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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역사적 유적지를 간직한 평양

unsplash.com/ Micha Brändli

평양은 현재 북한의 수도로서 우리가 자유롭게 갈 수 없다. 예전에는 교류의 차원에서 관광을 했지만 자유로운 여행은 아니었다. 훗날, 대한민국 주도의 완전한 통일 후, 혹은 북한 체제가 변해서 서로 자유로운 교류를 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 북한에 대한 여행정보를 다룬다. 현재의 여행 정보가 아니라 역사, 문화 위주로 다룬다.

“서울에서 대구, 부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
평양은 서울에서 철도로 약 260km 거리에 있으니 통일이 되어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에서 대구, 광주, 부산보다 더 가까운 곳이다. 현재 평양은 본 평양, 서 평양, 동 평양, 남 평양으로 구분되어 있다. 본 평양은 대동강 북안의 전통적인 평양 중심지를 말한다. 동 평양은 일제강점기 대동강 동안에 형성된 시가지다. 경치가 좋은 곳이라 대성산에 대성산 혁명 열사릉이 있고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금수산 태양 궁전도 이곳에 있다. 현재 개발되었다는 려명거리도 이곳에 있다. 남 평양은 충성의 다리를 통해 연결되는 대동강 남안의 시가지를 말한다. 서 평양은 보통강 서쪽의 광복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가지며, 만경대도 이곳에 있다. 북한도 대동강 강북이 구시가지고 강남은 신시가지인데 개발이 덜 되고, 또 개발하고자 했지만 진척이 잘 안되어서 강북이 강남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역사적인 도시 평양”
평양은 역사적인 도시다. 약 기원전 3세기(고조선, BC 194년 이전)에 건설되어 경주(신라, BC 57년), 서울(백제, BC 18년)보다 약 200여 년 더 앞서 건설되었다. 그후 고구려 후기의 수도였으며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중시하였던 도시다. 그러므로 평양에는 역사 유적지가 많다.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고려 시대 유적이 많고, 단군 왕검을 모시는 단군릉도 있다. 물론 한반도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북한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서 역사 날조에 대한 비판도 있다. 6, 25 한국 전쟁시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은 초토화되었기에 근교 왕릉급 무덤 정도 외에는 근래에 와서 다 재건된 것이다.

“북한의 국보 1호인 평양성”
학설에 따라 다르지만, 북한에서는 평양성을 고조선의 첫 수도였던 곳으로 믿고 있고 또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이다. 평양성은 북한의 국보 1호다. 평양성에는 보통문, 대동문, 을밀대, 모란봉 등이 있는데 평양성의 성문인 보통문은 북한의 국보 2호다. 대동문은 조선 전기 평양성 내성의 동쪽 성문이며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에 세워진 정자다. '을밀대'란 이름에 관해서는 설이 두가지다. '을밀 선녀'가 이곳의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과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켜 싸웠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숙종 40년(1714)에 보수한 것이다. 이곳은 평양팔경'의 하나로서 '을밀대의 봄놀이'가 꼽힐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모란봉은 평양시 기림리 금수산(錦繡山)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가 96m다. 생김새가 피어나는 모란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는 모란봉 아래 대동강에 있는 섬 능라도(綾羅島)가 보인다. 모란봉에는 다양한 침엽수, 활엽수들이 있고 철새들이 날아드는 아름다운 곳이다.
예로부터 평양의 아름다운 곳은 거의 절반이 모란봉에 집중되어 있었고 고구려 이래의 성문 등 고적들이 많다. 을밀대는 모란봉 중턱에 있다. 그 외에도 평양에는 선사시대 유물,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앞으로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다닌다면 볼거리들이 수없이 많은 곳이다.

“논란이 있는 단군릉”
단군릉 발견은 해방 후 북한 고고학계에서 최대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고고학자들은 단군릉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평양에서 단군의 뼈를 발견했다고 처음 발표한 것이 1993년이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북한편)’에 보면 북한 학자들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전해오는 작은 무덤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제 때 그 릉이 파괴되자 분개한 평양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단군릉 묘비를 세웠지만 북한 역사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었다. 단군릉은 고구려식 무덤이고, 단군의 고조선은 랴오뚱 성에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평양에 있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 논쟁을 하던 차에 김일성이 발굴을 하라 해서 발굴해보니 두 사람의 뼈가 나왔는데 검사를 해보니 약 5천년 전의 사람 뼈였다. 북한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단군과 그 부인의 뼈라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무덤 양식이 고구려식의 반 지하의 외칸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왔던 유물도 고구려식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고구려 사람의 무덤이라고 판단되었지만 북한 학자들은 그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단군릉을 손보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주장을 했고, 그후, 김일성은 단군릉을 개건해 민족의 시조로 모시라는 교시를 내려 현재 장대한 단군릉을 만들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발표했다.
남한의 학자들은 단군릉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었는데 그 안에서 나온 뼈는 5천년 전의 것이기에 단군릉으로 삼는 과정에서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또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단군은 랴오뚱 성에 있었다고 믿어 왔다. 이것을 개건한 시기가 소련이 멸망한 후에 북한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무너지자 기댈 곳이 없어진 북한 정권이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무렵에 뜬금없이 단군릉을 웅장하게 개건한 것이다. 즉 북한 정권의 생존과 한반도 이니시어티브를 쥐기 위해서는 ‘민족’을 내세워야 했기에 이런 정치적 목적에서 김일성이 교시를 내린 것으로 보는 비판적 의견이 강하다. 아무래도 폐쇄적인 사회고 학자들의 양심을 떠나 모든 것이 정치 우선인 북한 사회다 보니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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