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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이후 뜨는 북극권 크루즈 북서항로(North West Passage)여행

북서항로(North West Passage)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즉 캐나다에 속하는 북극 섬들이 있는 북극해를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가는 항로다. 북서항로는 7월과 9월 사이에 배가 통과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얼음 때문에 통행이 불가하다. 이 북서항로를 다니는 북극권 크루즈 여행이 코로나 시대 이후 뜨는 여행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코로나 이후 주목받을 여행, 북극권 북서항로 크루즈 여행”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인 2016년 3월 20일,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지 보도에 의하면 2016년 여름에 900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는 대형 호화 유람선 ‘크리스털 세레니티호’가 북서항로(North West Passage) 항해에 나설 예정이었다. 북서항로는 유럽에서 북극권의 얼음과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해안을 거쳐서 태평양으로 나오는 항로다. 이 유람선은 알래스카 만에서 출발해 북극해의 보퍼트 해(Beaufort Sea)를 지나 그린란드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예전에는 북극의 얼음 때문헤 항해가 곤란했지만 현재는 지구 온난화로 북극해 얼음 두께가 얇아지면서 이미 크리스털 세레니티 호보다 작은 선박들은 북서항로를 항해했었다고 한다.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항해가 점점 쉬워지고 있었는데 2019년말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서 중단되었었다.
하지만 2020년년 9월,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업계 전문가들과 함께 여행지, 호텔, 항공편, 공항, 수하물 등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해 발표했는데 코로나19 이후 해외여행은 유럽이나 대도시보다도 알래스카나 북서항로(North West Passage) 크루즈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동물이 멸종하고 현재의 얼음에 뒤덮인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현재의 대자연을 보고 싶어하는 수요가 많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북극의 얼음이 가로막는 험난한 북서항로(North West Passage)”
유럽인들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세기 동안 유럽 탐험가들은 아시아로 향하는 무역로를 개척해왔다. 그러나 마젤란해협과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중국과 인도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했다. 그래서 북극권을 통과해서 아시아로 가는 북서항로를 발견하려고 했지만 험난했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300년이나 걸렸다. 항로의 거리는 짧았지만 북극지방의 차가운 기후와 얼음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실패와 부분적 탐사로 인해 길을 차츰 열리기 시작한다.
영국 탐험가 마틴 프로비셔(1535~1594)는 탐험에 나섰다가 어느 만에 도착했는데 그는 이 만을 북서항로의 입구라고 생각했다. 훗날 이만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프로비셔만이라 이름지어졌다. 프로비셔만은 4~5월에도 꽁꽁 얼어붙고 7월이 되어야 얼음이 녹아 화물선이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그는 더 이상 탐사하지 못했다. 그 다음 항해가이면서 수로 측량사인 존 데이비스(1550~1605)는 세 차례의 탐험 끝에 그린란드 서쪽과 캐나다 북극 군도 사이에 해협을 발견했다. 그는 1585년 여름 이 해협의 북위 72도까지 올라갔으나 떠다니는 얼음에 막혀 더 이상 서쪽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그후 그곳의 이름은 데이비스 해협이 된다.
탐험가 헨리 허드슨(1565~1611)은 1610년, 북서항로 탐사에 나섰다. 1610~1611년 그가 지나간 해협은 허드슨 해협이란 이름을 갖게 되고 그가 발견한 만은 허드슨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는 그후 제임스만에 도착해서 겨울을 나는 과정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난다. 그가 발견한 허드슨 만이 항로가 아니라고 생각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와 아들, 선원 7명은 작은 보트에 남아 동사하게 된다.
윌리엄 배핀(1584~1622)은 영국의 지도 제작자이자 항해가였다. 그는 첫 번째 탐험에서 북위 70도 45분까지 진출했고, 그곳의 지도를 제작했다. 현재 그곳은 배핀만이라 불린다. 그러나 배핀은 두번째 탐험을 마친 후, 북서항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후 아시아로 가는 '북서항로는 없다'는 이야기가 유럽에 널리 퍼지자 200년 동안 북서항로를 찾아 나선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약 200년 후, 영국이 다시 탐험에 나섰다. 영국은 대영제국 해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국가적 목표 아래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했던 존 프랭클린(1786~1847)이 앞장선다. 그는 1819~1822년, 1825년 두 차례 탐험으로 북서항로 개척에 자신감을 갖고 1845년 여름, 탐험선 두 척에 선원 129명을 태우고 북서항로 개척에 나섰으나 실종되고 만다. 그들의 흔적은 1859년 수색대에 의해서 발견된다. 양철통에 담긴 기록에는 1845년부터 1848년까지의 항해 일지와 선원들이 맞은 최후의 순간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탐험대는 빙하와 떠도는 얼음에 갇혀 죽어갔고 프랭클린은 1847년 6월 11일 추위와 굶주림에 눈을 감았던 것이 밝혀졌다. 그만큼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것은 힘들었다. 추위와 얼음 때문이었다.

“아문센 원정대 북서항로를 개척하다.”
이 항로를 처음 통과한 사람은 노르웨이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었다. 그는 1911년 세계 최초로 남극점에 발들 디뎠지만 그 전인 1903년도에서 1906년도 사이에 북서항로를 개척했었다. 그는 1845년 대규모 탐험대를 끌고 갔던 존 프랭클린의 실패를 보고, 작은 청어 보트를 타고 항해를 했다. 그는 소수의 승무원을 태우고, 식량은 현지 조달을 해가면서 항해를 했다.
아문센은 1903년 6월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출발해 9월 말까지 부티아 반도 서쪽에 도착했다. 그러나 배가 얼어붙는 바람에 탐험대는 그곳에서 거의 2년 동안 머무르며 현지 이누이트족으로부터 극지 탐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후 북서항로를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허셸 섬 근처에 정박한 후 알래스카의 이글 시까지 800킬로미터(500마일)를 스키를 탔다. 그곳에서 자신의 성공을 알리는 전보를 보낸 후, 동료들과 다시 합류하기 위해 800킬로미터를 스키를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경로인 래 해협(Rae Strait)은 일부 수로의 깊이가 매우 얕아서(0.91m) 상업적으로 비실용적이었다. 그후, 1903~1906년에 스코틀랜드인 존 레이(John Rae)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의 경로에서 더 남쪽 지역을 탐험하여 처음으로 완전한 통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가는 지금, 현대인들은 호화로운 크루즈를 타고 가며 떠다니는 얼음과 북극해의 풍경과 북극권의 동물들을 편하게 볼 수 있지만 이 항로가 개척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정신과 희생이 뒤따랐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