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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원폭 투하를 경험했던 히로시마

c.unsplash.com/Rap Dela Rea

히로시마는 세계 최초로 원폭의 피해를 받은 도시로 유명하다. 물론 이 도시에도 히로시마 성과 슈케이엔 정원처럼 아름다운 역사적 유적지가 있고 근교 미야지마 섬 근처의 이쓰쿠시마 신사도 있지만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은 1945년 원자 폭탄 투하의 참상과 피해를 기리기 위한 평화기념 공원이다. 그곳을 돌아보며 그 시절의 비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은 히로시마시의 중심부에 있는 광대한 공원으로 1945년 8월 6일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 ‘리틀 보이’가 투하된 지역에 건설된 공원이다. 평화기념공원(平和記念公園)은 원폭돔과 평화기념관 그리고 위령탑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인 피해자를 추모하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도 있다. 그리고 원폭을 맞았을 때,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피난 가는 동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 공원의 주제는 평화다. 그 시절 원폭 투하를 당했을 때의 현장과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미래를 향한 평화의 염원을 표현한 공원이다,
그 시절에는 비참한 현장이었지만 지금은 평화스러운 공원이다. 그러나 원폭이 투하된 아침 8시 15분에 맞춰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차임벨이 매일 1분 동안 울린다. 지금 이곳은 방사능 위험은 없다. 물론 처음 폭격 이후 한동안 암 발병률이 타 지역에 대비해서 상당히 높았지만 현재는 히로시마에 남아 있는 방사능의 양은 어디나 자연 속에 있는 자연 방사능 수준으로 인체에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한다.

“최초로 원폭 투하가 된 폭심지와 잔해가 남은 원폭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과 그 후폭풍인 화염때문에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건물의 일부인 돔이 그대로 처참한 폐허가 되어 남아 있는데 그것은 히로시마현 상업전시관(広島県物産陳列館)의 잔해다. 그 폐허를 현재 ‘원폭 돔’이라 부르고 있다. 원래 미군의 투하 조준 지점은 기념관 오른편의 T자형 다리였다고 한다. 이 원폭돔이 남은 것은 원자폭탄이 터진 지점이 바로 이 건물 위여서 그 충격파를 측면이 아닌 수직 방향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심부는 남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주변 건물은 다 무너졌다.
히로시마현의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건물은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며,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는 원폭 돔을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이 195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설계, 조성되었으며, 공원 안에 있는 평화기념 전시관 역시 1955년에 문을 열었다. 1952년 이후로 이 공원은 매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을 열고 있다.

“평화기념관 ”
평화공원에 오면 누구나 다 평화기념관(広島平和記念資料館)을 들른다. 그곳에는 원자폭탄에 관한 많은 기록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폭 전의 히로시마와 피폭 후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투하되기까지의 과정, 갖가지 피폭자의 사연, 피폭자의 집, 혹은 사망 위치 근처에서 나온 옷가지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재건 사업과 함께 어린이들이 접은 종이학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피폭을 입은 어린이 사다코가 종이학을 만들다가 죽은 후, 사다코의 천 마리 종이학은 평화와 반전 반핵의 상징이 되었다. 그 외에도 비참하게 죽어간 어린이들의 사연이 있어서 가슴 아프게 한다.

“위령비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당연히 평화기념 공원 안에는 그 당시 숨져간 일본인들의 위령비가 있다. 거기에 한국인들은 빠져 있었다. 한국 측에서도 한국인 위령비를 1970년에 세웠는데 원폭기념 공원 바깥쪽에 있었다. 히로시마 시당국에서 안쪽으로 옯겨 오는 것을 제한했었다. 이들의 의도적인 방해와 남북한간의 문제 때문에 질질 끌다가 1999년이 되어서야 공원 안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들어오게 되었다.

“논란들”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 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반대했었다. 일본이 범한 전쟁 책임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화기념관 전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 전시관에는 일본이 원폭 투하 당시 피해받았던 사실, 비참함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전시했지만 왜 그 전쟁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사실,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실이 전혀 없다. 일본인들은 그 기념관이 원폭투하와 그에 따른 피해를 알리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라고 항변하지만 적어도 그 전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없기에 즉, 독일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기에, 그 기념관의 전시물만 보면 어느샌가 일본은 억울한 전쟁 피해자가 되고 세계 평화의 수호자가 되고, 예전에도 마치 수호자였던 인상을 주면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그들은 침략 전쟁을 하였고, 미국에 대한 진주만 폭격도 기습적으로 먼저 했었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우선 가해자였다. 방명록에 보면 미국을 싫어하는 중동, 아랍 지역 혹은 세계 각지의 평화주의자들은 미국 성토 일변도지만 가끔은 ’누가 먼저 진주만을 폭격했는가? 일본이 침략 전쟁을 먼저 일으킨 당사자 아닌가?‘라는 글도 보인다. 2005년에 히로시마 원폭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표와 당시 버섯구름을 찍은 해롤드 애그뉴 박사와의 면담이 있었는데 생존자 대표들은 민간인 집단에게 핵을 떨군 것으로 인해 많은 이웃들이 죽었으며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해롤드는 이를 거부하며 “나도 당신들이 벌인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많은 친구를 잃었다. 만약 사과를 요구한다면 당신 나라 군대 일본제국군에게 사과를 요구하라"라고 발언했다 한다.
원폭 피해자의 가족의 원통한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복잡하게 전개가 된다. 일본군에 의해 인생이 망가지고 죽어간 한국인, 중국인 그 외의 아시아인들을 생각하면 과연 일본인들만이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적 시각이 당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책임, 천황의 책임까지 거론할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원폭‘을 사용했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시절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일본인들이 전원 옥쇄하여 죽겠다는 시절이었으므로, 원폭 투하가 오히려 일본인과 미군의 인명 피해를 줄였다는 의견도 있다.
히로시마의 평화기념 공원에 오면 이미 약 80년이 지나깄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서에서 읽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다가도 현장에 오면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