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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를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는 도시 시우다드 볼리바르

c.unsplash.com/leandro loureiro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ivar)는 베네수엘라 중북부에 있는 도시로 오리노코 강 상류에 있다. 시우다드 볼리바르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앙헬 폭포(Salto Angel)를 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이곳의 여행사를 통해서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앙헬 폭포를 방문할 수 있다. 이곳은 베네수엘라는 물론 중남미 해방과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한 도시이기도 하다.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ivar)라는 곳”
1764년 건설되었으며,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기아나 고지에서 산출되는 지하 자원의 집산·가공이 성하며 금, 다이아몬드, 소, 말, 목재 등을 수출하고 있다. ‘시우다드 볼리바르’의 역사적 중심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며, 대도시 대성당을 포함하여 볼리바르 광장의 여러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우다드의 볼리바르는 앙헬 폭포로 가기 위한 베이스 캠프”
앙헬 폭포를 가기 위해서는 일단 ‘시우다드 볼리바르’로 간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나이마 캠프(Canaima camp)로 이동한 후, 다시 작은 경비행기를 이용하거나, 3시간 반 가량 카라오 강과 추룬 강 상류로 배를 타고 간 다음, 다시 1시간 정도 정글을 지나서 폭포 근처로 직접 이동해야 한다. 하천 여행은 6~12월에 원주민 안내자가 사용하는 나무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강이 깊어질 때 할 수 있다. 12~3월은 건조기로 폭포의 물이 줄어들면 못 갈 수도 있다. 시우다드 볼리바르의 평균 기온은 26~30°C다.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는데 우기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 연간 약 1022m의 비가 내린다.

“베네수엘라의 국부, 시몬 볼리바르는 누구인가?”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시우다드 볼리바르’라는 도시 이름도 생겼지만 그외에도 그의 이름은 많이 보인다.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 등이 있는데 그는 남아메리카 6개국(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을 독립시켰다. 그 나라들이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영토를 해방시킨 후 나중에 분화되었다. 어쨌든 그는 훗날 여섯 나라의 영토를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821년 6월 24일 카라카스 외곽의 카라보보 평원에서 볼리바르가 이끄는 6,500명의 부대는 스페인 군대와 맞서서 승리했고 이날의 승리는 베네수엘라 해방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월 29일 볼리바르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남미 해방의 깃발은 여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그후 계속 전투에서 이기며 여러 영토를 해방시켰다. 독립운동은 경제적 특권과 정치적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국 스페인 상인과 부왕들에 대항한 자유 무역을 추구하는 크리리올료(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 즉 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 일으켰다. 중남미 현지에서 태어난 크리올료는 식민지 사회에서 상층부에 속하면서도 관료제도나 교회조직에서 배제되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유력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크리올료로서 본국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등 시민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들로부터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 교육받았고 이른 나이에 유럽을 여행하며 새로운 세상을 목격했다. 1807년 귀국한 볼리바르는 1810년부터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연이어 실패를 겪고 1814년 왕당파에게 참패한 뒤 검거령을 피해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중남미 최초의 독립국인 아이티 공화국과 영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아이티는 노예제 폐지를 대가로 바라면서, 영국은 새로운 시장의 필요성 때문에 볼리바르를 지원했다). 1817년부터 남미 독립운동 세력,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 등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안고스투라에 거점을 마련한 볼리바르는, 1819년 2월에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켜 의회를 구성하고 혁명 정부 수립도 공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세를 바꿀 만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였다.
1819년 5월 26일 볼리바르는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를 향해 진군했다. 추위와 고산병에 시달리면서도 안데스 산맥을 넘어서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볼리바르는 8월 7일 보고타 근처 보야카에서 결전을 치러서 승리했다. 보고타에 입성한 볼리바르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고, 이때부터 그는 ‘해방자’ 칭호로 일컬어졌다.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지인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는 대(大)콜롬비아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미국같은 합중국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구상은 1819년 12월 군사 지도자들과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고 볼리바르는 ‘대 콜롬비아 공화국’의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23년 9월 리마에 입성하여 이듬해 12월에 최종적으로 페루와 볼리비아 지역도 해방시켰다.(볼리비아라는 국호는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차차 대콜롬비아 구상은 배척되었다. 각 지역은 갈등이 심해졌고 계층, 신분에 따른 이해 관계가 대립했다. 결국 1830년에 대 콜롬비아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볼리바르를 암살하려는 음모도 있었다. 1830년 4월 27일, 볼리바르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는 의회의 제안도 거절한 후, 그는 카리브 해안의 산타 마르타로 떠나 별장에 칩거하다가 결핵으로 8개월 만에 세상을 뜬다. 1830년 12월 17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제가 소망하던 모든 것들을 이루어 낼 수 없었던 점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직한 군인처럼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원칙을 사수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 볼리바르입니다.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결국 정치적인 패배를 했고 자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혁명 자체에 대해 회의를 했던 것 같다. 이런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크리올료, 즉 백인으로서 원주민이나 흑인에 대해 차별의식을 가졌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배신도 하고 독재도 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