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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교황청이 있었던 역사 깊은 중세도시 비테르보

c.pixabay.com/evondue

비테르보는 구시가지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문이 13개가 있는 중세풍의 마을이며 교황이 1257년부터 1281년까지 머문 도시다.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비밀 투표 제도인 콘클라베를 가장 먼저 시행했던 도시로 역사 깊은 도시다. 순례길에 들르기도 하지만 로마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거리라 로마에서 당일치기 여행을 하는 관광객들도 매우 많은 곳이다.

“중세 시절 교황이 머물렀던 비테르보”
비테르보는 ’베드로의 문(Porta San Pietro)’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석조 건물과, 돌 깔린 길이 중세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다. 비테르보의 역사 지구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중세 시대의 마을이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로 중세 시대의 건물들은 고대시대의 폐허 위에 세워져 있다.

비테르보(Viterbo)는 역사가 오래된 고대 도시이고 도시의 역사 지구는 11-12 세기의 중세 시대의 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비테르보에는 1257년부터 1281년까지 24년간 교황청이 있었다. 알렉산더 4세를 비롯하여 우르바노 4세, 그레고리오 10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등 10명의 교황이 비테르보에서 거주했었다.
이렇게 비테르보가 교황청의 거주지가 된 이유는 로마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졌기 때문이고, 비테르보는 로마에 비해 교황에 대한 지지가 강한 도시여서 교황이 거주하기에 안전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비테르보에서 교황정이 있던 기간 동안에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콘클라베 제도의 도입이다. 1268년부터 1271년까지 무려 3년 동안 교황 선거가 지연되자 비테르보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한곳에 감금하여 빵과 물 만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교황을 선출했다. 이 방식은 이후 교황 선거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1281년 교황 마르틴 4세가 로마로 돌아가면서 비테르보에서의 교황정이 막을 내렸다. 그후 비테르보는 한때 로마의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던 디 비코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1431년 디 비코 가문이 망하면서 비테르보는 교황령에 있어서 두 번 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1871년에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됐다.
콘클라베, 즉 비밀투표를 했던 그 장소에 교황의 궁전(Palazzo dei Papi)이 있고 성당, 역사적인 광장이 있다. 비록 낡았지만 세월을 간직한 건물들은 장중하다. 도시에는 분수대들도 있어서 낭만적인 분위기다. 비테르보는 활기찬 도시며 구시가지를 돌아보며 작은 골목길의 카페에서 이탈리아 커피를 즐기며 휴식을 취할 만하다.

“교황파와 황제파, 봉건 제후, 귀족들의 싸움”
비테르보에 교황청이 있던 1257년부터 1281년간은 격변기였다. 이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이탈리아의 정치권은 12세기, 13세기에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싸웠었다.

1, 2세기에 기독교가 퍼져 나가면서 교회를 갖추게 되고 교회들을 관리하는 교구가 생기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예루살렘 교구, 안티오키아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대교구였다.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가의 종교로 공인한 후, 서기 330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이스탄불)로 천도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의 중심이 되는데 359년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그의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는 동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를 통치하도록 유언을 남긴다. 이 당시에는 수도가 동로마쪽의 콘스탄티노플이어서 동로마의 지배자들은 서로마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정치와 종교를 일치화시켜서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서로마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힘을 잃었지만 종교적으로 동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다. 로마 교구는 동로마 제국의 한 교구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로마 주교는 교황(Pope)이라 불리며 중심으로 존재했다. 역사적인 로마는 그 시절 전통을 갖고 있었고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서로마는 476년 멸망하지만, 게르만 민족의 후예인 프랑크 왕국이 기독교화 되고, 전 유럽에 기독교를 전파시키자 로마 교황의 존재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은 800년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면서 교황은 정신적으로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후 프랑크 왕국이 쇠하면서 사라센, 바이킹 인들이 유럽으로 밀려 들어왔고 이런 혼란스런 상태에서 서유럽에는 봉건제도가 나타났다.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들 중심으로 주군과 군사계급의 주종 관계가 성립하면서 귀족, 기사, 성직자들이 지배계급이 된다. 10, 11세기경에 유럽에서 이런 봉건사회가 지속되다가 동프랑크 지역에서 오토 1세가 등장한다. 오토 1세는 독일 지역을 평정한 후, 951년 이탈리아에 진격해서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교황 요한 12세는 962년 2월 이탈리아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해방시켜 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뜻으로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을 집전했으니, 오토 1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다.
이렇게 교황권은 정치와 맞물려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면서 지속되는데 그후 성직자들이 타락하고 질적 수준의 저하가 나타난다. 그러자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혁신 운동이 일어나는데 개혁 운동은 우선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중심이 되어 주도했다. 서임권 남용, 성직 매매, 성직자 결혼 금지, 족벌주의 등 성직자의 세속화가 개혁 대상이었다. 그 시절에 성직자를 임명하는 성직 서임권이 세속 군주들에게 있어서 신성로마 황제와 봉건 제후들은 종교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교황청에서 회수하려 하고 교황 선출에서도 신성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이것은 신성로마 황제나 제후들의 반발을 일으켰지만 결국 개혁은 계속 이어졌고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가 충돌하게 된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려 했고, 이 싸움에서 지지자가 약세였던 하인리히 4세는 결국 1077년 1월 교황을 찾아가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것을 카놋사의 굴욕이라 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를 사면해주었지만 하인리히 4세는 약속을 어기고 성직 서임권을 계속 행사한다. 교황은 황제를 1080년에 파문에 처했으나 오히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군에 쫒겨 나서 실의 속에서 죽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황을 추종하는 구엘프 파(벨프 가문)와 황제파인 기벨린 파(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나타난다. 기벨린파는 신성로마 황제를 지지하고, 그에 맞서서 구엘프 파는 교황을 지지했다. 부유한 신흥 상업적 가문들이 지지하는 구엘프파는 교황보다 황제가 더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교황을 지지했고, 전통적 귀족 가문들인 기벨린파는 황제보다 교황이 더 위협적이라 보았다. 독일에서 시작된 그들의 분쟁은 이탈리아까지 이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황제파에 대항하여 교황파가 뭉쳐 싸우게 된다.
그 시절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었다. 1차(1096년)에는 성공했지만 그 뒤, 약 200년간에 걸쳐서 시도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13세기에는 열기가 완전히 식게 되면서 교황의 권위는 약해진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로마의 교황청은 비테르보로 옮긴다. 1257년부터 1281년까지 약 24년간 교황 알렉산더 4세 이후 우르바노 4세, 그레고리오 10세, 요한 21세, 니콜라스 3세, 마르틴 4세 등 10명의 교황이 비테르보에서 거주했었다. 로마의 치안이 불안했고 교황의 권위는 약해졌지만 비테르보는 구엘프파(교황파)가 충성을 바쳤고 방어를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각 도시들은 구엘프파(교황파), 기벨린파(황제파)로 갈려서 서로 전쟁을 했다.
그러나 14세기가 지나가면서 구엘프파와 기벨린파의 반목은 사라진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더 이상 이탈리아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교황도 아비뇽 유수를 거치면서 로마에서 프랑스로 교황청을 옮겼기 때문에 비테르보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구엘프파와 기벨린파는 단지 지역적인 정파를 의미하게 되었고 점차 사라져갔다. 19세기 들어서면서 구엘프와 기벨린은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맞물려 다시 부활한다. 구엘프파는 1843년 교황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 연방을 만들려 했고, 기벨린파는 교황이 오히려 이탈리아 통일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산 로렌초 광장(Piazza San Lorenzo)과 산 로렌초 성당(비테르보 대성당)”
산 로렌초 광장에는 산 로렌초 성당, 흔히 '비테르보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성당이 언덕 오르막길에 있다. 12세기에 세워진 대성당은 전설에 따르면 고대 에트루리아인의 헤라클레스 신전 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여러 번 다시 지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교황궁, 팔라초 데이 파피(Palazzo dei Papi)”
교황궁으로 불리는 팔라초 데이 파피는 산 로렌초 광장의 북쪽에 있다. 비테르보 대성당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기념물이다. 로마의 치안이 위험하자 비테르보로 피신한 교황들이 1257년부터 1281년까지 24년간 머문 곳으로 알렉산더 4세를 비롯하여 우르바노 4세, 그레고리오 10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등 10명의 교황들이 이곳에 거주했었다.
오늘날 ‘콘클라베의 홀’로 알려진 곳에서는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긴 콘클라베를 주최했었다. 교황을 1268년부터 1271년까지 1006일간 뽑지 못하자 비테르보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한곳에 감금하고 빵과 물만 공급하는 방식으로 교황을 선출했었다. 그 시절에는 만장일치제였는데 이 방식은 이후 교황 선거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1281년 교황 마르틴 4세가 로마로 돌아가면서 비테르보에서의 교황정이 막을 내렸다.
궁전의 기둥들은 로마 시대의 신전에서 뜯어온 것들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교황청 건물과 옆의 열주들 사이로 어리는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다. 14세기 초에 세운 유명한 종탑도 있고 교황 요한 21세의 석관이 있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무덤도 있다지만 16세기에 수리할 때 부서져 본래의 무덤 자리가 전해지지 않는다.

“교황의 온천 (Terme dei Papi)”
비테르보 마을에서 5km 떨어진 곳에는 교황들이 온천욕을 한 것으로 알려진 테르메 데이 파피(Terme dei Papi)가 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치료 효과가 높기로 유명한 곳으로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온천의 효험에 감탄하고 자주 애용하면서 교황의 온천이란 별명이 붙었다. 현재 공중 목욕탕으로서 건강에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풀고 있다.

“산 펠레그리노 광장과 모르테르 광장(Piazza della Morte) ”
비테르보의 구시가지에는 아기자기한 광장들이 있다. 다른 대도시의 거대한 광장과 달리 작고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에 둘러싸인 작은 광장들이다. 산 펠레그리노 광장 주변의 건축물, 높이 솟은 오래된 벽들 사이로 난 고즈넉한 골목길, 중세 시대의 주택들 사이를 걷는 시간은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황토색 건물들 사이에 있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월이 깃든 고즈넉한 길거리 레스토랑, 카페, 그앞에 놓여진 테이블이 아늑하다. 비보르테 두오모(대성당) 근처에 있는 모르테르 광장(Piazza della Morte)에도 작은 식당과 카페들이 있어서 쉬기에 좋다.

“빌라 란테 정원”
빌라 란테 (VIlla Lante)는 비보르테 도심지에서 몇 킬로미터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식 정원이다. 석조 건물들과 잘 관리된 숲, 호수 등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인데 이곳을 돌아보면 중세에 비보르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