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
프랑스 남부에 있는 코르시카(Corsica, 프랑스어로는 코르스, Corse) 섬은 지중해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하나의 산맥이 섬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산악 지형이며 2023년 1월 현재 인구는 약 35만 명이다. 코르시카 섬의 지역 수도는 아작시오(Ajaccio)이고 두 번째로 큰 도시는 오트 코르스(Haute-Corse)현인 바스티아(Bastia)이다. 코르시카섬의 아작시오는 나폴레옹의 생가가 있고 프랑스 최고의 트레킹 코스 GR20이 있어서 많은 여행자들이 오고 있다.
“코르시카의 역사”
코르시카는 프랑스 영토지만 이탈리아 분위기도 많이 남아 있다. 민족적 정서도 프랑스와 다르다. 독립을 원하는 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Corsica)은 프랑스 관리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고 건물을 폭파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코르시카 주지사 클로드 에리냐크(Claude Érignac)를 이반 콜로나(Yvan Colonna)가 살해했고 그가 2022년 3월 감옥에서 살해되자 코르시카에서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무장투쟁보다도 선거를 통하여 독립을 이룩하고자 한다. 코르시카인들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친 자치주의 정당이나 친 독립 정당에 지지를 보냈다. 코르시카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2018년 섬의 씨족 간 혈투와 복수로 인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살인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총기 살인의 가장 흔한 피해자는 저명한 사업가와 지역 시장이므로 여행자들과는 상관없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코르시카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아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코르시카에는 기원전 6천 년 무렵 신석기 시대에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진출했으며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지중해의 강국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 일대에 있던 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를 공격하고 코르시카섬은 로마에 속하게 된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코르시카 섬은 비잔틴 제국(동로마 젝구)에 의해 지배받다가 롬바르드 왕국의 일부가 된다. 그후 11세기에 도시국가 피사와 제노바가 이 섬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내었고 많은 교회를 세운다. 1284년에 제노바와 피사의 전쟁 결과, 피사의 세력은 이 섬에서 물러가고 제노바가 지배한다. 그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6세기에 다시 제노바가 이 섬을 지배하는데 제노바인들은 코르시카 귀족들이 섬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을 하면서 억압했고 해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코르시카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에 성채를 건설했다. 결국 1729년, 농민이 세금 납부를 거부하여 제노바에 대항하는 전면적인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26년간의 투쟁 끝에 1755년 코르시카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제노바는 코르시카에 보복을 가했고, 후에 제노바는 이 섬을 1769년에 프랑스에 매각한다. 이로써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일부가 된다. 코르시카 공화국은 프랑스에도 저항했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된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가 프랑스에 속하던 1769년에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군인으로서 출세하다가 황제가 된다. 이처럼 코르시카는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독립한 적도 있어서 여전히 프랑스를 벗어나 자치나 독립을 원하는 세력들이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차별적인 정책에 대한 저항도 있다. 1880년대에 시작된 프랑스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은 코르시카의 와인과 올리브 오일 수출을 망쳤으며, 고통받던 많은 코르시카 젊은이들은 프랑스 본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코르시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수년 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전했지만 그 바람에 코르시카에서의 농업이 중단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1920년대 A Muvra 신문을 중심으로 프랑스로부터 섬의 자치권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탄생한다. 1930년대에는 이 운동에 동조한 많은 이들은 코르시카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합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역시 코르시카 합병은 이탈리아 통일 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되었지만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되면서 허수아비 비시 프랑스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42년 11월에는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이 이 섬을 점령했지만 1943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이 패배하자 독일군이 물러가면서 프랑스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코르시카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코르시카 문화와 언어에 대해 더 큰 자율성과 보호, 더 나아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아작시오”
코르시카는 이런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갖고 있기에 프랑스 본토와는 다른 기질, 다른 문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코르시카의 섬은 한적하고 풍경이 아름답다. GR 트레킹은 물론 한적한 바닷가의 풍경이 여행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코르시카의 주도 아작시오는 야자나무가 늘어선 대로와 해변 카페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할 수 있으며 도심지의 박물관에서 예술을 엿볼 수 있다. 또 해변가의 무너진 성곽에 앉아 바닷바람을 쐬며 한적함을 즐길 수 있고 해변이나 계곡의 맑은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도 있다. 긴 트레킹을 마치고 오면 연안에 있는 무인도를 방문할 수도 있다. 또한 파스텔 칼러의 집과 카페, 부티크, 바가 줄지어 있는 구시가지의 좁은 길을 따라 거닐다가 나폴레옹이 영세를 받았던 16세기의 성당을 구경할 수도 있으며 근처의 페슈 미술관에 들러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과 조각품을 감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아작시오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코르시카 시골 지역을 관통하는 여러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아작시오 만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다. GR이 아니더라도 도심에서 시작해 ‘능선의 길패스 오브 리지(Path of the Ridges)’를 따라 하이킹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약 11km의 코스다.
“나폴레옹 박물관”
코르시카 섬의 수도 아작시오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태어난 곳답게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공원, 광장 및 대로 곳곳에 그의 동상이 있으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여러 도로들도 있다.
코르시카 섬이 프랑스에 합병되던 해인 1769년 8월 15일에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1779년 그의 나이 10세 때 프랑스의 학교로 가서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코르시카의 방언 때문에 촌놈이라 경멸받는 가운데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잘 알다시피 군인을 거쳐서 공을 세우고 1804년 12월 프랑스의 황제가 된다.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그는 코르시카 사람답게 거칠고 솔직하며 결단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조상의 집인 ‘메종 보나파르트’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오래된 건물이 줄지어 있는 골목길을 통과해야 한다. 박물관 옆, 즉 나폴레옹 생가 옆의 건물은 원래 보나파르트 가문 집의 마굿간 자리였다. 현재 이곳은 나폴레옹 관련된 기념품 가게인데 프랑스의 유명한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을 걸어 놓고 있다. 기념품 가게 안에는 나폴레옹 동상이 있는데 실제보다는 키를 작게 만들어 놓아서 매우 작게 보인다.
나폴레옹의 키는 그 시절로 보았을 때 작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키는 167-168cm, 혹은 170cm로 당시 20대 군인들의 키는 164cm 정도였으니 작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들의 키는 그리 크지 않다. 영국, 독일인들의 키가 큰 편이다.) 나폴레옹 3세의 키가 160cm이어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인들이 적은 도량형을 영국인들이 자기네 식대로 잘못 계산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폴레옹의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총 5개 층이다. 지하실과 1층에서는 18세기 아작시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아작시오 주민들의 사진과 항아리, 맷돌, 등 아작시오 주민들이 사용하던 농기구 등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보나파르트 가족이 주로 사용했던 방들, 화실, 나폴레옹이 태어난 방, 응접실 등이 있고 3층에는 나폴레옹이 전쟁 때 사용했던 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 가문이 이집에 정착한 때는 1682년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증조 할아버지 주세페 보나파르트(Giuseppe Buonaparte)가 이 저택으로 이사 왔고, 나폴레옹의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Carlo Buonaparte)와 마리아 레티지아 라몰리노(Maria Letizia Ramolino) 역시 이곳에 살면서 1769년 8월 15일 나폴레옹과 그 형제들을 낳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섬의 독립운동가 파스퀠라 파올리( Pasquale Paoli)와 함께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들은 당시 코르시카를 지배하던 제노바 공화국(Repubblica di Genova)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769년 제노바 공화국이 섬 전부를 프랑스에 매각해 버리자 파올리는 프랑스에 저항하다 영국으로 망명했고 카를로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정부에 협력해 친 프랑스파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발생하자 파올리는 코르시카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친 프랑스 인사가 된 보나파르트 가문을 탄압한다. 당시 파올리 지지 세력들이 보나파르트 저택에 침입해 물건을 약탈하고 일부를 불태웠다고 한다. 결국 보나파르트 가문은 1793년 코르시카를 떠나야 했다. 1794년 파올리는 영국군과 연합하여 앵글로-코르시카 군대를 만들었고 프랑스군을 섬에서 몰아내 앵글로-코르시카 왕국을 세운다. 그러나 스페인이 전쟁에 참전하자 영국은 1796년에 코르시카에서 철수하면서 파올리의 독립운동은 실패하고 코르시카는 프랑스가 계속 통치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에 오르면서 보나파르트 가문은 다시 보나파르트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 마지막으로 이 집에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1843년 이 집을 상속받았던 나폴레옹의 형제 요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는 이 저택을 1852년 나폴레옹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 물려주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저택을 새로 단장했고 훗날 집은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의 손자이자 나폴레옹 5세로 불렸던 빅토르 나폴레옹(Prince Victor Napoleon)이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저택과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1967년 프랑스 정부는 집 자체를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해 대중들에게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