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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도들의 성지, 황금 사원이 있는 암리차르

c.unsplash.com/Sean Robertson

인도 북서부 펀자브 주의 암리차르(Amritsar)는 지금까지 접해온 인도 힌두문화와 다른 시크교도들의 성지로 독특한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인도에는 수많은 종교와 문화가 혼재하는 곳이지만 시크교도들의 종교와 문화를 접하려면 암리차르로 와야 한다. 이곳에는 그들의 ‘황금사원’이 있고 시크교도들의 문화와 관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또한 파키스탄과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국기 하강식은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다.

“시크교도들의 성지 암리차르(Amritsar)”
인도 북서부 펀자브(Punjab)주에는 암리차르(Amritsar)란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시크교의 4대 구루(Guru, 지도자)인 람 다스(Ram Das)에 의해 1577년에 건설되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상하게도 시크교도들의 골격은 엄청나게 크다. 시크교도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코는 주먹 만하고 주먹은 아이 머리 만하며 어깨는 철판 같고 다리는 무쇠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인도에는 약 1800만 명의 시크교도들이 있는데, 그 근거지가 바로 펀자브주이며 암리차르는 그들의 성지다. 구루(빛을 주는 스승) 나낙이 16세기 초에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초월하고 통합하고자 시크교를 만들었는데 하나의 신을 믿으며 우상숭배에 반대한다. 시크교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여성 차별 철폐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취하여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크교는 무굴 제국 치하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할 때 인구 이동이 있었는데 파키스탄 쪽에 살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인도로 오고, 인도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약 100만명이 이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약 25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었다. 국경도시인 암리차르와 시크교도들도 그 사태를 비켜갈 수 없었다. 결국 파키스탄에서 살던 시크교도들은 인도의 암리차르로 와서 정착했다.

“아름다운 시크교도들의 황금사원”
암리차르에는 시크교도들의 자랑인 ‘황금사원’이 있다. 인공 호수 한 가운데 있고 지붕이 황금으로 빛나서 신비롭고 장엄해 보인다. 원래 이름은 ‘하르만디르 사히브’(신의 집이라는 뜻)지만 ‘황금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출입구가 동서남북으로 다 나 있다. 모든 종교, 인종, 카스트에 관계없이 평등과 관용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157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04년, 구루 아르잔 데브가 완공하였다. 1802년에 사원의 지붕이 약 400㎏의 황금으로 뒤덮인 이후부터 황금사원이라 불리고 있다.
황금사원의 입구로 들어가면, 인공호수 중앙에 황금 사원이 보인다. 주변은 대리석 길로 둘러싸여 있다. 시크교도들은 사원에서 들어오자마자 호숫가에서 황금 사원을 향해 절과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기도 한다. 일반 여행자들도 들어갈 수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긴 다리를 건너 황금 사원으로 향한다. 사원 내부에는 역대 구루들을 기념하는 성소가 있고 보석이 박힌 단에는 시크교 경전이 새겨져 있다. 이런 사원을 더욱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시크교도들의 믿음과 시크교 경전 낭독 소리다.
시크교도들은 수많은 탄압과 저항 속에서 강건한 조직과 독특한 계율을 갖게 된다. 이들에게는 케쉬(자르지 않는 머리·깊은 신앙심을 의미), 캉가(나무 혹은 상아로 만든 빗·청결을 의미), 쿠차(반바지·경계를 의미), 카라(쇠로 만든 팔찌·결단을 의미), 키르판(칼·방어를 의미) 등 케이(K)로 시작되는 5가지의 계율이 있다. 현재도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은 케쉬로, 이들은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를 터번으로 감추고 있다. 이 때문에 흔히 시크교도를 생각하면 터번을 연상하는데 시크교도들은 기계를 잘 다루고 용감무쌍해서 군인, 운전사, 경비원들이 많다.

“시크교도들의 저항과 탄압”
지금 황금 사원과 암리차르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이곳은 한때 유혈이 낭자한 현장이었다. 황금사원 근처의 잘리안왈라 공원에서 1919년 4월 13일 1만여 명의 인도인들이 모여 영국의 공공집회 금지 명령에 저항하여 평화적인 집회를 했다. 그러나 영국의 다이어 장군과 그의 휘하 구르카 소총 부대는 그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영국은 39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인도인들은 8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피해자의 다수는 이 도시에 주로 살고 있던 시크교도들이었다. 영국의 다이어 장군은 암리차르에서 영국인이 5명이 살해되고 영국인 선교사 셔우드 양이 공격당하자, 이 도시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학살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져 나가면서 영국은 도덕성을 잃게 되었고 영국에 협력하려던 온건파 중산층들이 반영 민족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나 있는 벽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날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사원의 비극은 근래에도 있었다.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을 원하며 1980년대 초부터 무장투쟁을 벌인 시크교도 강경파들은 황금 사원을 장악한 후 항거했다. 이에 1984년 그 당시 여자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는 군대를 동원해 시크교도를 제압했고 그 보복으로 인디라 간디 총리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간디 총리를 암살하고 만다. 그후,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암리차르는 한때 여행하기 힘든 곳이었지만 지금은 평화로운 곳이다.

“빈민 구제 사업”
시크교도들은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을 찾아온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그들은 빈민구제사업을 많이 벌이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푸는 보시를 많이 하는데, 황금 사원의 경내에는 구루 카 랑카라는 매우 큰 식당이 있다. 하루에 5만여 명 정도가 이용한다는데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여행자들도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다. 식판 하나를 갖고 앉아 있으면 사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음식을 나눠 준다. 밀개떡인 ‘차파티’와 콩수프인 ‘달’ 그리고 망고 장아찌 등 간단한 음식인데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준다. 음식을 받을 때는 모두 두 손으로 받고 경건한 표정을 짓는다. 시크교도 중에는 성공한 비즈니스맨들이 많은데, 그들이 고향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암리차르는 다른 도시에 비해 발전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도록 황금 사원에 헌금도 두둑이 내고 있다.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낙은 평생 헐벗은 채로 탁발 수행을 하며 얻어먹었기에 배고픔이 어떤 것임을 잘 알았다. 얻어먹고 또 보시하는 경험 속에서 베풂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 같은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국경선에서의 경쟁적인 국기 하강식”
암리차르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와가보더(Wagah Border)’라는 국경지역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국기 하강식이 진행되는 오후 5시쯤부터 진풍경이 벌어진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군인들은 상대편보다 더 멋진 국기 하강식을 연출하기 위해 경쟁하고, 구경 온 양국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응원하고 사기를 북돋운다. 국경선의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라 양측 군인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화려한 복장을 한 군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행진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식을 벌이며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하지만 외국인 여행자들로서는 양국 국민들이 흥분해서 응원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 ‘퍼포먼스’하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을 하며 한껏 흥을 돋군다.
히마찰프라데시주의 다람살라나 마날리를 여행한 사람들은 펀자브주로 와서 이곳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뉴델리에서 암리차르까지는 기차로 약 8시간 정도 걸린다. 암리차르에서 와가보더를 넘어서 파키스탄으로 갈 수도 있다. 와가보더의 국기하강식을 보려면 차를 대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