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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영생을 원했던 이들의 왕국이 있던 곳, 룩소르

기원전 3000년경부터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한 기원전 30년까지 약 3000년간 지속되었던 이집트 문명은 인류에게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그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고왕국 시대(기원전 2650년∼2180년) 때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이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신왕국 시대(기원전 1570년∼1069년)였다. 신왕국의 수도는 테베로, 현재의 룩소르를 말한다.

“룩소르, 나일강의 동편은 산 자들의 세계”

룩소르의 나일강 동편은 산 자들의 세계로, 예나 지금이나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다. 반면 해가 지는 서쪽의 황량한 계곡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수많은 파라오(이집트의 지배자)들의 무덤이 있어서 ‘왕가의 계곡’이라 불린다. 동쪽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카르나크 신전이다. 이곳은 룩소르의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 이래 역대 파라오들이 새로운 건축물을 계속 추가했다.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늘어서 있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아몬 라 신을 모시는 거대한 대신전과 대열주실이 나타난다. 둘레 15m, 높이 23m나 되는 거대한 기둥들이 134개가 들어선 대열주실에서는 누구나 까마득한 기둥을 쳐다보며 위대한 이집트 문명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몬신은 원래 테베 지방의 사람들이 믿는 지방신으로 테베가 이집트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가 신으로 등장하고, 후일 태양신 라신과 합쳐지면서 아몬 라 신이 된다. 나일 강변의 룩소르 신전도 역시 아몬 라 신을 모신 곳으로, 왼쪽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오른쪽에 있던 것은 현재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 계속 들어가면 거대한 람세스 2세(기원전 1279년∼1212년)의 좌상과 입상이 나타난다. 그는 나이 30세에 파라오에 즉위하여 67년간 이집트를 지배하며 대외 전쟁을 많이 치른 이집트의 위대한 왕이었다. 이곳은 삶의 열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신전에 모여들어 신을 찬양하고 의식을 치뤘으며 축제를 벌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짓이었다.

“룩소르 서편은 죽은 자들의 세계”

배를 타고 나일강의 서편으로 건너가면 제일 먼저 높이가 20m인 거대한 석상 두 개를 보게 된다. 원래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신전의 입구에 세워졌었는데 정작 신전은 사라지고 석상만 남았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그리스의 영웅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렀다. 새벽이면 거대한 석상들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죽은 멤논이 자신의 어머니인 여명의 여신 에오스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석상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진동 소리라고 한다.
이 근처에는 하트셉수트 장제전(葬祭殿)도 있다.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스 1세의 딸로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다. 이집트 왕실은 피를 보존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해왔고, 또 왕가의 남자들은 왕가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파라오의 위치에 오를 자격을 얻었는데, 친오빠나 남동생이 없었던 그녀는 이복동생인 투트모세스 2세와 결혼하지만, 남편이 일찍 죽자 이번에는 투트모세스 2세와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인 투트모세스 3세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하트셉수트는 어린 남편이며 아들뻘이었던 투트모세스 3세를 몰아내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가 후일 투트모세스 3세에게 쫓겨나 죽게 되는 비운의 여자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위로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계곡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왕가의 무덤들은 바로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위에 흩어져 있었다. 위로 올라와 언덕에 서서 바라보면 달나라처럼 암반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계곡이 펼쳐진다. 파라오들이 죽은 후 스스로 미라가 되어 부활을 꿈꾼 곳이었지만 거의 모두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 진 곳이다.
무덤 안은 경사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공기가 탁하고 매우 무더워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벽 양쪽에는 많은 부조와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장례식 광경, 저승 사자가 배를 타고 저승으로 망자를 안내하는 모습 등 저 세상의 풍경들이 묘사되어 있다.

미라는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날카로운 돌로 시신의 옆구리를 자른 후 심장만 남겨 놓고 모든 장기를 끄집어낸다. 약품 처리를 한 후, 옆구리를 꿰맸고 뇌는 콧구멍으로 가늘고 긴 갈고리를 넣어 끄집어 냈다. 그후 시신을 나트륨 속에 넣어 보존했는데 전 과정이 70일이 걸렸다. 그 시신을 꺼낸 후 붕대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은 후, 항아리 네 개에는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빼낸 간, 폐, 위장과 내장을 담았다. 시신을 돌려받은 가족들은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무관에 그것을 넣고 단단히 봉한 후, 무덤에 모형 배도 함께 매장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배가 죽은 사람을 사후 세계로 운송한다고 믿었다.
지금 그런 유물들을 현장에서 볼 수는 없다. 모든 유물들이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았던 것은 제18왕조 투탕카문의 무덤이었다. 1922년 11월 27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이묘가 파헤쳐지는 순간 호화로운 금박 장식의 나무관, 순금으로 만든 동물 머리 등 수많은 보물들과 함께 푸른 유리띠 무늬를 덧붙인 황금마스크를 쓴 투탕카문이 약 3300년 전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투탕카문의 무덤은 현재 텅빈 관 하나만 남겨져 있고 보물들은 모두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투탕카문은 14세에 파라오가 된 후 19세에 죽은 실권없던 군주였다. 그의 얼굴에서 칼자국이 발견되어 어쩌면 쿠테타에 의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그는 죽고 나서 소홀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너무도 허술한 곳에 묻혀지는 바람에 오히려 도굴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무덤을 파헤친 일행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가자 투탕카문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무덤 안에 있던 박테리아균 때문이었다.

“룩소르를 여행한다 함은, 인류 고문명의 세계를 보는 것”

룩소르의 동편과 서편을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감동한다. 멋진 풍경을 보아서도 아니고 즐거워서도 아니다. 거대한 석조 기둥, 삭막한 사막, 뜨거운 햇볕 그리고 죽음의 흔적 앞에서 몸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이 있다. 수천 년 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올라와 무덤 속을 다니며 그 흔적을 더듬는 것은 이집트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룩소르만큼 고대 문명의 흔적이 다양하게 남아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룩소르는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볼 만한 가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