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의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떤 도시는 이미 많이 가본 것처럼 이미지와 풍경이 떠오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그렇다. 탱고의 발상지인 라 보카(La Boca) 지역,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진 그림같은 ‘원색의 거리’, ‘카미니토(Caminito) 거리,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1997년 작 ‘해피 투게더’에 나오던 뒷골목의 풍경이 어우러지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현실보다는 문화, 예술, 영화 속의 도시처럼 다가온다.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La Boca) 지역”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탱고의 발생지로 알려졌지만 기원이나 변천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보니 설에 머무는데 대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변의 선착장, 라보카 바리오에서 나타났다고 본다. 그 항구를 드나들던 선원들이 1800년대 쿠바섬에서 유행하던 2/4박자의 가요조의 음악 하바네라를 전하였고, 거기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몬테비데오의 거리에서 연주되고 춤추던 칸돔베가 합하여져서 밀롱가가 파생하였는데 그 밀롱가의 변형된 음악이 탱고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세계적인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건너가 유행하고, 까를로스 가르델이 대중문화로 끄게 꽃을 피웠다. 그 탱고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건너와 발전하면서 피아졸라 등의 노력으로 오늘날 탱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준 높은 탱고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탱고 음악을 바탕으로 한 춤이 발전했다. 부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일을 끝낸 후,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해 탱고춤을 추면서 널리 퍼졌다.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본능적인 춤’이었기에 직설적인 유혹의 몸짓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후 탱고 음악과 춤은 20세기 들어 여러 음악, 문학 무용가들의 노력에 의해 남미를 대표하는 예술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라 보카 지구에서는 거리 곳곳의 식당 사이에서 탱고 공연을 하고 있다. 굳이 탱고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식당, 길거리, 광장, 공원 등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산텔모 시장, 도레고 광장, 플로리다 거리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에게 탱고는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수준 높은 탱고춤을 보고 싶다면 공연장이나 유명한 카페, 클럽 등으로 가면 된다.
라보카(La Boca)지구는 탱고와 함께 ‘원색의 거리’로 알려진 카미니토(Caminito) 거리로도 유명하다 가옥에 다채로운 원색을 칠해 알록달록 꾸며놓은 그림 같은 골목길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녹색 등 원색 계열의 색깔들이 건물 곳곳에 칠해져 있어서 관광객들이 눈길을 잡아 끈다.
“남미의 파리”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 전역에서 손꼽히는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시내에 있는 콜론 극장(Teatro Colón)은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클래식 음악 공연장이며, 세계 정상급 음악인들의 연주회와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진다. 시내 곳곳에는 유럽의 건축 양식이 남아메리카식으로 발전되어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 많이 보인다. 카사로사다, 콜론 극장, 대성당 등은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고 원색 페인트로 칠한 라보카의 집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고유의 독특한 모습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돌아보기”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남미 대부분의 도시처럼 스페인의 식민지 수도로 발달한 계획도시로 아르헨티나의 인구 3분의 1인 1300만 명이 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러 개의 광장이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5월 광장(Plaza de Mayo)이다. 1810년 5월 25일은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한 날로 18세기초 아르헨티나 독립의 시발점이 된 5월 혁명을 비롯한 주요 사건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광장에 우뚝 선 기마상의 주인공은 독립운동의 영웅 마누엘벨 그라노 장군이다. 광장 주위에는 대통령궁 카사로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등 주요 명소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통령궁은 과거 에바 페론이 테라스에 나와서 국민을 설득하던 곳이고, 동남쪽으로는 탱고의 발상지로 알려진 라보카 지구가 있다. 레콜라타 지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역대 브라질 대통령 13명과 아르헨티나의 독립 영웅, 노벨상 수상자, 작가 등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공동 묘지(Recoleta Cemetery)가 있다. 이 곳의 4700여개의 묘지들은 아름답고 예술적인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70개의 묘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묘지 중에 페론 전 대통령의 부인인 에바페론의 묘가 가장 눈길을 끈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퍼스트 레이디답게 늘 많은 조문객이 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 불리는 7월 9일 거리(Avenida 9 de Julio)는 도로 폭이 140m에 달하는 거리다. 7월 9일은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 1816년 7월 9일을 의미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
스페인 정복 이전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팜파스 대평원의 일부로 나무가 없이 풀로 뒤덮인 곳으로 사냥과 낚시를 하던 원주민의 땅이었다. 이런 땅에 1516년 1월, 리오 데 라 플라타에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íaz de Solís) 원정대가 도착했으나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후, 1536년 2월 2일 페드로 데 멘도사가 이끄는 원정대가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남쪽 해안에 상륙해서 부엔 아이레 산타마리아 항구(Puerto de Nuestra Señora Santa María del Buen Aire)를 설립했다. 첫 정착지는 오늘날 도시 중심의 남쪽에 위치한 산텔모(Santelmo) 지구였다. 멘도사가 설립한 이 도시는 전략적 요새였다. 2m 높이의 성벽을 쌓고 성벽 주변으로 해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굶주림, 질병, 자원의 부족, 원주민의 공격으로 5년 만에 식민지 건설을 포기하고 떠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한동안 방치된 상태로 남았다. 1580년 6월 11 후안 데 가라이(Juande Garay)가 이끄는 원정대가 아순시온에서 파라나강을 통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진입했고, 성 삼위(Santísima Trinidad)라고 명명하며 도시를 재건했다. 즉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페드로 데 멘도사가 한 번, 그리고 후안 데 가라이가 한 번,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설립되었다.
이후 2세기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완만한 속도로 성장했다. 18세기 중반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약 2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로 번성했다. 그리고 1780년과 1800년 사이에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으며 주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사람들의 이민이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상인과 소수의 목장주였으며 신분제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었다. 또한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선호하여 문화발전을 촉진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이후 스페인에서 발생한 권력 공백을 이용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의회는 1810년 5월 25일 독립을 선언했고 1816년 7월 9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임시정부로 지정됐다. 지방의 연방주의자들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앙 집권주의자들 간의 오랜 내전이 있었으나 1962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을 병합하는 형태로 국가통합을 이루면서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출범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기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12월에서 3월까지가 여름이며 여름 날씨는 평균 약 28°C로 덥고 습하다. 봄과 가을은 아침과 저녁의 기온 차가 크고 변화무쌍하다. 겨울은 6월부터 9월까지로 날씨는 온화하지만 습하며 평균 기온은 약 11°C이다.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 강우량은 약 1,140mm이다. 여름에는 강한 돌풍과 우박을 동반한 강력한 뇌우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