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최대의 스투파 보드나트 스투파

네팔 최대의 스투파 보드나트 스투파

보드나트 사원은 카트만두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있고 사원에는 거대한 스투파Boudhanath Stupa)가 세워져 있다. 네팔 최대의 스투파다. 양식은 스와얌 부나트 사원에 있는 스투파와 비슷하지만 훨씬 크고 웅장하다. 이곳에는 특히 티베트 불교도들이 아침과 저녁에 탑돌이를 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보드나트 사원에 숨겨진 상징” 이 스투파 역시 매우 상징적인 구조로 받침대는 땅을 의미하고 반원형의 돔은 물, 부처의 눈이 새겨진 정사면체는 불, 우산 모양의 구조물은 바람, 첨탑은 공기, 꼭대기는 공간 너머의 공허 또는 에테르를 나타낸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첨탑의 13층은 인간이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만다라를 기초로 하여 건축된 사미예 사원” 티베트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수행자들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사미예 사원은 이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미에 사원의 중심에 있는 2층의 대전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고, 이 건물의 네 방위에는 4개의 불전이 세워져 있다. 그 부근에 각각 2개의 작은 법당이 있다. 대전의 좌우 양측에 작은 소전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고, 대전의 모서리 부분에 있는 각 탑은 모든 악신과 마귀를 정복하여 천재지변을 제지한다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을 타원형의 담이 둘러싸고 있다. 사미예 사원의 대전 1층은 티베트 양식으로, 2층은 중국의 한족식으로, 3층은 인도의 건축양식을 결합하여 특별하게 건축되었는데 3층은 최근에 무너져서 없어졌고, 현재는 1층과 2층만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사미예 사원이 모든 티베트 사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치쏭 데짼(적송덕찬,赤松德贊) 티베트 왕은 사미예 사원이 완성된 후 인도에서 열두 명의 승려를 불러와서, 귀족 자제 7명에게 머리를 자르게 하고 승려가 되게 하여 사미예 사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들은 “칠각사(七觉士)“ 라 불렀으며, 그들의 출현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또한 티베트의 모든 사원이 이곳을 기초로 지어졌기에 사미에 사원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미예 사원의 그림과 유물의 가치” 대전의 복도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 차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티베트의 역사와 티베트 불교의 생성과정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공적이 그려져 있다. 티베트 라마교 겔룩파 (황모파)의 창시자인 쫑카파가 불교를 전수하는 과정에서부터 제9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역사는 장장 92m 길이의 벽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이 그림들을 보면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본전 문 앞에는 당나라 양식의 구리종이 걸려있는데, 이 종은 왕족 귀족이 탁발승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조한 것으로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로 만든 종이라 전해진다. 동문의 남쪽에는 유명한 “상예흥불증감비(桑耶兴佛证监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당시의 티베트왕인 치쏭 데짼이 799년 불교를 티벳의 국교로 한다는 내용이 고대 티베트어로 쓰여 있다. 이러한 사미얘 사원은 청나라 시절에 큰 화재로 인해서 서적과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 6대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1996년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지금까지도 계속 보수하고 있는 상태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을 만든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38대 임금인 치송데첸은 국교를 불교로 선포한 왕이다. 그러나 반대가 많았다. 송첸캄포 왕이 불교의 터전을 닦았지만 불교는 왕과 몇몇의 귀족들만 믿는 종교였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토착종교인 본교(苯教)를 믿었다. 그러니 치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본교 사제들과 그들의 엄호 세력인 귀족들은 저항한다. 왕과 본교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왕은 본교를 탄압하고 본교 사제들은 몰래 왕을 저주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에 치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사미예 사원을 건설하여 불교를 더욱 확장하려고 했다. 그는 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의 유명한 승려인 샨타라크쉬타를 모셔와 사원을 짓도록 하였으나 본교 귀신들의 방해로 낮에 건축하면 밤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자 샨타라크쉬타는 치송데첸에게 자기의 공덕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으니, 자기의 제자 가운데 귀신을 다스릴 줄 아는 파드마삼바바를 데리고 오기를 부탁하였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로 오자 치송데첸은 많은 금을 갖고 라싸 근교에까지 마중 나갔지만, 파드마삼바바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금을 먼지로 만들었으나 그후 다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문을 외워서 다시 금이 되는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스승인 샨탈크쉬타와 함께 사미예 사원으로 가서, 귀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779년에 사원을 세웠으니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최초로 불교의 진수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졌다. “보드나트에 숨겨진 네팔인들의 슬픈 전설” 이 사원의 건설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네팔의 마나데바 왕(464-505)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마나데바 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의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절 비가 오지 않아 고통을 받았다. 왕은 왕궁에 식수대를 만들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점성술사는 ‘완전한 인간’을 희생물로 바쳐야 하는데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왕과 왕자들 뿐이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하고 왕자에게 말한다. 어디에, 언제 가면 어느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자고 있을테니 그 얼굴을 보지 말고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왕자는 시키는 대로 했고 잘려진 왕의 머리는 멀리 날아갔다. 결국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게 된 왕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후 왕이 된 ‘마나 데바’는 그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의 목이 떨어진 곳에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암탉을 날리자 현재의 사원 자리로 날아왔다고 한다. 그곳에 사원과 스투파를 세웠는데 건설 당시에도 가뭄에 시달렸고 사람들은 이슬방울을 모아서 마셨다고 한다. 네팔어로 이슬을 ‘카스’라 하고, 방울을 ‘티’라고 하는데 이것을 합쳐서 이 사원은 ‘카스티’라고 처음에 불리다가 나중에 ‘보드나트’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첫 번째 사리탑은 14세기 무굴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현재의 거대한 사리탑은 그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다라를 기초로 하여 건축된 사미예 사원” 티베트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수행자들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사미예 사원은 이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미에 사원의 중심에 있는 2층의 대전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고, 이 건물의 네 방위에는 4개의 불전이 세워져 있다. 그 부근에 각각 2개의 작은 법당이 있다. 대전의 좌우 양측에 작은 소전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고, 대전의 모서리 부분에 있는 각 탑은 모든 악신과 마귀를 정복하여 천재지변을 제지한다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을 타원형의 담이 둘러싸고 있다. 사미예 사원의 대전 1층은 티베트 양식으로, 2층은 중국의 한족식으로, 3층은 인도의 건축양식을 결합하여 특별하게 건축되었는데 3층은 최근에 무너져서 없어졌고, 현재는 1층과 2층만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사미예 사원이 모든 티베트 사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치쏭 데짼(적송덕찬,赤松德贊) 티베트 왕은 사미예 사원이 완성된 후 인도에서 열두 명의 승려를 불러와서, 귀족 자제 7명에게 머리를 자르게 하고 승려가 되게 하여 사미예 사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들은 “칠각사(七觉士)“ 라 불렀으며, 그들의 출현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또한 티베트의 모든 사원이 이곳을 기초로 지어졌기에 사미에 사원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미예 사원의 그림과 유물의 가치” 대전의 복도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 차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티베트의 역사와 티베트 불교의 생성과정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공적이 그려져 있다. 티베트 라마교 겔룩파 (황모파)의 창시자인 쫑카파가 불교를 전수하는 과정에서부터 제9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역사는 장장 92m 길이의 벽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이 그림들을 보면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본전 문 앞에는 당나라 양식의 구리종이 걸려있는데, 이 종은 왕족 귀족이 탁발승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조한 것으로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로 만든 종이라 전해진다. 동문의 남쪽에는 유명한 “상예흥불증감비(桑耶兴佛证监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당시의 티베트왕인 치쏭 데짼이 799년 불교를 티벳의 국교로 한다는 내용이 고대 티베트어로 쓰여 있다. 이러한 사미얘 사원은 청나라 시절에 큰 화재로 인해서 서적과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 6대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1996년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지금까지도 계속 보수하고 있는 상태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을 만든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38대 임금인 치송데첸은 국교를 불교로 선포한 왕이다. 그러나 반대가 많았다. 송첸캄포 왕이 불교의 터전을 닦았지만 불교는 왕과 몇몇의 귀족들만 믿는 종교였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토착종교인 본교(苯教)를 믿었다. 그러니 치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본교 사제들과 그들의 엄호 세력인 귀족들은 저항한다. 왕과 본교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왕은 본교를 탄압하고 본교 사제들은 몰래 왕을 저주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에 치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사미예 사원을 건설하여 불교를 더욱 확장하려고 했다. 그는 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의 유명한 승려인 샨타라크쉬타를 모셔와 사원을 짓도록 하였으나 본교 귀신들의 방해로 낮에 건축하면 밤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자 샨타라크쉬타는 치송데첸에게 자기의 공덕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으니, 자기의 제자 가운데 귀신을 다스릴 줄 아는 파드마삼바바를 데리고 오기를 부탁하였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로 오자 치송데첸은 많은 금을 갖고 라싸 근교에까지 마중 나갔지만, 파드마삼바바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금을 먼지로 만들었으나 그후 다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문을 외워서 다시 금이 되는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스승인 샨탈크쉬타와 함께 사미예 사원으로 가서, 귀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779년에 사원을 세웠으니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최초로 불교의 진수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졌다. “만다라를 기초로 하여 건축된 사미예 사원” 티베트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수행자들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사미예 사원은 이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미에 사원의 중심에 있는 2층의 대전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고, 이 건물의 네 방위에는 4개의 불전이 세워져 있다. 그 부근에 각각 2개의 작은 법당이 있다. 대전의 좌우 양측에 작은 소전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고, 대전의 모서리 부분에 있는 각 탑은 모든 악신과 마귀를 정복하여 천재지변을 제지한다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을 타원형의 담이 둘러싸고 있다. 사미예 사원의 대전 1층은 티베트 양식으로, 2층은 중국의 한족식으로, 3층은 인도의 건축양식을 결합하여 특별하게 건축되었는데 3층은 최근에 무너져서 없어졌고, 현재는 1층과 2층만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사미예 사원이 모든 티베트 사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치쏭 데짼(적송덕찬,赤松德贊) 티베트 왕은 사미예 사원이 완성된 후 인도에서 열두 명의 승려를 불러와서, 귀족 자제 7명에게 머리를 자르게 하고 승려가 되게 하여 사미예 사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들은 “칠각사(七觉士)“ 라 불렀으며, 그들의 출현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또한 티베트의 모든 사원이 이곳을 기초로 지어졌기에 사미에 사원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미예 사원의 그림과 유물의 가치” 대전의 복도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 차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티베트의 역사와 티베트 불교의 생성과정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공적이 그려져 있다. 티베트 라마교 겔룩파 (황모파)의 창시자인 쫑카파가 불교를 전수하는 과정에서부터 제9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역사는 장장 92m 길이의 벽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이 그림들을 보면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본전 문 앞에는 당나라 양식의 구리종이 걸려있는데, 이 종은 왕족 귀족이 탁발승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조한 것으로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로 만든 종이라 전해진다. 동문의 남쪽에는 유명한 “상예흥불증감비(桑耶兴佛证监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당시의 티베트왕인 치쏭 데짼이 799년 불교를 티벳의 국교로 한다는 내용이 고대 티베트어로 쓰여 있다. 이러한 사미얘 사원은 청나라 시절에 큰 화재로 인해서 서적과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 6대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1996년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지금까지도 계속 보수하고 있는 상태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을 만든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38대 임금인 치송데첸은 국교를 불교로 선포한 왕이다. 그러나 반대가 많았다. 송첸캄포 왕이 불교의 터전을 닦았지만 불교는 왕과 몇몇의 귀족들만 믿는 종교였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토착종교인 본교(苯教)를 믿었다. 그러니 치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본교 사제들과 그들의 엄호 세력인 귀족들은 저항한다. 왕과 본교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왕은 본교를 탄압하고 본교 사제들은 몰래 왕을 저주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에 치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사미예 사원을 건설하여 불교를 더욱 확장하려고 했다. 그는 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의 유명한 승려인 샨타라크쉬타를 모셔와 사원을 짓도록 하였으나 본교 귀신들의 방해로 낮에 건축하면 밤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자 샨타라크쉬타는 치송데첸에게 자기의 공덕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으니, 자기의 제자 가운데 귀신을 다스릴 줄 아는 파드마삼바바를 데리고 오기를 부탁하였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로 오자 치송데첸은 많은 금을 갖고 라싸 근교에까지 마중 나갔지만, 파드마삼바바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금을 먼지로 만들었으나 그후 다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문을 외워서 다시 금이 되는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스승인 샨탈크쉬타와 함께 사미예 사원으로 가서, 귀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779년에 사원을 세웠으니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최초로 불교의 진수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졌다. “만다라를 기초로 하여 건축된 사미예 사원” 티베트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수행자들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사미예 사원은 이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미에 사원의 중심에 있는 2층의 대전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고, 이 건물의 네 방위에는 4개의 불전이 세워져 있다. 그 부근에 각각 2개의 작은 법당이 있다. 대전의 좌우 양측에 작은 소전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고, 대전의 모서리 부분에 있는 각 탑은 모든 악신과 마귀를 정복하여 천재지변을 제지한다는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을 타원형의 담이 둘러싸고 있다. 사미예 사원의 대전 1층은 티베트 양식으로, 2층은 중국의 한족식으로, 3층은 인도의 건축양식을 결합하여 특별하게 건축되었는데 3층은 최근에 무너져서 없어졌고, 현재는 1층과 2층만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사미예 사원이 모든 티베트 사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의 치쏭 데짼(적송덕찬,赤松德贊) 티베트 왕은 사미예 사원이 완성된 후 인도에서 열두 명의 승려를 불러와서, 귀족 자제 7명에게 머리를 자르게 하고 승려가 되게 하여 사미예 사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들은 “칠각사(七觉士)“ 라 불렀으며, 그들의 출현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또한 티베트의 모든 사원이 이곳을 기초로 지어졌기에 사미에 사원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사미예 사원의 그림과 유물의 가치” 대전의 복도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 차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티베트의 역사와 티베트 불교의 생성과정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공적이 그려져 있다. 티베트 라마교 겔룩파 (황모파)의 창시자인 쫑카파가 불교를 전수하는 과정에서부터 제9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역사는 장장 92m 길이의 벽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이 그림들을 보면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본전 문 앞에는 당나라 양식의 구리종이 걸려있는데, 이 종은 왕족 귀족이 탁발승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조한 것으로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로 만든 종이라 전해진다. 동문의 남쪽에는 유명한 “상예흥불증감비(桑耶兴佛证监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당시의 티베트왕인 치쏭 데짼이 799년 불교를 티벳의 국교로 한다는 내용이 고대 티베트어로 쓰여 있다. 이러한 사미얘 사원은 청나라 시절에 큰 화재로 인해서 서적과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 6대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1996년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지금까지도 계속 보수하고 있는 상태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을 만든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38대 임금인 치송데첸은 국교를 불교로 선포한 왕이다. 그러나 반대가 많았다. 송첸캄포 왕이 불교의 터전을 닦았지만 불교는 왕과 몇몇의 귀족들만 믿는 종교였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토착종교인 본교(苯教)를 믿었다. 그러니 치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본교 사제들과 그들의 엄호 세력인 귀족들은 저항한다. 왕과 본교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왕은 본교를 탄압하고 본교 사제들은 몰래 왕을 저주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에 치송데첸 왕은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사미예 사원을 건설하여 불교를 더욱 확장하려고 했다. 그는 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의 유명한 승려인 샨타라크쉬타를 모셔와 사원을 짓도록 하였으나 본교 귀신들의 방해로 낮에 건축하면 밤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자 샨타라크쉬타는 치송데첸에게 자기의 공덕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으니, 자기의 제자 가운데 귀신을 다스릴 줄 아는 파드마삼바바를 데리고 오기를 부탁하였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로 오자 치송데첸은 많은 금을 갖고 라싸 근교에까지 마중 나갔지만, 파드마삼바바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금을 먼지로 만들었으나 그후 다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문을 외워서 다시 금이 되는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스승인 샨탈크쉬타와 함께 사미예 사원으로 가서, 귀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779년에 사원을 세웠으니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최초로 불교의 진수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졌다. “보드나트에 서린 티베트인들의 전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설화는 더욱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간다. 카시야파 부처(Kasyapa Buddha)는 29개의 부처 중 27번째 부처인 석가모니 부처보다 앞선 부처였다. 카시야파 부처가 입적한 후, 가금류 사육사가 네 아들과 함께 이 위대한 부처의 유골을 이곳에 묻고, 스투파를 짓기로 한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녀는 당시의 왕에게 물소 가죽만 한 땅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것이 작을 것이라고 생각한 왕은 땅을 허락하고 그녀가 부처의 사리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죽을 밧줄처럼 긴 조각으로 잘라서 넓은 지역을 둘러싸는 데 사용해서 지금처럼 크나큰 스투파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그러나 이 스투파 안에는 ‘카시야파 부처’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부처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사리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티베트 분위기에 휩싸인 독특한 풍경” 고대부터 교역로에 있던 카트만두는 티베트인들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긴 여행길에서 보드나트 사원에 들러 기도하고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보드나트 사원을 중심으로 티베트인들이 소박하게 모여 살던 마을이 갑자기 커지게 된다. 1950년대에 티베트가 중국으로부터 탄압받자 난민들은 네팔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보드나트 사원을 중심으로 정착해서 지금 티베트인들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사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티베트인들의 주거지와 상점이 둘러싼 모습은 독특하다. 성스러운 사원과 소박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삶이 경계없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 가면 티베트 불교도들의 순례도 보지만 티베트 상품을 구경하고 티베트 음식 등을 먹을 수 있어서 여행자들은 네팔 안의 티베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네팔의 매력, 보드나트 사원의 매력” 네팔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인도의 힌두교와 티베트의 불교를 받아들여 독특한 네팔식의 건축물, 종교, 생활 방식, 음식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티베트 난민들을 받아들여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공간도 허용했다. 이곳은 인도 다름살라의 티베트 난민촌과는 또 다른 분위기고 접근도 더 쉽다. 네팔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다른 문화들을 포용하면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이것이 네팔의 매력, 특히 보드나트 사원의 매력이다.. 2015년 4월 네팔 지진으로 보드나트 사원 스투파가 심하게 손상되어서 첨탑이 심하게 갈라졌었다. 재건을 시작해서 2016년 11월 22일에 재개장했다. 수리비용은 불교 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의 개인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는데 비용은 210만 달러, 금은 30 kg가 들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내는 입장료도 이들의 문화를 보존하는데 쓰일테니 보시하는 마음으로 낸다면 보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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