 이 종파는 겔룩파와 종파 투쟁에서 지자 부탄으로 갔고, 훗날 이 종파가 부탄의 국교가 된다. 그리고 17세기에 티베트의 겔룩파와 전쟁을 벌이며 티베트군을 물리치고 부탄은 독립하게 된다. 티베트는 종교사회다 보니 여러 파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다. 물론, 겔룩파가 가장 대중적이고 파워를 갖다 보니 겔룩파의 수장 달라이 라마 14대가 현재 티베트 정치, 종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파들도 자기들의 수장을 갖고 있다. 겔룩파는 노란 모자를 써서 황모파라고 하는데, 반면에 까만 모자를 써서 흑모파라고 부르는 ‘각규파’가 있다. 그 각규파의 수장을 ‘까르마빠(Karmapa) 라마’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청대 초기에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그 말은 그 당시 ‘쇠냠걈초’라는 종교 지도자를 말하는 의미를 몽고식으로 풀어서 불렀을 때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쇠냠감초는 최초의 달라이 라마였지만 달라이 라마 3대로 불려지고 이전의 달라이 라마는 소급하여 계보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육체만 달리할 뿐, 계속 환생하여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런 전생활불(轉生活佛) 제도, 즉 전생의 영혼이 계속 다음 생에도 이어지며, 고승, 부처가 환생하여 나타난다는 믿음과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카르마파에서 14세기 중반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다른 종파인 겔룩파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겔룩파가 17세기 중반 종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티베트를 통일하게 되자 이때부터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때부터 성과 속을 지배하는 법왕제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9년 중국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고 탄압하자 최대 종파인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대’는 24세의 나이에 포탈라 궁에서 탈출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로 간다. 또한 각규파의 지도자인 ‘까르마빠 라마 16대’도 1959년에 티베트의 추루푸 사원을 탈출해서 시킴 지방의 룸텍으로 온다. 시킴에는 이미 1700년대에 각규파의 사원이 건립되었었고 새로 지은 룸텍 사원에서 16대 까르마빠는 이곳이 룸텍의 본산임을 선포한다. 그후 이곳은 각규파 학문과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1981년에 어떤 유언이나 계시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자 각규파는 혼란에 빠진다. 그밑의 서로 뜻을 달리하는 승려들이 일단 집단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환생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갈라졌다. 결국 두 파는 환생을 통해 나타난 까르마빠 라마 17대를 정하는 가운데 서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티베트에 살고 있던 일곱 살 소년이 환생한 17대 까르마파 라마로 인정되었는데 그는 중국 정부에 의해 이용당하며 불안에 떨었다. 결국 ‘까르마빠 17대’는 14세의 나이인 1999년 12월 28일 밤에 사원을 나와 4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12월 30일 무스탕을 거쳐 네팔로 왔고, 3일만인 2000년 1월 4일에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후, 1월 5일에 다람살라에 도착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이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었다. 그 외에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 ‘판첸 라마’다. 그는 티베트의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의 수장이자 티베트 불교 서열 2위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한때 세속적인 권력도 있었으나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13대가 판첸 라마의 9대의 권력을 회수하고 종교적으로만 활동하라고 제한한다. 판첸 라마는 세속적인 권력이 없어졌어도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고 달라이 라마가 어릴 때 그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인도로 망명할 때 판첸 라마 10대는 그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협조한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인민의 적이라 비난하고 박해했다. 결국 그는 연금된 상태에서 1989년 사망했다. 그후 판첸 라마 11대가 나왔는데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가 판첸 라마 14대라고 선언한 게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은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지 3일 만에 본인과 가족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기알첸 노르부가 진정한 판첸 라마 11대라고 선언하여 옹립하였다.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고 새로 옹립된 판첸 라마 11대도 친중, 친공산당 성향이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행방 불명된 소년을 진짜 판첸 라마 11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한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사망하면 이제 새로운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속셈이다. 이것을 꿰뚫어보는 달라이 라마 14대는 자기 사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포탈라궁에서 느끼는 감회” 티베트의 역사를 알고 종교를 알면 포탈라 궁이 단순한 관광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인 해자조차 다 메워지고, 이제 티베트는 점점 중국화되고 있다. 그래도 많은 불교 신자들이 그 앞에서 정성들여서 오체투지 절을 하는 모습을 하면 감동이 전해진다. 또한 아침, 저녁에 포탈라 궁 주변을 돌며 진언을 외는 ‘코라’ 행렬을 보면 이들의 종교가 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든다. 포탈라궁은 밑에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근처의 아오왕산(해발 3,725m) 전망대에 올라가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해발 3,725m라고 해도 라싸 자체가 해발 3650m라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왕궁, 포탈라 궁전” 포탈라 궁은 7세기 중반에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송첸캄포가 요새처럼 지은 것인데 세월 속에서 낡고 전쟁을 겪어가면서 파괴되었다. 그후 1645년에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폐허 위에 재의 포탈라 궁을 만들었다. 포탈라 궁전은 밖에서 보면 13층 구조이지만 실제는 9층이다.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은 10만㎡가 넘는 거대한 궁전이다. 천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이자 요새이며 궁전이고 이 궁전을 짓는 데에는 7천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약 1,500명의 장인들이 장식을 했다고 한다. 1만 개가 넘는 작은 사원들이 안에 존재하며, 20만 개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다. 달라이 라마들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대까지 이 궁전에서 살며 통치했었다.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가 초대 왕인 송첸 감포의 궁전에 이런 종교적 건물을 세운 것은, 불교가 정치 권력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포탈라 산은 불교 신화에 따르면 보리살타 아발로키테슈바라(관세음 보살)가 살았다는 장소이기도 해서 신성한 상징이었다. 현재 궁전은 관람객이 너무 많이 와서 하루에 1600명만 방문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하고 하루에 6시간만 관람할 수 있다. 포탈라 궁안에는 홍궁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티베트어로 포당 마르뽀(ཕོ་བྲང་དམར་པོ།, pho brang dmar po)라고 하며, 주로 종교 의식이 열리는 공간이다. 포탈라 궁의 상부에 있으며, 많은 복합 건물 구불구불한 통로 사이로 사원과 장서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사원과 기도실들과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이 있다. 홍궁이 부처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백궁은 인간들을 위한 세속적인 공간이다. 백궁은 티베트어로 포당 까르뽀(pho brang dkar po)라고 하며, 달라이 라마도 이곳에 거주했었다. 포탈라 궁의 하부 쪽에 있으며 최초의 백궁은 제5대 달라이라마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1649년 그의 왕조가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 제1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루어졌다 포탈라궁 내부는 백궁 일부의 방 이외는 원칙적으로 비공개고 홍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옥좌와 영탑 등이 공개되고 있다. 포탈라 궁전 앞에는 거대한 해자(호수)가 있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해자였다. 호수를 건너 도달하는 포탈라궁은 세속을 떠난 성지였고, 불교에 있어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강과 산과 궁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 해자를 모두 메우고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어버려서 옛날의 상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현생 인류 초기 때부터 인간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이르러, 티베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락연맹이 형성되다가 7세기에 최초로 티베트고원의 각 부족을 통일한 티베트 왕조(토번왕조, 吐蕃王朝)가 나타났ㄷ. 티베트 왕 송첸감포는 641년 당태종(太宗)의 조카이며 수양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을 하면서 당과 티베트(토번) 사이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손첸감포는 문성공주를 위해서 새로운 궁전을 지었지만 그 궁전은 거의 파괴되었다. 티베트는 869년부터 반란이 일어나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살해되고 877년 멸망한다. 그리고 1239년까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 시대가 계속된다. 그후 1253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몽케칸(헌종)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를 장악했다. 또 쿠빌라이칸(세조)는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고승 파스파를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쿠빌라이칸은 원(元)으로 국호를 정하고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티베트는 원의 지배하에서 정교가 일치하는 지배 체제가 확립된다. 청대 초기에는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포탈라궁은 1642년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통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합한, 상징적인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포탈라 궁전을 확장, 개축했다. 사원의 기본 골조와 건물을 짓는데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내부의 인테리어와 장식을 끝마치는 데는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1649년, 백궁이 완성되자 달라이 라마와 정부 기관들은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겨울 궁전으로 쓰였다. 그의 사후 12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어 1690~94년에는 홍궁이 마저 증축되었다. 그 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Panchen Lama)가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티베트 상류층의 일부와 결합하여,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려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 이듬해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연합군의 개입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끝에 1951년 5월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라싸에 중국의 민간 주재 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 후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제14대 달라이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국은 새 판첸 라마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전시효과를 노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그후,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때와 1961, 1962년의 기근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게릴라전이 계속됨으로써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 연금되었다가 사망했다. 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든 후 지배하고 있다. “겔룩파와 달라이 라마 14대” 험준한 산악과 거친 기후에서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은 토속종교인 ‘본교’를 믿고 있었다. 주술신앙인데 7세기 무렵 송첸캄포(569-650) 왕은 불교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도에 신하를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했 그후 티송 데첸왕(755-781)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많은 인도 승려들을 티베트로 초빙했다. 이들 중에 밀교에 능한 파드마 삼바바와 샨타락시타라는 인물이 있었다. 파드마 삼바바가 창시한 티베트 불교 종파를 ‘닝마파’라고 부르는데 ‘오래된 파’를 의미한다. 그후 티베트는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면서 세력간 다툼이 벌어졌었다. 샤카파는 계율을 강조하고, 각규파는 밀교의 비법을 은밀히 전수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14세기에 샤카파, 각규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개혁을 주도한 파가 겔룩파다. 겔룩파는 계율을 중시하며 학문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다. 겔룩파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황모파라고도 하며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라이라마 14대도 겔룩파다. 그런데 11세기 초 티베트 중부의 각규파 사원인 ‘랄룽사원’에서 창파 갸레이 예셰 도르지(1161~1211)에 의해 설립된 ‘드럭파-각규파(일명 뇌룡파)’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천둥 때 승천하는 용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뇌룡파라고 이름지었는데 이 종파는 겔룩파와 종파 투쟁에서 지자 부탄으로 갔고, 훗날 이 종파가 부탄의 국교가 된다. 그리고 17세기에 티베트의 겔룩파와 전쟁을 벌이며 티베트군을 물리치고 부탄은 독립하게 된다. 티베트는 종교사회다 보니 여러 파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다. 물론, 겔룩파가 가장 대중적이고 파워를 갖다 보니 겔룩파의 수장 달라이 라마 14대가 현재 티베트 정치, 종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파들도 자기들의 수장을 갖고 있다. 겔룩파는 노란 모자를 써서 황모파라고 하는데, 반면에 까만 모자를 써서 흑모파라고 부르는 ‘각규파’가 있다. 그 각규파의 수장을 ‘까르마빠(Karmapa) 라마’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청대 초기에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그 말은 그 당시 ‘쇠냠걈초’라는 종교 지도자를 말하는 의미를 몽고식으로 풀어서 불렀을 때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쇠냠감초는 최초의 달라이 라마였지만 달라이 라마 3대로 불려지고 이전의 달라이 라마는 소급하여 계보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육체만 달리할 뿐, 계속 환생하여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런 전생활불(轉生活佛) 제도, 즉 전생의 영혼이 계속 다음 생에도 이어지며, 고승, 부처가 환생하여 나타난다는 믿음과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카르마파에서 14세기 중반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다른 종파인 겔룩파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겔룩파가 17세기 중반 종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티베트를 통일하게 되자 이때부터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때부터 성과 속을 지배하는 법왕제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9년 중국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고 탄압하자 최대 종파인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대’는 24세의 나이에 포탈라 궁에서 탈출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로 간다. 또한 각규파의 지도자인 ‘까르마빠 라마 16대’도 1959년에 티베트의 추루푸 사원을 탈출해서 시킴 지방의 룸텍으로 온다. 시킴에는 이미 1700년대에 각규파의 사원이 건립되었었고 새로 지은 룸텍 사원에서 16대 까르마빠는 이곳이 룸텍의 본산임을 선포한다. 그후 이곳은 각규파 학문과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1981년에 어떤 유언이나 계시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자 각규파는 혼란에 빠진다. 그밑의 서로 뜻을 달리하는 승려들이 일단 집단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환생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갈라졌다. 결국 두 파는 환생을 통해 나타난 까르마빠 라마 17대를 정하는 가운데 서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티베트에 살고 있던 일곱 살 소년이 환생한 17대 까르마파 라마로 인정되었는데 그는 중국 정부에 의해 이용당하며 불안에 떨었다. 결국 ‘까르마빠 17대’는 14세의 나이인 1999년 12월 28일 밤에 사원을 나와 4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12월 30일 무스탕을 거쳐 네팔로 왔고, 3일만인 2000년 1월 4일에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후, 1월 5일에 다람살라에 도착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이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었다. 그 외에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 ‘판첸 라마’다. 그는 티베트의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의 수장이자 티베트 불교 서열 2위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한때 세속적인 권력도 있었으나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13대가 판첸 라마의 9대의 권력을 회수하고 종교적으로만 활동하라고 제한한다. 판첸 라마는 세속적인 권력이 없어졌어도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고 달라이 라마가 어릴 때 그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인도로 망명할 때 판첸 라마 10대는 그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협조한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인민의 적이라 비난하고 박해했다. 결국 그는 연금된 상태에서 1989년 사망했다. 그후 판첸 라마 11대가 나왔는데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가 판첸 라마 14대라고 선언한 게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은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지 3일 만에 본인과 가족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기알첸 노르부가 진정한 판첸 라마 11대라고 선언하여 옹립하였다.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고 새로 옹립된 판첸 라마 11대도 친중, 친공산당 성향이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행방 불명된 소년을 진짜 판첸 라마 11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한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사망하면 이제 새로운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속셈이다. 이것을 꿰뚫어보는 달라이 라마 14대는 자기 사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포탈라궁에서 느끼는 감회” 티베트의 역사를 알고 종교를 알면 포탈라 궁이 단순한 관광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인 해자조차 다 메워지고, 이제 티베트는 점점 중국화되고 있다. 그래도 많은 불교 신자들이 그 앞에서 정성들여서 오체투지 절을 하는 모습을 하면 감동이 전해진다. 또한 아침, 저녁에 포탈라 궁 주변을 돌며 진언을 외는 ‘코라’ 행렬을 보면 이들의 종교가 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든다. 포탈라궁은 밑에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근처의 아오왕산(해발 3,725m) 전망대에 올라가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해발 3,725m라고 해도 라싸 자체가 해발 3650m라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왕궁, 포탈라 궁전” 포탈라 궁은 7세기 중반에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송첸캄포가 요새처럼 지은 것인데 세월 속에서 낡고 전쟁을 겪어가면서 파괴되었다. 그후 1645년에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폐허 위에 재의 포탈라 궁을 만들었다. 포탈라 궁전은 밖에서 보면 13층 구조이지만 실제는 9층이다.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은 10만㎡가 넘는 거대한 궁전이다. 천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이자 요새이며 궁전이고 이 궁전을 짓는 데에는 7천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약 1,500명의 장인들이 장식을 했다고 한다. 1만 개가 넘는 작은 사원들이 안에 존재하며, 20만 개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다. 달라이 라마들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대까지 이 궁전에서 살며 통치했었다.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가 초대 왕인 송첸 감포의 궁전에 이런 종교적 건물을 세운 것은, 불교가 정치 권력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포탈라 산은 불교 신화에 따르면 보리살타 아발로키테슈바라(관세음 보살)가 살았다는 장소이기도 해서 신성한 상징이었다. 현재 궁전은 관람객이 너무 많이 와서 하루에 1600명만 방문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하고 하루에 6시간만 관람할 수 있다. 포탈라 궁안에는 홍궁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티베트어로 포당 마르뽀(ཕོ་བྲང་དམར་པོ།, pho brang dmar po)라고 하며, 주로 종교 의식이 열리는 공간이다. 포탈라 궁의 상부에 있으며, 많은 복합 건물 구불구불한 통로 사이로 사원과 장서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사원과 기도실들과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이 있다. 홍궁이 부처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백궁은 인간들을 위한 세속적인 공간이다. 백궁은 티베트어로 포당 까르뽀(pho brang dkar po)라고 하며, 달라이 라마도 이곳에 거주했었다. 포탈라 궁의 하부 쪽에 있으며 최초의 백궁은 제5대 달라이라마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1649년 그의 왕조가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 제1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루어졌다 포탈라궁 내부는 백궁 일부의 방 이외는 원칙적으로 비공개고 홍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옥좌와 영탑 등이 공개되고 있다. 포탈라 궁전 앞에는 거대한 해자(호수)가 있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해자였다. 호수를 건너 도달하는 포탈라궁은 세속을 떠난 성지였고, 불교에 있어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강과 산과 궁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 해자를 모두 메우고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어버려서 옛날의 상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현생 인류 초기 때부터 인간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이르러, 티베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락연맹이 형성되다가 7세기에 최초로 티베트고원의 각 부족을 통일한 티베트 왕조(토번왕조, 吐蕃王朝)가 나타났ㄷ. 티베트 왕 송첸감포는 641년 당태종(太宗)의 조카이며 수양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을 하면서 당과 티베트(토번) 사이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손첸감포는 문성공주를 위해서 새로운 궁전을 지었지만 그 궁전은 거의 파괴되었다. 티베트는 869년부터 반란이 일어나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살해되고 877년 멸망한다. 그리고 1239년까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 시대가 계속된다. 그후 1253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몽케칸(헌종)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를 장악했다. 또 쿠빌라이칸(세조)는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고승 파스파를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쿠빌라이칸은 원(元)으로 국호를 정하고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티베트는 원의 지배하에서 정교가 일치하는 지배 체제가 확립된다. 청대 초기에는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포탈라궁은 1642년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통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합한, 상징적인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포탈라 궁전을 확장, 개축했다. 사원의 기본 골조와 건물을 짓는데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내부의 인테리어와 장식을 끝마치는 데는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1649년, 백궁이 완성되자 달라이 라마와 정부 기관들은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겨울 궁전으로 쓰였다. 그의 사후 12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어 1690~94년에는 홍궁이 마저 증축되었다. 그 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Panchen Lama)가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티베트 상류층의 일부와 결합하여,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려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 이듬해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연합군의 개입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끝에 1951년 5월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라싸에 중국의 민간 주재 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 후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제14대 달라이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국은 새 판첸 라마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전시효과를 노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그후,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때와 1961, 1962년의 기근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게릴라전이 계속됨으로써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 연금되었다가 사망했다. 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든 후 지배하고 있다. “겔룩파와 달라이 라마 14대” 험준한 산악과 거친 기후에서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은 토속종교인 ‘본교’를 믿고 있었다. 주술신앙인데 7세기 무렵 송첸캄포(569-650) 왕은 불교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도에 신하를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했 그후 티송 데첸왕(755-781)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많은 인도 승려들을 티베트로 초빙했다. 이들 중에 밀교에 능한 파드마 삼바바와 샨타락시타라는 인물이 있었다. 파드마 삼바바가 창시한 티베트 불교 종파를 ‘닝마파’라고 부르는데 ‘오래된 파’를 의미한다. 그후 티베트는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면서 세력간 다툼이 벌어졌었다. 샤카파는 계율을 강조하고, 각규파는 밀교의 비법을 은밀히 전수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14세기에 샤카파, 각규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개혁을 주도한 파가 겔룩파다. 겔룩파는 계율을 중시하며 학문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다. 겔룩파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황모파라고도 하며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라이라마 14대도 겔룩파다. 그런데 11세기 초 티베트 중부의 각규파 사원인 ‘랄룽사원’에서 창파 갸레이 예셰 도르지(1161~1211)에 의해 설립된 ‘드럭파-각규파(일명 뇌룡파)’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천둥 때 승천하는 용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뇌룡파라고 이름지었는데 이 종파는 겔룩파와 종파 투쟁에서 지자 부탄으로 갔고, 훗날 이 종파가 부탄의 국교가 된다. 그리고 17세기에 티베트의 겔룩파와 전쟁을 벌이며 티베트군을 물리치고 부탄은 독립하게 된다. 티베트는 종교사회다 보니 여러 파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다. 물론, 겔룩파가 가장 대중적이고 파워를 갖다 보니 겔룩파의 수장 달라이 라마 14대가 현재 티베트 정치, 종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파들도 자기들의 수장을 갖고 있다. 겔룩파는 노란 모자를 써서 황모파라고 하는데, 반면에 까만 모자를 써서 흑모파라고 부르는 ‘각규파’가 있다. 그 각규파의 수장을 ‘까르마빠(Karmapa) 라마’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청대 초기에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그 말은 그 당시 ‘쇠냠걈초’라는 종교 지도자를 말하는 의미를 몽고식으로 풀어서 불렀을 때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쇠냠감초는 최초의 달라이 라마였지만 달라이 라마 3대로 불려지고 이전의 달라이 라마는 소급하여 계보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육체만 달리할 뿐, 계속 환생하여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런 전생활불(轉生活佛) 제도, 즉 전생의 영혼이 계속 다음 생에도 이어지며, 고승, 부처가 환생하여 나타난다는 믿음과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카르마파에서 14세기 중반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다른 종파인 겔룩파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겔룩파가 17세기 중반 종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티베트를 통일하게 되자 이때부터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때부터 성과 속을 지배하는 법왕제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9년 중국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고 탄압하자 최대 종파인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대’는 24세의 나이에 포탈라 궁에서 탈출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로 간다. 또한 각규파의 지도자인 ‘까르마빠 라마 16대’도 1959년에 티베트의 추루푸 사원을 탈출해서 시킴 지방의 룸텍으로 온다. 시킴에는 이미 1700년대에 각규파의 사원이 건립되었었고 새로 지은 룸텍 사원에서 16대 까르마빠는 이곳이 룸텍의 본산임을 선포한다. 그후 이곳은 각규파 학문과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1981년에 어떤 유언이나 계시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자 각규파는 혼란에 빠진다. 그밑의 서로 뜻을 달리하는 승려들이 일단 집단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환생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갈라졌다. 결국 두 파는 환생을 통해 나타난 까르마빠 라마 17대를 정하는 가운데 서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티베트에 살고 있던 일곱 살 소년이 환생한 17대 까르마파 라마로 인정되었는데 그는 중국 정부에 의해 이용당하며 불안에 떨었다. 결국 ‘까르마빠 17대’는 14세의 나이인 1999년 12월 28일 밤에 사원을 나와 4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12월 30일 무스탕을 거쳐 네팔로 왔고, 3일만인 2000년 1월 4일에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후, 1월 5일에 다람살라에 도착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이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었다. 그 외에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 ‘판첸 라마’다. 그는 티베트의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의 수장이자 티베트 불교 서열 2위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한때 세속적인 권력도 있었으나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13대가 판첸 라마의 9대의 권력을 회수하고 종교적으로만 활동하라고 제한한다. 판첸 라마는 세속적인 권력이 없어졌어도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고 달라이 라마가 어릴 때 그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인도로 망명할 때 판첸 라마 10대는 그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협조한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인민의 적이라 비난하고 박해했다. 결국 그는 연금된 상태에서 1989년 사망했다. 그후 판첸 라마 11대가 나왔는데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가 판첸 라마 14대라고 선언한 게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은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지 3일 만에 본인과 가족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기알첸 노르부가 진정한 판첸 라마 11대라고 선언하여 옹립하였다.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고 새로 옹립된 판첸 라마 11대도 친중, 친공산당 성향이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행방 불명된 소년을 진짜 판첸 라마 11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한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사망하면 이제 새로운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속셈이다. 이것을 꿰뚫어보는 달라이 라마 14대는 자기 사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포탈라궁에서 느끼는 감회” 티베트의 역사를 알고 종교를 알면 포탈라 궁이 단순한 관광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인 해자조차 다 메워지고, 이제 티베트는 점점 중국화되고 있다. 그래도 많은 불교 신자들이 그 앞에서 정성들여서 오체투지 절을 하는 모습을 하면 감동이 전해진다. 또한 아침, 저녁에 포탈라 궁 주변을 돌며 진언을 외는 ‘코라’ 행렬을 보면 이들의 종교가 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든다. 포탈라궁은 밑에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근처의 아오왕산(해발 3,725m) 전망대에 올라가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해발 3,725m라고 해도 라싸 자체가 해발 3650m라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카트만두 계곡 속의 세 도시,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세 개의 도시 중에서 카트만두는 과거와 현재의 네팔을 보여주고 있고 파탄과 박티푸르는 중세 네팔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카트만두 계곡에 사람들이 살던 시기는 오래전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다가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남부에 작은 왕국들이 출현한다. 이 왕국 중 부처가 태어난 카필라국도 속해 있다. 인도인들은 부처의 출현을 인도 문화에서 보고 있지만 네팔인들은 싯다르타가 네팔계였으며 네팔 문화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한다. 그후 네팔 지역은 인도에서 일어난 마우리야 왕조에게 지배당하고 또 작은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13세기 초에 파탄 지역에서 일어난 ‘말라 왕조’의 ‘자야스티’라는 인물이 14세기에 네팔을 통일하지만 그의 자손들이 분열을 일으키면서 1482년 카트만두 계곡은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의 세 왕국으로 분열된다. 이들은 분열되었지만 경쟁을 통해 문화, 예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박타 박타푸르는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왕궁, 포탈라 궁전” 포탈라 궁은 7세기 중반에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송첸캄포가 요새처럼 지은 것인데 세월 속에서 낡고 전쟁을 겪어가면서 파괴되었다. 그후 1645년에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폐허 위에 재의 포탈라 궁을 만들었다. 포탈라 궁전은 밖에서 보면 13층 구조이지만 실제는 9층이다.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은 10만㎡가 넘는 거대한 궁전이다. 천 개의 방이 있는 수도원이자 요새이며 궁전이고 이 궁전을 짓는 데에는 7천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약 1,500명의 장인들이 장식을 했다고 한다. 1만 개가 넘는 작은 사원들이 안에 존재하며, 20만 개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다. 달라이 라마들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때부터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4대까지 이 궁전에서 살며 통치했었다.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가 초대 왕인 송첸 감포의 궁전에 이런 종교적 건물을 세운 것은, 불교가 정치 권력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포탈라 산은 불교 신화에 따르면 보리살타 아발로키테슈바라(관세음 보살)가 살았다는 장소이기도 해서 신성한 상징이었다. 현재 궁전은 관람객이 너무 많이 와서 하루에 1600명만 방문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하고 하루에 6시간만 관람할 수 있다. 포탈라 궁안에는 홍궁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티베트어로 포당 마르뽀(ཕོ་བྲང་དམར་པོ།, pho brang dmar po)라고 하며, 주로 종교 의식이 열리는 공간이다. 포탈라 궁의 상부에 있으며, 많은 복합 건물 구불구불한 통로 사이로 사원과 장서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역대 달라이 라마들의 사원과 기도실들과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이 있다. 홍궁이 부처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백궁은 인간들을 위한 세속적인 공간이다. 백궁은 티베트어로 포당 까르뽀(pho brang dkar po)라고 하며, 달라이 라마도 이곳에 거주했었다. 포탈라 궁의 하부 쪽에 있으며 최초의 백궁은 제5대 달라이라마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1649년 그의 왕조가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 제1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루어졌다 포탈라궁 내부는 백궁 일부의 방 이외는 원칙적으로 비공개고 홍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옥좌와 영탑 등이 공개되고 있다. 포탈라 궁전 앞에는 거대한 해자(호수)가 있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해자였다. 호수를 건너 도달하는 포탈라궁은 세속을 떠난 성지였고, 불교에 있어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강과 산과 궁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 해자를 모두 메우고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어버려서 옛날의 상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티베트의 역사” 티베트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현생 인류 초기 때부터 인간이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 이르러, 티베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락연맹이 형성되다가 7세기에 최초로 티베트고원의 각 부족을 통일한 티베트 왕조(토번왕조, 吐蕃王朝)가 나타났ㄷ. 티베트 왕 송첸감포는 641년 당태종(太宗)의 조카이며 수양딸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을 하면서 당과 티베트(토번) 사이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손첸감포는 문성공주를 위해서 새로운 궁전을 지었지만 그 궁전은 거의 파괴되었다. 티베트는 869년부터 반란이 일어나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살해되고 877년 멸망한다. 그리고 1239년까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 시대가 계속된다. 그후 1253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몽케칸(헌종)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를 장악했다. 또 쿠빌라이칸(세조)는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고승 파스파를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쿠빌라이칸은 원(元)으로 국호를 정하고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티베트는 원의 지배하에서 정교가 일치하는 지배 체제가 확립된다. 청대 초기에는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포탈라궁은 1642년 5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통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합한, 상징적인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포탈라 궁전을 확장, 개축했다. 사원의 기본 골조와 건물을 짓는데는 3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내부의 인테리어와 장식을 끝마치는 데는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1649년, 백궁이 완성되자 달라이 라마와 정부 기관들은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겨울 궁전으로 쓰였다. 그의 사후 12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어 1690~94년에는 홍궁이 마저 증축되었다. 그 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Panchen Lama)가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티베트 상류층의 일부와 결합하여,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려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 이듬해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연합군의 개입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끝에 1951년 5월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라싸에 중국의 민간 주재 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 후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제14대 달라이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후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국은 새 판첸 라마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전시효과를 노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그후,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때와 1961, 1962년의 기근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게릴라전이 계속됨으로써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 연금되었다가 사망했다. 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든 후 지배하고 있다. “겔룩파와 달라이 라마 14대” 험준한 산악과 거친 기후에서 살아가던 티베트인들은 토속종교인 ‘본교’를 믿고 있었다. 주술신앙인데 7세기 무렵 송첸캄포(569-650) 왕은 불교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도에 신하를 파견하여 불교를 수입했 그후 티송 데첸왕(755-781)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많은 인도 승려들을 티베트로 초빙했다. 이들 중에 밀교에 능한 파드마 삼바바와 샨타락시타라는 인물이 있었다. 파드마 삼바바가 창시한 티베트 불교 종파를 ‘닝마파’라고 부르는데 ‘오래된 파’를 의미한다. 그후 티베트는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면서 세력간 다툼이 벌어졌었다. 샤카파는 계율을 강조하고, 각규파는 밀교의 비법을 은밀히 전수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14세기에 샤카파, 각규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개혁을 주도한 파가 겔룩파다. 겔룩파는 계율을 중시하며 학문적인 연구를 중요시했다. 겔룩파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황모파라고도 하며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라이라마 14대도 겔룩파다. 그런데 11세기 초 티베트 중부의 각규파 사원인 ‘랄룽사원’에서 창파 갸레이 예셰 도르지(1161~1211)에 의해 설립된 ‘드럭파-각규파(일명 뇌룡파)’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천둥 때 승천하는 용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뇌룡파라고 이름지었는데 이 종파는 겔룩파와 종파 투쟁에서 지자 부탄으로 갔고, 훗날 이 종파가 부탄의 국교가 된다. 그리고 17세기에 티베트의 겔룩파와 전쟁을 벌이며 티베트군을 물리치고 부탄은 독립하게 된다. 티베트는 종교사회다 보니 여러 파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다. 물론, 겔룩파가 가장 대중적이고 파워를 갖다 보니 겔룩파의 수장 달라이 라마 14대가 현재 티베트 정치, 종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파들도 자기들의 수장을 갖고 있다. 겔룩파는 노란 모자를 써서 황모파라고 하는데, 반면에 까만 모자를 써서 흑모파라고 부르는 ‘각규파’가 있다. 그 각규파의 수장을 ‘까르마빠(Karmapa) 라마’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청대 초기에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 의미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었다. 그 말은 그 당시 ‘쇠냠걈초’라는 종교 지도자를 말하는 의미를 몽고식으로 풀어서 불렀을 때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쇠냠감초는 최초의 달라이 라마였지만 달라이 라마 3대로 불려지고 이전의 달라이 라마는 소급하여 계보를 맞춘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육체만 달리할 뿐, 계속 환생하여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런 전생활불(轉生活佛) 제도, 즉 전생의 영혼이 계속 다음 생에도 이어지며, 고승, 부처가 환생하여 나타난다는 믿음과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인 카르마파에서 14세기 중반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다른 종파인 겔룩파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겔룩파가 17세기 중반 종파 투쟁에서 승리하고 티베트를 통일하게 되자 이때부터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대때부터 성과 속을 지배하는 법왕제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9년 중국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고 탄압하자 최대 종파인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대’는 24세의 나이에 포탈라 궁에서 탈출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로 간다. 또한 각규파의 지도자인 ‘까르마빠 라마 16대’도 1959년에 티베트의 추루푸 사원을 탈출해서 시킴 지방의 룸텍으로 온다. 시킴에는 이미 1700년대에 각규파의 사원이 건립되었었고 새로 지은 룸텍 사원에서 16대 까르마빠는 이곳이 룸텍의 본산임을 선포한다. 그후 이곳은 각규파 학문과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1981년에 어떤 유언이나 계시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자 각규파는 혼란에 빠진다. 그밑의 서로 뜻을 달리하는 승려들이 일단 집단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환생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갈라졌다. 결국 두 파는 환생을 통해 나타난 까르마빠 라마 17대를 정하는 가운데 서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티베트에 살고 있던 일곱 살 소년이 환생한 17대 까르마파 라마로 인정되었는데 그는 중국 정부에 의해 이용당하며 불안에 떨었다. 결국 ‘까르마빠 17대’는 14세의 나이인 1999년 12월 28일 밤에 사원을 나와 4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12월 30일 무스탕을 거쳐 네팔로 왔고, 3일만인 2000년 1월 4일에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후, 1월 5일에 다람살라에 도착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이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었다. 그 외에 티베트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 ‘판첸 라마’다. 그는 티베트의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의 수장이자 티베트 불교 서열 2위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한때 세속적인 권력도 있었으나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13대가 판첸 라마의 9대의 권력을 회수하고 종교적으로만 활동하라고 제한한다. 판첸 라마는 세속적인 권력이 없어졌어도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고 달라이 라마가 어릴 때 그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인도로 망명할 때 판첸 라마 10대는 그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협조한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인민의 적이라 비난하고 박해했다. 결국 그는 연금된 상태에서 1989년 사망했다. 그후 판첸 라마 11대가 나왔는데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가 판첸 라마 14대라고 선언한 게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은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지 3일 만에 본인과 가족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기알첸 노르부가 진정한 판첸 라마 11대라고 선언하여 옹립하였다.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었고 새로 옹립된 판첸 라마 11대도 친중, 친공산당 성향이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 14대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행방 불명된 소년을 진짜 판첸 라마 11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한데, 달라이 라마 14대가 사망하면 이제 새로운 15대 달라이 라마를 찾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판첸 라마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속셈이다. 이것을 꿰뚫어보는 달라이 라마 14대는 자기 사후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포탈라궁에서 느끼는 감회” 티베트의 역사를 알고 종교를 알면 포탈라 궁이 단순한 관광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인 해자조차 다 메워지고, 이제 티베트는 점점 중국화되고 있다. 그래도 많은 불교 신자들이 그 앞에서 정성들여서 오체투지 절을 하는 모습을 하면 감동이 전해진다. 또한 아침, 저녁에 포탈라 궁 주변을 돌며 진언을 외는 ‘코라’ 행렬을 보면 이들의 종교가 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경건한 마음이 든다. 포탈라궁은 밑에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근처의 아오왕산(해발 3,725m) 전망대에 올라가서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해발 3,725m라고 해도 라싸 자체가 해발 3650m라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말라 왕국의 수도였던, 파탄(Patan)” 지금은 낙후된 채 카트만두의 외곽 도시로 전락했지만 한때는 네팔의 전역을 통치하던 말라 왕국의 수도로 지금도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중세 시대, 네팔을 통일한 말라 왕조는 15세기 야크 샤(Yakshya Malla)왕 때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여 왕국은 카트만두, 박타푸르, 파탄의 세 왕국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후 1768년 네팔 전역을 통일한 고르카 왕국의 샤 왕조는 수도를 카트만두로 정하면서 파탄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상실하고 카트만두에 종속되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파탄의 더르바르 광장은 이런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세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박타푸르(Bhaktapur, 옛 이름은 바드가온Bhadgaon)”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중세 도시다. 9세기 중반, 네와르족 왕조가 세웠으나 1769년 고르카 왕국의 샤 왕조가 점령했다. 그때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건물과 예술품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1934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고 2015년에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더르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왕궁, 불교, 힌두교 사원, 박물관등을 돌아보며 중세 건축과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에 등재되었다. 카트만두에서 가까워 당일 근교 여행 코스로 인기가 있고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감독,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리틀 붓다,LittleBuddha>를 촬영한 장소로 가기 전에 영화를 보고 가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 계곡에서 네팔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입구에는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아치형의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은 현재에서 중세 네팔로 넘어가는 시간 이동의 통로다. 이 문 뒤쪽으로 예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갑작스럽게 변하는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짜릿한 흥분을 느낀다. 문을 경계로 다른 세계가 펼쳐지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더르바르 광장이 펼쳐지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들과 복고풍 건물 양식들이 펼쳐진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북쪽의 절반을 차지하는 왕궁이다. 그리고 여러 사원들이 있다. 특히 나타폴라 사원(Nyatapola Temple)은 30m 높이의 5층 건물로 네팔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사원이자 카트만두 계곡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다. 그 외에도 가네쉬 사원, 비슈느 사원들이 있다. “유적지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네팔 사람들” 이곳 더르바(Durba) 광장의 주민들은 유적지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카트만두, 파탄의 더르바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풍경은 여기서만 볼 수 있다. 선진국이든 어느 나라든 유적지와 생활 주거지는 확연히 구분되어 있고 관리된다. 물론 이곳을 입장할 때 외국인들은 표를 사고 입장하지만 그렇다고 민속촌이 아니다. 현지인들은 유적지 안에서 옛날부터 살아온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주민들은 왕궁이나 사원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도 즐기고, 신문도 보고, 머리도 빗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당신도 거기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좁은 골목길의 공방에서 장인들은 목재를 짜고, 광장에는 파는 냄비가 가득하며, 현지인들은 안뜰에 모여 목욕도 하고, 계단에 앉아 카드놀이도 한다. 그런 풍경은 네팔의 더르바르 광장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다. 또한 점토 도기가 팔리는 도기 광장도 흥미롭다. 햇볕에 말리는 토기 항아리가 가득 차 있고 도공들이 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이 복잡하고 활기차다면 박타푸르의 더르바르 광장은 훨씬 더 고즈넉하다. 그래서 더 중세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카트만두에서 15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어서 가기도 좋다. 피곤한 세상, 너무 빨라진 세상에서 좀 느리게 살고 싶고, 수백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박타푸르로 가시라. 그런데 앞으로 네팔이 더 발전해 가면 이런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몇십 년 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입장료도 받지 않고 담도 없었다. 아이들이 와서 놀던 곳이었다. 경주의 첨성대도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 심지어는 여학생들도 다 기어 올라가 새까맣게 달라붙은 사진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우리도 그랬다. 네팔도 지금은 문화유적지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쉴 수 있지만 언젠가 철처히 격리시키고 관리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들도 그속으로 들어가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현지인에 대한 예의”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빈곤한 그들의 삶을 사냥하듯이 카메라로 찍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웃어가면서 사진 찍어도 되겠냐는 몸짓을 공손하게 보여주는 것이 좋다. 그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빨리 찍고 눈인사라도 하는 것이 좋다. 그들의 삶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관광객들의 기본적인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