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문화의 중심지 ‘산티아고 데 쿠바’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는 바라코아(Baracoa)에 이어 쿠바의 두 번 째 수도였다. 그후 스페인은 19세기까지 약 400년간 이곳을 쿠바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미국이 미-스페인 전쟁에서 이기면서 쿠바에 개입하고 미대륙과 가까운 아바나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전까지는 산티아고 데 쿠바가 쿠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이 도시는 문화의 중심지고 살사 춤의 탄생지이면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벌였던 ‘호세 마르티’와 쿠바에 공산혁명을 일으켰던 ‘피델 카스트로’의 묘가 있는 곳이다.
“살사 춤의 탄생지 ‘산티아고 데 쿠바’”
이 도시는 1515년 7월 25일에 스페인에 의해 건설되었고 예수님의 제자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을 따서 ‘산티아고 데 쿠바’라고 이름을 지었다. 약 400년 동안 쿠바의 수도였던 곳으로 이곳은 문화의 수도라고 일컬어진다. 쿠바의 남서부에 있는 도시로 아바나와 거의 정 반대에 있다.
쿠바 원주민이 초기에 대부분 학살과 질병으로 죽자 스페인은 아프리카 노예를 쿠바로 실어왔는데 이들은 대개 ‘산티아고 데 쿠바’로 왔다. 아프리카 흑인을 통해 들어온 음악 ‘룸바(Rumba)’가 라틴 음악과 합해지면서 ‘살사’가 탄생했다. 이 살사 춤이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전 세계로 퍼진다. 그만큼 산티아고는’ ‘쿠바의 문화 수도’이며 광적이고 열정적이며 시끄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라고 일컬어진다. 이 도시는 같은 섬에 있는 북쪽의 아바나보다 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아이티나 자메이카와 더 가까운 도시다.
이곳은 그렇게 광적이고 시끄러운 도시가 아니다. 낡은 건물들도 있지만 파란 하늘 밑에서 부드러운 다양한 색깔로 칠해진 집들이 보이는 곳이다. 아바나보다 한적하고 덜 붐빈다. 알록달록한 작은 우산들을 하늘에 걸어 놓은 골목길, 기념품 가게들, 노점상, 널찍한 광장들이 역사의 향기를 안고 차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살사 바에 가면 왜 ‘산티아고 데 쿠바’가 광적이고 열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알 수 있다. 열정적인 쿠바의 춤꾼들과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다 보면 관광객들조차 이 도시의 열기에 감염된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와는 또 다른 쿠바의 매력을 간직한 사랑스러운 도시다.
“혁명의 출발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
이곳은 정치의 도시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데 쿠바 공항에 내리면 ‘반군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 ‘영원히 영웅적으로’라고 쓴 커다란 포스터들이 보인다. 이곳은 쿠바 혁명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와 피델 카스트로가 묻혀 있는 곳이다. 호세 마르티는 1894년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벌이다 죽었는데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이름은 쿠바 어딜 가나 볼 수 있다. 그는 16살 때 1차 쿠바 독립 전쟁에 참가한 후 쿠바 내에서 혁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한다. 1894년에 뉴욕에서 쿠바 혁명당을 조직한 뒤 돌아와 일으킨 제2차 독립 전쟁에서 호세 마르티는 전사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호세 마르티‘를 존경했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제 2의 도시로서 혁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 몬카다 병영(Cuart el Moncada)이 있다. 노란 색깔로 칠해진 이 건물은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 기예르모 몬카다(Guillermo Moncada) 장군의 이름을 딴 병영이었다. 군대 막사 겸 교도소로 지어진 곳인데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이 공격을 했었다. 게릴라전은 실패로 끝나고 카스트로는 잡혔지만 최초로 카스트로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장소u서 유명해졌다. 지금은 쿠바의 근대사를 소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비밀 투쟁 박물관(Museo de la Lucha Clandestina)은 식민지풍의 건물로 낭만적으로 보인다. 이곳은 18세기말 아이티 혁명으로 쫓겨난 프랑스인들이 이곳에 와서 지은 바로크 양식의 저택으로 거주용으로 쓰였다. 그후 1940년대에 교육기관으로 사용되다가 경찰서 본부가 되었는데 카스트로의 공격을 받아 망가졌다. 1976년 본래 구조를 살려 복원한 후, 비밀 투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1950년대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 반대해 벌어진 수많은 활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당시 사용된 무기와 혁명가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문서, 쿠바에서 펼쳐진 비밀투쟁과 주요 사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산티아고 데 쿠바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uba)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다. 1514년 교회가 처음 생겼는데 그때는 언덕 위에 작게 지어졌다가 훗날 새롭게 건축되었다. 1522년, 교구회였던 것이 대성당으로 승격했다. 그후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계속 재건되었다.
마르테 광장(Plaza de Marte)는 18세기 후반에 처음 지어진 도심 광장이다. 1868년 10월 10일 일어난 쿠바의 첫 독립 전쟁‘인 10년 전쟁’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자유의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20세기 초반, 이 광장을 중심으로 호텔, 상점, 병원들이 들어서며 번영했다.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은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한 광장으로 1991년 지어졌다. 가운데에는 쿠바 독립 군대 사령관이던 안토니오마세오(Antonio Maceo)가 말을 타는 형상의 동상이 있다.
이처럼 ‘쿠바 데 산티아고’는 스페인과 벌어진 독립 전쟁의 흔적들과 동시에 카스트로가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의 흔적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으로 근대 역사의 수많은 기념물들이 있다. 대상이야 어쨌든 그 시절의 그들이 외친 것은 자유와 독립이었고 ‘산티아고 데 쿠바’는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 도시는 문화와 춤의 열기와 동시에 혁명의 열기가 혼재한 매력적인 곳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고향이었던 산티아고 데 쿠바”
산티아고 데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의 고향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8년 독재자 바티스타와 싸워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쿠바를 지배하다가 2016년 90세의 나이에 죽은 혁명가이면서 또 독재자였다. 독재자 바티스타가 산타 클라라의 전투에서 지고 도망치자, 피델 카스트로는 이 도시에 왔다. 이곳의 구시가지에는 고풍스러운 옛날 스페인 건물들이 많은데 광장 한가운데 있는 3층 건물의 2층 발코니에서 1959년 1월 2일 피델 카스트로는 대중들에게 첫 연설을 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주민, 그리고 쿠바의 모든 애국 동포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했습니다. 길은 힘들고 멀었지만 우리는 드디어 해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첫 혁명 실패 후, 멕시코로 도망갔다가 마침내 쿠바로 돌아와 승리한 것이다.
1898년,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4개월 만에 미국이 승리하자 스페인은 쿠바에서 물러간다. 쿠바는 미국의 군정 이후 독립했으나 종속국으로 만든다. 이후 1959년까지 반세기 이상, 쿠바는 미국의 충실한 설탕 공급기지이자 경제적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쿠바의 정치는 어지러웠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 부패, 폭정에 대항하여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27살의 나이에 1953년 7월 26일 동생 라울과 함께 1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체포된 후,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려라.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역사는 나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바티스타는 젊은 카스트로를 1년 뒤 특사로 석방했고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탈출해서 체 게바라도 만난다. 이들은 1955년 요트 그란마(Granma,할머니)를 타고 쿠바에 재입성한다. 상륙지점에서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에 82명의 동지가 12명으로 줄어드는 고난 끝에 동부 산간에 거점을 마련한다. 이들은 지역민들에게 대민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간다. 피델 카스트로는 지도자로서 활약했고 의대생이었던 체 게바라는 의료 대민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1958년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무능한 겁쟁이 독재자 바티스타는 재산을 싸 들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한다.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 와서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추방한 것을 선포하고 쿠바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것이 쿠바 혁명이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카스트로는 미국 기업이 소유하던 공장이나 농장, 호텔 등을 모무 국유화해 버렸다. 쿠바와 미국의 사이는 끝이 났고 쿠바는 소련에 접근하게 된다. 반미 친소 정책을 강화했으나 1990년대 초반 소련과 공산권이 몰락하자 쿠바는 더욱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러나 2014년 12월 18일, 1961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된 지 53년만에 국교를 정상화한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는 2016년 11월 25일, 생을 마친 후, 자신의 고향이자,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가 묻힌 ’산티아고 데 쿠바‘에 와서 묻힌다.
“피델 카스트로의 무덤”
호세 마르티와 피델 카스트로의 무덤이 있는 곳은 ‘타이 피헤니아 공동묘지’다. 그런데 카스트로의 묘지에 막상 가면 커다란 바위에 붙은 초록색 사각 구리판에 ‘FIDEL’이라는 글자밖에 없다. 그 어떤 수식어도 없고, 성도 없다. 그는 살아생전에 유언하기를 자기 이름을 딴 동상, 기념탑, 박물관, 거리 이름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무덤도 그렇게 간결하다. 그의 동상은 쿠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는 어딜 가나 동상, 거리 이름에 나타나고,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 역시 그를 기리는 박물관, 동상이 있고 그의 사진과 기념품이 넘쳐나는데 정작 50년간 권력을 쥐었던 독재자라고 일컬어지는 피델 카스트로의 흔적은 전혀 없다. 90살을 살다 갔던 피델 카스트로는 모든 살아생전의 일이, 그저 살아서의 일이지 죽고 나면 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쿠바 국민들의 태도”
여행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를 하기란 힘들다. 쿠바 국민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지나가면서 잠시 듣는 이야기나 기사로 판단해야 하는데 여전히 그에 대한 좋은 평가는 있다. 그는 독재와 무능과 부패에 휩싸였던 쿠바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순수한 열정으로 혁명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후 장기 집권과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유산은 묘한 체제를 만들었다. 독재면서도 우상 숭배나 극심한 전체주의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반대자들에 의하면 일당 독재로 탄압했다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데 요즘 들어서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2022년 5월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코로나 사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식료품, 의약품 부족은 더욱 심각하고, 서방 제재로 최대 고객 러시아 관광객이 끊기면서 관광 산업이 마비되자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연간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쿠바를 찾았었고, 이번에 코로나가 진정되면 약 250만 명의 해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다. 그만큼 관광은 쿠바에게 매우 중요한 산업이고 쿠바의 경제는 허약하다. 러시아에서 오던 식량 및 의료품등의 원조도 끊어져 더욱 힘들어하고 있다. 쿠바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0∼2021년에 -9%를 기록했고 국제 원자재 가격 폭등과 환율 하락 등으로 물가는 치솟았다.
2022년 10월 이후 약 10만 명의 쿠바인이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었는데 이런 수치는 1994년 쿠바 난민 위기 당시의 규모를 넘어서고, 최고였던 1981년 수치에 근접하는 것이다. 난민들은 무엇보다도 식량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쿠바 난민 사태가 심각해지자 트럼프 시절 내려졌던 쿠바에 대한 송금·여행 규제를 완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쿠바에서는 2021년 7월에도 수십 년 이래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었다. 당시 시민들은 '독재 타도'와 '자유' 등을 외쳤고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외쳤다.
앞으로 쿠바가 단번에 좋아질 상황은 아니다. 쿠바의 자연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쿠바의 역사와 정치를 돌아보고, 직접 현실을 접하고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목적이 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쿠바 국민들의 태도”
여행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를 하기란 힘들다. 쿠바 국민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지나가면서 잠시 듣는 이야기나 기사로 판단해야 하는데 여전히 그에 대한 좋은 평가는 있다. 그는 독재와 무능과 부패에 휩싸였던 쿠바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순수한 열정으로 혁명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후 장기 집권과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유산은 묘한 체제를 만들었다. 독재면서도 우상 숭배나 극심한 전체주의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반대자들에 의하면 일당 독재로 탄압했다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데 요즘 들어서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2022년 5월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코로나 사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식료품, 의약품 부족은 더욱 심각하고, 서방 제재로 최대 고객 러시아 관광객이 끊기면서 관광 산업이 마비되자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연간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쿠바를 찾았었고, 이번에 코로나가 진정되면 약 250만 명의 해외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다. 그만큼 관광은 쿠바에게 매우 중요한 산업이고 쿠바의 경제는 허약하다. 러시아에서 오던 식량 및 의료품등의 원조도 끊어져 더욱 힘들어하고 있다. 쿠바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0∼2021년에 -9%를 기록했고 국제 원자재 가격 폭등과 환율 하락 등으로 물가는 치솟았다.
2022년 10월 이후 약 10만 명의 쿠바인이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었는데 이런 수치는 1994년 쿠바 난민 위기 당시의 규모를 넘어서고, 최고였던 1981년 수치에 근접하는 것이다. 난민들은 무엇보다도 식량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쿠바 난민 사태가 심각해지자 트럼프 시절 내려졌던 쿠바에 대한 송금·여행 규제를 완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쿠바에서는 2021년 7월에도 수십 년 이래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었다. 당시 시민들은 '독재 타도'와 '자유' 등을 외쳤고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외쳤다. 앞으로 쿠바가 단번에 좋아질 상황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