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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도시, 체 게바라가 잠든 ’산타 클라라‘

c.unsplash.com/Elizabeth Gottwald

쿠바 중북부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인 산타 클라라(Santa Clara)는 1699년 해적의 습격을 피하여 스페인 사람들이 내륙에 건설한 도시다. 사탕수수, 담배의 집산지인 이곳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것은 이 도시가 쿠바의 혁명을 결정적으로 성공하게 만든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1958년 체 게베라는 카스트로의 혁명군을 이끌고 이곳에서 정부군을 격파했다 훗날 볼리비아에서 죽은 체 게바라는 유해가 송환되어 이곳에 묻혔다.

“산타 클라라라는 도시”

산타클라라(Santa Clara)는 수도 아바나 동쪽 290km 지점에 있다. 쿠바나칸족(族) 인디오가 살고 있었으나 1689년 해적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이주해온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후 스페인 식민지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사탕수수, 잎 담배 재배지역의 중심지로 부근에는 철, 구리, 망간 등의 광업도 발달되어 있다. 이곳에는 도로와 철도가 통과하며 시엔푸에고스까지 철도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산타 클라라 전투”

1958년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 전쟁을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게바라에게 아바나로 가는 길목인 산타클라라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체 게베라는 아르헨티나인이었지만 쿠바의 혁명을 돕기 위해 카스트로와 함께 싸웠다. 수천 명의 군사와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정부군이 산타 클라라를 지키고 있었고 체 게베라는 불과 14명의 전투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에스가블란산에서 게릴라전을 준비하며 지지자들을 모아 400여 명의 군대를 만든 후, 산타클라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이에 놀란 바티스타 독재정권은 대포 등으로 무장한 400여명의 최정예군을 22량의 열차 편으로 급파한다. 이에 어떤 기자가 혁명군 지도자 카스트로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려준다. 카스트로는 즉각 체 게바라에게 이들을 막지 못하면 자신들의 혁명도 끝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막으라고 지시한다. 체 게바라는 지리를 잘 아는 그 지역의 지지자들과 함께 철로에 나와서 불도저로 철로를 몰래 제거해버린 후,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결국 달려오던 정부군 열차는 전복되었고 진압군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혁명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승리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독재자 바티스타는 그날로 해외로 도주하면서 쿠바혁명은 성공했다.

“열차 박물관”

지금 그 현장에는 열차 박물관이 있다. 여러 열차 칸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열차 안에는 당시 전투가 일어났던 현장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철도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된 불도저 사진, 전복된 열차, 노획된 무기들 사진이 있고 승리 후 기관단총을 메고 시가를 문 채 산타클라라 중심가를 걸어가는 체 게바라의 모습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밖에는 그 시절의 불도저가 전시되어 있다. 주변에서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 등의 기념품을 팔고 있다.

“체 게바라 동상과 박물관과 묘”

혁명광장에는 25m짜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있다. 쿠바에서 아바나에 있는 호세 마르티 동상 다음으로 큰 조각이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는 문학가이자 혁명가로 지금도 많은 쿠바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산타 클라라의 커다란 단 위에 체 게바라가 서 있고 동상 하단의 대리석에는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Hasta La Victoria Simpre)’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가 1965년 당시 게릴라전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쿠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동상이 서 있고 그에 대한 기념물들이 매우 인기다. 그런데 쿠바를 오랫동안 지배한 피델 카스트로는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의 동상, 박물관을 만들지 말고 거리, 광장, 연구소 등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 그가 2016년 죽은 후,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체 게바라 동상 뒤쪽에 지하 건물이 있다. 오른쪽은 박물관 왼쪽은 묘다. 이곳은 모든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소지품도 금지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체 게바라에 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묘에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 것보다 큰 체 게바라의 흉상 부조가 자리잡고 있다. 그 좌우로 함께 볼리비아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지 31명의 유해와 흉상이 부조로 설치되어 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의과 대학생으로 대학 시절 오토바이로 남미를 여행하며 목격한 비참한 민중의 삶에 분노하여 혁명가가 된다.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 쿠바 혁명에 합류했다.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그는 혁명이 성공한 후 쿠바 은행장, 농림부 장관 등 요직을 지냈고 1961년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자 소련을 방문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사일 설치를 둘러싼 ‘쿠바 미사일 위기’로 소련이 미사일 설치를 포기하면서 미국에 무릎을 끓자 그는 ‘소련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종주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후, 제3 세계의 해방은 결국 제3 세계 스스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쿠바의 정치를 떠나 다시 게릴라 전사가 되기로 한다. 그는 1965년 피델 카스트로에게 긴 편지를 남긴 후 쿠바를 떠난다. 그가 남긴 편지는 이렇다.

“피델, 나는 쿠바 혁명에 관한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과, 동지들과, 이제는 내 인민이기도 한 당신의 인민들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나의 작은 노력을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쿠바 최고지도자로서의 의무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이 길을 떠납니다. 내가 다른 하늘에서 최후를 맞아야 한다면 나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인민들, 특히 당신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아무런 물질적인 것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행복합니다. 나는 나의 혁명적 열정을 모두 실어 당신을 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콩고로 가서 혁명을 위한 군사 훈련을 지도했으나 실패한 후, 볼리비아의 혁명을 위해 현지에 가서 싸웠으나 볼리비아 혁명 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소규모의 동지들과 함께 싸우다 미국의 CIA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총상을 입고 체포된 후, 다음날 총살되어 죽게 된다.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군부 정권이 무너진 뒤, 체 게바라의 유해는 동지들 중 31명과 함께 1997년 그의 제2의 조국, 쿠바로 보내졌고, 산타바바라에 묻히게 되었다.

“체 게바라가 요즘에도 사랑받는 이유”

쿠바인들은 물론 체 게바라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들의 현실과 관련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혁명, 공산주의, 이념...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대중들 중에도 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럴까?
우선 그의 외모가 매력적이다. 총을 들었지만 시가를 물고 웃는 모습은 매우 지적이고 사랑스럽다. 체 게바라의 생각, 혁명 이념,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멋으로 그의 사진을 모으고, 티셔츠를 입고, 짧고 멋진 글에 심취해 상업적인 ‘이미지’를 사고파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에 대해서 깊이 알아갈수록 그는 속과 겉이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정치 이념을 떠나서 그는 매우 지적이고, 윤리적이며,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말만 올바르게 하면서 실제로는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사이비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혁명의 열매를 뒤로 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 사실이 그의 정치 이념에 동조하건, 안 하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분이다.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진보적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집에 3000권 이상의 책이 있어서 일찍부터 많은 문학가는 물론 카를 마르크스, 부처, 니체, 프로이드에 이르는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특히 글쓰기에 탁월했고 평생(특히 게릴라 활동 중에도) 일기를 썼으며 수영, 축구, 골프, 사이클, 럭비 등에 뛰어났던 만능 운동선수였다. 그러나 대학 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를 여행한 후, 빈부 격차, 인종 차별에 의해 고통받는 민중을 보고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피델 카스트로가 현실 정치인이었다면 체 게바라는 이상적인 혁명가였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그의 말처럼, 그는 그렇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갔다. 그의 언행일치 하는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혁명과 현실”

체 게바라의 박물관에서 혹은 쿠바의 역사 흔적에서 막연하게 감동해도 막상 쿠바의 현실에 부딪히면 사람들의 생각은 복잡해진다. 분명히 혁명 이전의 가난, 억압, 모순에서 탈피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는데 사회는 1958년에 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에 멈춘 것 같다. 낡은 승용차, 낡은 버스, 우마차 등의 낙후한 교통수단은 다른 나라의 수십 년 전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미국의 봉쇄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미국이 모든 것을 쿠바에게 다 개방하면 쿠바 역시 다 개방할 수 있을까? 쿠바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까? 그 순간 미국의 자본에 다 휩쓸리고 혁명 이전의 극심한 빈부격차 현상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져서 폐쇄적으로만 살아갈 수도 없다.
이 딜레마 속에서 쿠바는 ‘관광’이라는 숨통을 틔워 놓고 살아간다. 관광이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는데 쿠바의 가난과 빈곤은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더욱 드러났다. 그렇다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는 형편. 쿠바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가난, 빈곤, 결핍을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을 통해 더 실감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각박하고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던 여행자들은 오히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가난한 쿠바에 와서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물가 싼 나라에 와서 먹고, 마시고 노는 여유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것 만이 아니다. 이런 가난 속에서도 낙천성과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요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편함과 궁색함도 느끼며 사람들은 두가지 감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이런 여행자의 태도는 피상적인 것이지도 모른다. 쿠바인들도 여러 부류가 있고 또 속마음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2021년 7월, 기사를 보면 쿠바의 반정부 시위가 40개 도시에서 일어났다. 27년만의 최대 반정부 시위로 ‘독재 타도, 자유를 달라!’면서 수도 아바나를 위시해서 40개 도시에서 일어났다. 카마퀘이에서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공산당 간부 및 경찰차를 뒤엎기도 했다. 쿠바 정부는 이것이 ‘미국 탓’이라고 비난했다.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을 보면 어떤 정치적 세력이 움직였겠지만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보면 오래된 경제난과 일당 독재에 지쳤다는 점도 분명히 있다. 여행자들의 시선으로는 쿠바를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방문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다. 직접 가서 체험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다른 세계’는 언제나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