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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가톨릭 교도들의 성지, 바티칸 시국

c.unsplash.com/Chris Czermak

바티칸 시티(Vatican City)는 ‘바티칸 시국’이라고도 불린다.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국가’로서 전세계 주권 국가로서는 가장 작은 국가다.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는데 서울시 여의도 면적의 대략 6분의 1정도고 수백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바티칸 시국은 면적이 아니라 역사성으로 인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전 세계 가톨릭 교도들의 중심지다. 그 상징성으로 인해 존중받는 바티간 시국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티칸 시국 앞의 드넓은 ‘성베드로 광장’ 앞에 서는 순간 바티칸 시국의 장엄한 위상을 체험할 수 있다.

“바티칸 시국의 길고 긴 역사를 알아야 로마의 중세가 이해된다”
로마 시내에 있는 바티칸 시국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사람들을 압도하지만 얼핏 보면 나라 같지 않다. 다만 입구에 알록달록한 옛스런 복장을 한 스위스 출신 병사들이 근위병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뭔가 다른 세계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교황령(756-1870)이 있었지만 1870년에 로마와 더불어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되었다가 1929년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상징적인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곳은 세속적인 국가라기보다는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의 상징이다.

서로마 제국(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의 태동
359년 동로마, 서로마가 분리된 후, 동로마의 황제가 기독교의 수장이 되지만 서로마 쪽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는 원래 로마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예루살렘 교구, 안티오키아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등이 대교구로 평등했지만 로마 주교는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갖고 서로마 지역에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다. 우선 로마가 그 시절 정치적 중심지였고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기 때문에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서로마는 476년 망하지만, 게르만 민족의 후예인 프랑크 왕국(481-843)이 기독교화 되고, 전 유럽에 기독교를 전파시키자 로마 교황의 존재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갖게 된다. 교황은 800년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면서 교황은 정신적으로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교회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8세기의 성상 파괴 문제 때문이었다.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725년 교회에 있는 성상을 우상 숭배로 보고 파괴를 명했으나 로마 교황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결국 성상 파괴는 실패하여 843년에 의식에 다시 사용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국제 관계에 큰 변동이 온다. 프랑크 왕국이 차차 쇠하면서 서로마 제국에는 이슬람 세력, 바이킹 세력들이 침투하는 가운데 이것에 대비하기 위한 봉건제도가 나타난다.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들 중심으로 주군과 군사계급의 주종 관계가 성립하고 귀족들의 장원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이 생겼다. 주군인 귀족과 군사계급인 기사들과 성직자들이 지배계급이었고 농민, 도시민이 피지배 계급이었다. 10, 11세기경에 유럽에서 이런 봉건사회가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054년 로마 가톨릭교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면서 완전하게 갈라선다. 그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현재 서방의 가톨릭 교회가 되고 황제가 다스리는 비잔틴 교회는 1453년 투르키예에 의해 비자틴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리게 되고 크게 보아 동방정교회라 일컫는다.

신성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갈등
프랑크 제국이 멸망하자 동프랑크 지역에서 새롭게 부상한 세력이 오토 1세였다. 오토 1세를 강력히 지지한 것은 성직자 계층이었다. 오토 1세는 성직자들에게 교회 영지를 주었고 교회는 왕을 인정하고 지원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봉건 제후들은 나약한 교황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라센의 침입과 내부의 무질서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오토 1세는 951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이탈리아의 왕이 되고 10년 후에 다시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로마까지 진격한다. 교황 요한 12세는 962년 2월 이탈리아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해방시켜 준 데 대해 감사하면서,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집전했다. 서로마는 망했지만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대제에 의해 기독교화 되었고, 또한 프랑크 왕국이 망하자 오토 1세에 의해 ‘신성로마 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비록 게르만 민족이 주도했지만 교황은 이들을 인정함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의 명맥이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후 큰 변화가 생긴다. 교황청은 점점 타락해가는 성직자 세계를 개혁하고 신성로마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주도한 그레고리오 7세는 이탈리아의 수도 성직자로 1025년 토스카나 지방의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개혁적이었다. 그는 앞으로 교황 선출권은 추기경단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고 포고한다.(1059년) 그리고 성직자를 결혼 금지시켰다. 그 시절에는 성직자들이 처첩을 거느리는 일이 심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조치를 교황이 되기 전에도 취했지만 1073년 교황이 되자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성직 매매 금지와 제후에 의한 성직자 임명 금지였다. 즉 세속적인 정치 권력이 교회 권력에 침투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즉각 갈등을 유발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주교 대의원회에서 세속 군주, 제후로부터 임명된 모든 성직자들을 공식적으로 해임하였다. 이 조치는 유럽의 모든 군주, 특히 신성로마 황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조치에 저항하여 파문한 성직자들을 그대로 성직에 머물러 있게 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계속 성직 서임을 고집할 경우에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고 황제는 그것에 저항하려 했으나 독일 제후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1월 카노사에 있던 교황을 찾아와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에 교황은 사면한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이라 한다.
카노사 사건 후, 대부분의 독일 제후들은 교황에게 복종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성직 서임권을 계속 행사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1080년에 파문에 처했으나 이때는 형세가 전과 같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은 하인리히 군대에 쫓겨 로마로부터 피난하는 도중 실의에 빠져 살레르노에서 죽었다. 그 문제가 타협을 본 것은 훗날이었다. 주교와 수도원장은 황제에 의해 임명되지만 세속 관직(보통)의 보유자로서 임명되는 것에 불과하며,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나 지팡이는 교황청에서 수여하게 했다.
이런 가운데 교황을 추종하는 구엘프 파(벨프 가문)와 황제파인 기벨린 파(호엔슈타우펜 가문)가 나타난다. 그들의 갈등은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났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신성로마 황제의 계승권을 여러 가문에서 주장하는데 특히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계승권 다툼을 했다. 결국 황제파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승리하면서 그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했으나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이 교황측에 서서 그들과 대항했다.(1176) 즉 이탈리아 안에서 황제파에 대항하여 교황파가 뭉쳐 싸운 것이다.

십자군 전쟁과 교황청의 약화와 타락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는 또 있었다. 1071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교황의 ‘성지 탈환’을 외치는 설교에 의해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096년 십자군을 조직해서 109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이슬람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1099년 십자군은 그곳에 라틴 왕국(1099-1187)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후 약 200년간 십자군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대개 실패했고 타락하면서 교황의 권위도 추락한다. 또한 이 전쟁에 참여했던 봉건 제후들은 전쟁에 인력과 물자를 소비해 세력은 점점 약화되었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동방 문화권을 접한 유럽 사회는 르네상스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교황권의 쇠퇴와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 동방 문화의 접촉으로 인해 이단들이 늘어났고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13세기에 많은 종교 재판을 하게 된다.

교황파(구엘프파)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파(기벨린파)의 갈등과 투쟁
이 무렵에 로마의 치안이 너무도 어지럽고 구엘프파(교황파)와 기벨린파(황제파) 사이에서 갈등과 전투가 있었으며 도시끼리도 싸웠다. 로마에서 위험을 느낀 교황은 로마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비테르보(Viterbo)로 옮긴다. 비테르보에 1257년부터 1281년까지 약 24년간 교황청이 있었고 10명의 교황이 비테르보에서 거주했었다. 로마와 달리 비테르보는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파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81년 교황 마르틴 4세가 로마로 돌아가면서 비테르보에서의 교황청은 막을 내렸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와 교황권의 쇠퇴
그후 로마의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눈 시대가 변했는데도 계속 교황 우위를 완강히 주장하다가 각국의 군주,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과 충돌하게 된다. 프랑스 왕은 1301년 최초의 신분회를 소집해서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아 교황을 규탄하고 교황을 체포하려고 하자 교황은 충격을 받아 죽고 만다. 그리고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5세는 불안정한 정세를 구실로 로마에 부임하지 않고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었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의 요청에 협조하여 다수의 프랑스 출신 추기경을 임명하고 이후의 교황이 프랑스인 중에서 선출되도록 하였다. 클레멘스 5세 이래 70여년 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갔지만 금방 사망하고 로마는 정세가 불안정했다. 로마 군중의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폴리 출신 이탈리아인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재위 1378-1380)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푸대접 받은 프랑스 추기경들은 프랑스로 돌아가 새로운 교황으로 글레멘스 7세를 선출하여 지난번 교황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한다. 새로 선출된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집무했다. 훗날 추기경단은 1409년에 양쪽의 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 (로마), 베네딕토 13세(아비뇽)를 다 같이 폐위시키고 제3의 인물인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선출했고 그가 이내 죽자,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들은 새로운 교황을 인정치 않아서 결국 교황이 3명이나 되었다. 이를 대분열 시대(1378-1417)이라고 한다.
그후 교황권은 점점 약화되고 각 나라의 군주권이 강화되며 성직자 세계는 타락해 간다. 뒤이어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타락한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출현하고 종교 전쟁을 하면서 유럽은 근대화를 위해 치닫기 시작한다.

근대화와 현대의 바티칸 시국 탄생
그후 19세기 중엽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영향력을 잃어갔고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새로운 이탈리아 세력에 의해 점령당한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천 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티칸으로 대거 피신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가자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사실 그 이전의 교황령(Papal States)은 754년부터 1870년까지 존속했던 교황의 세속적 영토였기에 그것을 모두 뺏긴 교황청 입장에서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무솔리니 정권 시절이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했고 교황청을 국제법상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티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1984년에는 양측 합의로 가톨릭 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었다.

이처럼 바티칸 시국은 비록 작지만 깊은 우여곡절의 역사를 갖고 있기에 바티칸 시국, 교황청의 역사를 배제하고는 유럽의 역사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요하고 또 전 세계 가톨릭교도들의 성지이기에 바티칸 시국은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국가이다.

“가톨릭교도를 끌어안고 있는 장엄한 성 베드로 광장”
누구나 제일 처음 바티칸시의 앞에 있는 거대한 광장에 가면 입을 벌리고 감탄하게 된다. 로마는 기독교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나라고 바티칸이 그 심장인데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장엄한 광장에 서면 감탄사를 내지르게 되어 있다. 광장에 서면 멀리 돔형의 지붕으로 덮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보이고, 광장 주변에 거대한 열주들이 빙 둘러 있다. 그리고 중앙에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설계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이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성 베드로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수많은 사람을 감싸 안는 모습이다. 16m 높이의 원기둥꼴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140개의 성인상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으로 장엄하다. 이 공사는 1656년에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되었는데 하늘에서 찍은 광장 사진을 보면 열쇠 구멍 모양이다. 예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천국문을 열쇠를 주었다고 믿어지고 있기에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 있던 것이다.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시로 옮겨왔는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1586년까지 방치했던 것을 대성당 중앙으로 갖고와 맨 위에 거대한 십자가를 달았다고 한다.

바티칸 시국이 자리 잡기 전에 이곳 바티칸 언덕은 고대 로마인들이 믿던 각종 이교신들의 제단과 무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많은 기독교도가 순교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드로는 원형 경기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후, 이곳의 기독교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베드로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에 성당이 먼저 들어서고 광장이 후에 들어섰는데 광장이 들어서기 전의 성당 앞은 수많은 집과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힌 곳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도들의 처참한 순교를 했지만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졌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 무덤 위에 만들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전 세계에 있는 기독교 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회다.(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다 포함해서) 전승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수제자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인 베드로 무덤 위에 대성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신약성경에는 베드로의 로마 체류나 순교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유해가 대성당 제대 아래에 있다.
베드로 대 성당이 로마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으뜸 교회는 아니라고 한다. 가톨릭 교도들에게 으뜸인 성당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으로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로마 교구 교구장은 교황이다. 이 교회는 로마에 있는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 가는 권위를 가졌으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대접받고 있다. 이곳은 바티칸 시국에서 떨어져 있지만 바티칸 시국의 영토로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성당이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상징성이 있고 또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의 가톨릭교도들은 물론 일반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처음으로 베드로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 위에 성베드로 대성당이 건축되었는데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대다수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무덤과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지금의 대성당이 건립된 이후, 새로운 교황청 건물과 구별하기 위해 옛 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15세기 말, 아비뇽 유수기에 옛 대성당에 관리가 소홀하여 노후화가 극심해지자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을 만들려는 계획이 나오게 된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로마의 영광을 위하여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건물로 바꾼다는 결정을 내렸고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대 성당이 완료되었다. 대성당 내부는 어마어마하다.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어서 처음에 들어가면 인파와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없다.
120년간에 걸친 대성당 건축에는 수많은 교황, 예술가,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브라만테의 설계부터 시작해 세월이 흘러가며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도 참여한다. 기독교 세계의 최고, 최대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교황들의 집념과 예술가들의 열정과 긴 세월이 결합되어 인류사에 걸출한 교회 동시에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그 화려함, 웅장함 앞에서 전율을 느끼게 된다.

“바티칸 미술관”
바티칸 미술관은 바티칸 시내에 있는 미술관(박물관)들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다. 따로 건물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을 포함해서 바티칸 내에 있는 여러 미술관, 갤러리 등을 칭한다. 로마, 바티칸시에 왔으면 이 미술관들은 꼭 들러볼 만하다. 미술 애호가라면 당연히 보겠지만 입장료가 비싸다고 안 들어가는 여행자들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밥을 굶고라서도 로마에 왔다면 볼만한 곳이다. 미술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인류 문화사의 걸출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 특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남긴 작품들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만족을 주는 곳이다. 그 장엄하고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고 고대 로마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가 얼마나 화려했던 문명을 자랑했던 곳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화려함의 극치,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간 시국의 교황의 관저의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이곳은 동시에 바티칸 미술관의 하나로서 들어가는 순간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예술품들이 가득 차 있는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예술가들이 그린 장엄하고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들이 내부에 가득 그려져 있다.
원래 이곳은 마조레 성당(Cappella Maggiore)으로 불리었는데 이 성당이 나중에 시스티나 성당으로 재건되었다. 시스틴 성당의 이름은 1473년에서 1481년 사이에 가톨릭의 오래된 옛 대성당(Cappella Magna)을 복원했던 교황 식스토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교황 식스토 4세를 위해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하였고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 아래 1473년에서 1481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구약 성서에 언급된 솔로몬 성전의 크기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이곳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당이 완성된 후, 내부는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건출한 화가들이 프레스코화로 치장해서 벽, 기둥, 천장 등이 성화로 가득차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는 환상적이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울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며 1508년에서부터 1512년 사이에 그린 천창의 12,000점의 그림은 경외스럽다. 그것을 올려다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인데 성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둔 성화들은 중세 시절,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에서의 첫 번째 미사는 1483년 8월 15일인 성모 승천대축일에 치러졌고 지금까지도 의식을 치르고 있는데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의식, 즉 추기경들이 모여서 외부와 차단된 채 만장일치의 교황을 뽑는 종교의식인 ‘콘클라베’가 여기서 열린다. 콘클라베 제도는 교황청이 1257년부터 1281년까지 비테르보로 옮겼을 때 생겨난 제도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콘클라베가 소집되면 시스티나 성당은 비밀 선거 장소가 되고 추기경들이 모여서 비밀투표를 한다. 지붕에 굴뚝을 설치하여 투표지를 화학처리를 하여 태우는데 만약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표시고 검은 연기가 나오면 실패했다는 표시다. 처음에는 만장일치 제도였으나 지금은 3분의 2 찬성표를 얻은 사람이 교황이 된다.

이곳에 있는 벽화들의 주제는 성경에 바탕을 둔 것들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까지의 삶, 모세와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그리스도 기원 이후 등 세계 역사상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 이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이 모세를 거쳐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결국 지금의 교황에게 그 권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프레스코화들 위에 있는 교황들의 초상화는 하늘이 내린 권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되었다.
30년 후,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는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다. 원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별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1508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천장을 다시 칠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작업은 1508년에 시작하여 1512년 11월 1일에 완료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천장에 창세기의 모습을 그렸다. 빛과 어둠의 분리, 별의 창조, 땅과 바다의 분리,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맞닿는 모습인 아담의 창조, 하와의 창조 등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대홍수 때의 노아의 방주 등이 그려져 있고 아브라람 등 예수의 선조 등의 장면 등 수많은 구약의 일화들이 그려져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 보면 더욱 감동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워낙 유명한 그림들이고 화려해서 모르는 이들도 넋을 빼놓는다. 다만 현장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위를 쳐다보면 고개가 아파서 오랫동안 볼 수 없다. 쉬어가면서 보아야 하는데 미리 이런 일화를 알고 나서 보면 더 잘 보인다.
그 후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의뢰를 받아들여 제대 위에 1535년부터 1541년까지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마친 지 24년이 지난 후의 작업이었다. 그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서 6년 만에 이것을 완성하였다. 세상의 종말 이후 죽은 이들이 부활하고, 심판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는 영혼, 지옥의 불로 떨어지는 영혼들이 그려져 있다. 맨 위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가 있다. 이것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감탄을 하면서도 경악했다고 한다. 그전에 접했던 거룩한 성화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들이 나체의 모습이라는 것. 특히 예수도 나체의 모습이어서 많은 비판과 압박이 있었다. 결국 훗날 미켈란젤로의 제자에 의해 주요 부분을 가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미켈란젤로도 있다. 사람의 가죽을 들고 있는 예수의 제자 바르톨로메오가 있는데 그는 가죽이 벗겨지면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사람의 가죽에 그려진 얼굴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을 하는 가운데 받은 고통, 사람들로부터의 수많은 간섭으로부터 오는 고뇌 등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