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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스톤타운의 매력과 슬픈 역사

잠비아에서 2박 3일간의 기차를 타고 온 여행은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 에스 살람’에서 종료된다. 이 도시는 여태까지 보아오던 아프리카 대초원이 아니라 바닷가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도시다. 아랍어로 ‘평화로운 항구’라는 뜻을 가진 다르 에스 살람은 평화롭지만 진짜 휴식은 바다 건너편 ‘잔지바르섬’에서 취할 수 있다.

“잔지바르섬의 다양하고 매력적이며 슬픈 역사”

잔지바르섬의 역사는 복잡하고 사연도 절절하다. 예로부터 잔지바르를 오갔던 고대의 외부 사람들은 많았다. 수메르인, 앗시리아인, 이집트인, 인도인, 중국인, 페르시아인, 포르투갈인, 아랍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등이 오갔는데 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발길이 닿은 후 16세기에 포르투갈의 지배를 잠시 받았고, 1828년부터 1861년까지 오만 제국의 수도로 술탄의 지배를 받았으나 1861년 독립해서 잔지바르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들은 이슬람을 믿었기에 이 시기에 건설된 이슬람 유적지가 많이 남았고 돌로 이루어진 ‘스톤 타운’을 건설해서 잔지바르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의 영향력 아래서 보호령이 되었다가 영국에 저항했으나 1896년 패했고 영국의 지배를 계속 받게 된다. 그리고 1963년 12월 영국의 보호령이 종료된다.
한편 내륙에 있던 탕가니카 공화국은 1961년, 이미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1963년에 잔지바르도 독립했지만 1964년 1월에 잔지바르섬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상류층인 아랍인들의 지배에 저항해서 흑인들이 저항했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분열이 일어났다. 결국 그 과정에서 1964년 탕가니카 공화국과 잔지바르 공화국은 합쳐서 탄지나이 연합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후 자치적으로 잔지바르섬을 지배하던 키루메는 독재자가 되었고 1972년에 암살당한 후, 탄자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현재까지 오고 있다.
'탄자니아'라는 이름은 탄자니아를 이루고 있는 탕가니카(Tanganyika)와 잔지바르(Zanzibar)에서 따왔다. '탕가니카'라는 이름은 현지어 스와힐리어로 ‘길들여지지 않은 곳을 항해한다’라는 뜻이며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일컫는 말인 '젠기(zengi)'와 해안가를 뜻하는 아랍어인 바르(barr)'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런 역사 때문에 잔지바르 섬에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 아랍, 인도인들이 이뤄내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잔지바르 섬의 비참한 노예무역”

이런 역사 때문에 잔지바르섬에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등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노예 시장뿐만 아니라 아랍인과 흑인들의 갈등, 또 흑인들끼리의 갈등도 있던 곳이다. 어쨌든 이슬람의 색채가 많이 남아있어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섬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곳은 현재 평화롭다. 섬 곳곳에 모스크가 남아 있고, 여인들이 차도르를 쓰고 다니는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잔지바르섬은 아름답고 독특한 섬이지만 지금처럼 유명하게 된 것은 노예 시장 때문이다.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지의 동아프리카에서 잡은 노예들은 잔지바르에 집결되어 아랍과 유럽으로 팔려 나갔었다.
노예 무역은 백인들이 주도한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보았지만 아랍인들도 중간에서 큰 역할을 했었다. 잔지바르가 아랍 해상왕국인 오만의 지배를 받을 당시, 아랍의 술탄은 동아프리카에서 생포한 흑인들을 잔지바르섬으로 데리고 와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노예 거래로 술탄은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졸지에 사냥당한 흑인들은 목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채찍을 맞아가며 이곳으로 끌려왔다.
15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간 아프리카에서 잡혀간 노예의 수는 최소한 1천만 명이라고 한다. 노예 수출은 주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이루어졌지만 동부 해안에서도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많이 팔려간 곳이 남미의 약 470만 명, 중미의 카리브 해제도는 400만 명 정도, 그리고 그 외 북미, 중미 내륙, 유럽, 아랍 등지로 팔려 나갔다. 그들은 총 몇 자루, 단검 몇 개 거울 몇 개, 럼주 몇 병, 손수건 몇십 장의 가치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아랍으로 잡혀간 여자 노예들은 창녀로 팔려 나갔고 남자 노예들은 거세를 당했다. 하여 씨가 끊긴 아랍에는 그 노예 흑인들의 자손은 거의 없다.
잔지바르의 중심지인 스톤타운에는 노예 시장 터와 잡혀 온 노예들이 갇혀 있던 곳이 그대로 남아있다. 흑인 노예들이 갇혀 있던 곳에 지금은 대성당이 들어섰고 그 옆의 지하에는 노예들이 감금되어 있던 두 칸의 쪽 방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대성당 앞뜰에는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흑인 동상이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던 잔지바르 섬에서 이루어지는 노예 무역에 대해 아프리카를 탐험했던 리빙스턴은 계속 영국 정부에 이것을 폐지시키라고 항의했고 결국 1871년 영국 하원에 요청서가 제출되면서 수개월 후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폐쇄되었다. 잔지바르는 평화롭지만 이런 슬픈 역사도 갖고 있는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