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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유적지가 풍성한 역사적 도시, 개성

c.unsplash.com/Raimond Klavins

개성은 고려시대의 수도로 예전에는 송도(松都)라 불렸다. 고려 태조(王建, 재위 918~943)는 즉위한 다음 해에 철원(鐵原)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주(開州)라 칭하다가 나중에 개성(開城)으로 명칭을 고쳤다. 고려(918-1392)의 멸망 때까지 국도(國都)로서 번영했기에 474년간 수도였던 개성에는 고려시대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한국 전쟁 이전까지 남한에 속해 있던 이 도시는 현재 휴전선 이북에 있어서 우리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먼훗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면 북한 땅에서 개성만큼 매력적인 도시는 없을 것이다.

“역사 깊은 도시 개성”
개성은 처음에 백제의 영토였을 때는 청목령(靑木嶺)이라고 불렸고,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을 때는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불렸다. 통일신라 시대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군(松岳郡)으로 불리다가 고려의 수도가 되면서 개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개성은 왕씨 일가의 본거지였고 고려 시대 동안 계속 수도였으며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조선의 수도이기도 했다. 한양으로 천도한 후, 5년만에 다시 개성으로 수도가 옮겨져 개성은 1399년에서 1405년까지 조선의 수도 역할을 했지만 한양으로 다시 재천도한 후, 개성은 조선 시대에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상실했다. 다만 개성은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성 상인이 유명했다. 해방 후, 38도 이남에 있는 개성은 미 군정지역이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후, 개성은 휴전선 이북에 속하게 되었다. 한때 개성 공단이 생기면서 한국과 교류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단절된 상태다.

“한국과 교류가 많았던 개성”
개성은 개성관광(2007~2008)이 시행되면서 개성 공단도 설치되었었다. 이로 인해 한국과 교류가 많은 지역이었으나 2016년부터 중단된 상태다. 2018년 4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 지역에 설치되었지만 2020년 6월, 북한은 사무소를 폭파해버렸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개성은 서울과 매우 가깝다. 서울에서 평택까지보다 개성이 더 가깝다. 문산에서 기차로 6정거장만 더 가면 개성역이 나오고, 대한민국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 마을에서 개성시까지의 거리도 9km밖에 안 된다. 통일 후에 전철이나 고속철도가 뚫리면 개성은 너무도 가까운 곳이 된다.

“개성의 역사적 유적지들”
개성 주변에는 산들이 많이 있다. 북쪽에 제석산(帝釋山), 천마산(天馬山), 두석산이, 중앙에 송악산(松岳山), 남쪽에 진봉산(進鳳山)과 용수산(龍岫山)이 있다. 송악산 서쪽에는 만수산이 있는데 특히 개성 시가지 주위에 있는 송악산에는 소나무가 많아 개성을 송도(松都)라고도 불렀다. 약 500년간 고려, 조선 시대의 수도였던 곳이기에 개성에는 엄청난 역사적 유적지들도 많다. 통일이 되면 가장 뜰 만한 곳이 개성이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 백제의 수도는 부여, 고려의 수도는 개성 아닌가?
현재 개성에는 고려 시대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고려 시대 궁궐터인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죽임을 당했던 선죽교, 정몽주의 충절을 기념하는 비각인 표충비, 왕건 왕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 등 12개 유적군이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평양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이다. 그리고 교외에는 고려 태조 왕건릉과 흥왕사지, 대흥산성, 박연 폭포 등 명승고적들이 많다. 이곳에는 고려만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유적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옛집인 목청전, 조신 사대 때 잠시 개경으로 환도했을 때 왕궁으로 쓰이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은 경덕궁 터도 있다. 통일이 된다면 서울 가까이에 있는 개성은 교통으로 보나 역사적 가치로나 크게 세계적으로 알려질 도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