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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이전에 발달했던 티와나쿠(Tiwanaku) 문명

c.unsplash.com/David Torres

잉카 왕국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다만 그들의 모습은 스페인측의 기록에 의해서 남아 있는데 그들이 비참하게 능욕당하고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잉카 왕국에 대해 애석하게 여기고 신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잉카 왕국 이전에 존재했던 문명이 있다. 티와나쿠(Tiwanaku)는 잉카 왕국 이전에 남부 안데스 일대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왕국의 수도였다. 기원전 1500년부터 서기 1200년대까지 존속했으며 그중에서 500년~900년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티와나쿠의 유물들은 그 시절 이들의 문명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에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티와나쿠(Tiwanaku) 문명이란?”

티와나쿠 문명을 보려면 볼리비아로 가야 한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서쪽으로 7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티와나쿠에서 티티카카 호수 근처의 마을 코파카바나까지는 15km로 라파스에서 티티카카 호수 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많은 것이 수수께기에 쌓여 있다. 명확한 설은 없고 종교적 순례지로 보고 있다.
은 지역을 지배했던 왕국의 수도였다. 티와나쿠 문명의 기원은 매우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유네스코의 보고에 의하면 티와나쿠(Tiwanaku)는 기원전 1200년경 ‘촌락 시대’라고 알려진 작은 정착지에서 시작되었으며 1세기 동안 티와나쿠는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 갔다. 구리광 제련으로 더 나은 무기를 생산하고 관개 체계도 발달했기 때문이다. 도로를 포장하고 거대한 석조 공공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포장도로를 통해 티와나쿠의 생산품을 주변 지역으로 수출했다. 티와나쿠 장인들은 구리로 만든 가공물, 도자기, 섬유, 석재 등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550년 무렵 이 도시가 오늘날 남부 페루, 북부 칠레, 볼리비아 대부분 지역,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일부까지 관할하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한편 기상 조건이 더 나은 호수 주변의 늪지 근처에서는 밭을 만들어 경작을 하기도 하였다. 이 밭은 거대한 기업처럼 전체 면적 65㎢가 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멜로네(camellones)는 폭 6m, 길이 20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폭 3m의 관개 수로에 의해 구분되었다. 수로는 밭에 물과 영양분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낮 동안 열을 보존하여 이 지역의 나쁜 기후 조건을 상당히 개선해 주었다.
티와나쿠 왕국은 500년~9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이는데 티티카카 호수 주변의 늪지에서는 거대한 밭을 경작했다. 전체 면적 65㎢가 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관개 수로도 발전했다. 티와나쿠 제국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서기 8세기경으로 7만~12만 5000명의 거주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티와나쿠는 그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되었다.

“장대한 티와나쿠 문명에 대한 상상”
전성기는 500년부터 900년까지지만 지질학적으로 보면 이 도시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1580년에서 서기 1200년까지 약 2800여 년 동안 존속한 것으로 보는데 이런 추정이 맞는다면 이 문명은 장대한 문명이었다. 약 2800년간 존재한 문명은 흔하지 않다.
티와나쿠 문명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 인종들이 중남미 대륙으로 와서 일으켰던 문명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중앙아시아에 있던 아리안족들이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인도 갠지스강으로 이동했고 그후 그리스 문명, 인도 문명이 일어나고 알렉산더 대왕, 헬레니즘, 로마 문명 일어나고 몰락했으며 중국 대륙에서도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서기 1200년경, 몽골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이런 수많은 일들이 파도처럼 일어나던 그 긴 세월 동안 티와나쿠 문명은 중남미라는 다른 대륙에서 계속 존속했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빙하기가 끝나던 무렵인 1만 3천년 전에 베링해협을 통해 건너왔다면 원시적인 모습이 상상되지만 그후에도 계속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면 그들의 선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등 유라시아 대륙에서 축적된 지혜와 기술을 갖고 왔을 수도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신대륙에서 일으킨 그들의 문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또 잉카인들이 믿었던 사라졌다가 다시 온다던 하얀 얼굴의 ‘비라코차’ 신은 티와나쿠 문명과 어떤 관계일까? 혹자는 이집트 문명과도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하고, 심지어는 우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을까라고 상상도 한다. 기록이 없기에 상상의 날개를 필 수 있고 수많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문명이다.

“티와나쿠 문명은 왜 멸망했을까?”
티와나쿠 문명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그 소멸 과정도 확실치 않다. 유적지 자체도 많이 파괴되어서 옛날의 모습도 아니다.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한 후, 이곳에 있는 돌들 수만 톤을 갖다가 자신들의 건축에 갖다 썼다고 한다. 그로 인해 현재의 티와나쿠는 황폐해졌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이곳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유적지였을지 모른다.
피츠버그 대학(University of Pittsburgh)의 지질학자 엘리엇 아놀드 박사(Dr. Elliott Arnold)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붕괴 당시 이 지역이 더 건조해졌다는 증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지역의 가뭄은 농업에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티와나쿠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요즘도 목격하지만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엘니뇨나 라니냐에 의한 가뭄과 기상 변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그 시절에는 식량을 어디서 수입할 수도 없기에 농산물 생산이 타격을 입으면 곧바로 체제의 위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티와나쿠는 11세기부터 주변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잃어 12세기 초에 무너졌다. 그때 일어나고 있던 잉카 제국의 침입에 의해 망했을 것이란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확량이 줄어들자 점차적으로 중앙의 권력이 약해지고 그 구성원들로부터 자치의 요구가 생겨나면서 해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태양의 문”

인근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는 티와나쿠인들에게 우주의 발상지였다. 잉카 신화에 따르면 티티카카 호수는 태양, 달, 사람, 우주를 창조한 비라코차 신의 발상지다. 티와나쿠를 상징하는 유명한 유적 '태양의 문'에는 비라코차 또는 태양의 신이 새겨져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 세계를 창조할 때 썼다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새겨진 문양들은 24시간과 365일을 나타내는데 티와나쿠 문명이 농경을 바탕으로 일어난 문명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다. 태양의 문 꼭대기에 있는 독특한 조각은 동물과 다른 존재들을 묘사하는데 ‘태양의 문’이 서 있는 위치가 태양이 뜨는 방향과 왜 맞지 않는지에 대해 설이 많다고 한다.
또 거대한 돌기둥(monolith)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티와나쿠 지역의 인디언은 털이 없는데 이 돌기둥의 사람에게는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묘하다. 어떤 사람들은 티와나쿠의 엘리트들은 해자로 둘러싸인 네 개의 벽 안에 살았다고 믿고 있다. 해자로 이곳을 신성한 섬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으며 벽 안에는 엘리트들만이 볼 수 있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이미지들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건축 양식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세기초에 건설된 앙코르와트다. 그 힌두교 사원은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쪽은 우주의 중심 메루산을 상징한다. 티쿠와나와 앙코르 와트가 같은 양식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해자와 신전을 통해서 세계의 중심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가운데 형성된 보편적인 건축 양식으로 보인다.
티와나쿠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아이마라족은 다른 여러 안데스 문명의 우주론과 유사한 복잡한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세 가지 공간의 존재를 믿었다고 한다. 상위 체계, 중간 혹은 내면세계 그리고 낮은 세계가 있었는데 상위 세계는 천상의 존재인 신들이 사는 곳이고, 중간 세계는 현재의 모든 생명체가 있는 곳이며, 하위 세계는 생명 자체가 거꾸로 된 곳이라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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