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르네상스의 탄생지, 도시 전체가 명품인 피렌체(플로렌스)
로마가 이탈리아 고대 역사의 중심지였다면 도시 국가로 분산된 중세에 크게 꽃이 피었던 도시는 피렌체다. 이탈리아어로는 피렌체(Fireze),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인 이 도시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시절에 피렌체는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도나텔로, 마키아벨리 등이 이 도시 출신이다.
“도시 자체가 명품인 화려했던 피렌체의 역사”
두 강 사이에 있는 피렌체는 기원전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 건설하였다. 플로렌티아(Florentia, 흐름)라는 이름은 어원적으로 ‘꽃’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카이사르의 부장 피오리노(플로리아누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반면에 이 지역에 꽃이 풍성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거나, 꽃과도 같은 아름다운 시민들이 이 도시에 넘쳐났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또한 로마 신화에 나오는 꽃의 여신 ‘플로라르’를 기념하는 봄축제(Ludi Florales) 시기에 건설된 것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어느 설이 맞는가를 떠나서 피렌체(플로렌스)는 꽃과 관련이 많다. 이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 두오모(Duomo)의 공식 이름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고 도시 자체가 중세 시절에 활짝 피어난 꽃처럼 화려하고 번성했었다.
피렌체는 상업중심지로 발전했었지만 그후 동고트인들의 지배도 받았다. 774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다. 샤를마뉴는 제2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그리스-로마 전통과 기독교, 게르만족을 하나로 통합했고 훗날 서로마 황제가 된다. 프랑크 왕국 밑에서 피렌체는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국의 일부가 되면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피렌체가 크게 발전한 것은 15세기부터였다. 피렌체를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지배한 메디치 가문은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귀족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였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등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또한 마키아벨리같은 정치학자도 16세기에 이런 풍토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유럽을 지배하게 되자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 편에 붙는다. 프랑스와 카를 5세가 전투를 벌일 때 메디치 가문은 자랑하던 ‘검은 군단’ 병력을 프랑스에 지원했으나 카를 5세에게 패배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계속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침공했으며 피렌체에서도 메디치 가문을 쫒아 내고 공화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후 교황과 화해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을 다시 복위시켰지만,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는 독일에게 산업권을 뺏기면서 쇠퇴하게 된다. 그래도 메디치 가문은 계속 피렌체 공국의 주인으로 남았고 오히려 주변 지역들을 흡수하여 1569년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웠다. 하지만 1737년 메디치 가문이 단절되자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지방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게 된다.
그후 피렌체는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나폴레옹이 세운 트루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토스카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합스부르크 가문을 쫒아 내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류했다. 피렌체는 그후 탄생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었다. 1865년부터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피렌체는 1871년 로마에게 수도의 지위를 내주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르네상스 시절의 많은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서 현재에 이른다.
중세 시절 피렌체의 화려했던 명성은 유적지에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은 현대의 명품으로 태어났다. 이곳에는 많은 명품 패션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구찌, 페라가모, 파네라이, 토즈 등의 브랜드가 이 도시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하지만 이 도시 자체가 명품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수많은 교회,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등이 남아 있고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피렌체는 1982년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Duomo -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피렌체의 중심에 있는 웅장한 대성당 ‘두오모’는 피렌체의 상징이다. ‘두오모’는 하느님의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Domus가 어원으로,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이란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두오모’가 있다.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인데 이 뜻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도시든 두오모 근처에는 시청이나 중요한 행정 관서가 있으니 두오모야 말로 그 도시의 중심이었다. 이 대성당 앞에서 서는 순간 중세 시절, 피렌체의 위용이 어떠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종교를 떠나서 건축물의 웅장함과 내부의 화려한 장식 앞에서 누구나 다 감탄하게 된다.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산 로렌초 성당”
두오모(대성당) 북서쪽에 있는 이 성당은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진 성당이다. 1421년에 시작되어 1446년까지 만들어진 성당인데 성당의 2층에 있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은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만 권에 이르는 메디치가의 고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설립했다.1523년에서 1571년 완성한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건축한 것이다. 성당의 뒤쪽에는 메디치가 사람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메디치가 예배당(CappelleMedicee)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Gallerie Degli Uffizi)”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키오 궁전 바로 옆에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메디치 가문의 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다. 18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단절되자 메디치 가문에서 수집하고 기증한 그림들을 이곳에 전시해왔다. 이곳은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한 번에 일정 인원만 들어갈 수 있게 관리해 대기 시간이 상당히 긴 편이다.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우피치 미술관 뒤쪽에 있는 다리로,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일한 다리다. 이 근방에 환전상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지금은 온통 귀금속 매장으로 가득 차 있다. 원래는 푸줏간들이 많이 모인 거리였는데 이곳을 지배하던 메디치가의 코시모가 베키오 다리 2층의 회랑을 통해서 시청사(지금의 우피치 미술관)까지 출근했는데 근처에서 푸줏간 냄새가 나고 길이 더럽다고 해서 귀금속 거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출근하던 통로인 바사리 회랑(Vasari Corridor)이 우피치(그 시절의 시청)-베키오 다리 2층- 피티궁(자신이 살던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관광객이 들어가 볼 수는 없다.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13세기부터 지금까지 피렌체의 중심으로 현재는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되고 일부는 박물관이다. 두오모와 함께 피렌체의 상징이다. 안을 돌아보고 타워에 올라가면 멋진 피렌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에서 보면 두오모 돔과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의 야경”
아르노 강을 건너 도시의 남쪽으로 가면 미켈란젤로 광장이 있다.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71년에 조성되었으며 중앙에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상 복제품이 우뚝 서 있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아르노 강과 베키오 다리, 피렌체 두오모(대성당), 웅장한 건축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불빛이 번쩍이는 피렌체의 야경도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피티 궁전”
베키오 다리 건너편에 있으며 피티가의 루카 피티가 브루넬레스키에 의뢰해 만든 곳이다. 루카 피티의 죽음과 파산으로 방치되어 있던 중, 피렌체 공작 코시모 데 메디치가 1549년 구입하여 이후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이 주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궁전보다도 궁전의 일부인 보볼리 정원이 더 유명하다.
“조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좁은 계단을 따라 82m에 달하는 전망대에 오르면 시가지의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에서 바라보는 황홀한 피렌체 전경과 일몰 풍경”
피렌체의 도심지로 들어가면 그 웅장함, 화려함, 현란함 속에 파묻힌다. 하나하나 명소를 돌아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피렌체를 내려다보는 곳에서 보면 또 다른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것을 보려면 ‘산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으로 가면 된다. 강 건너 도시의 남쪽에 위치한 산 위의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남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성당은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높은 언덕에 있고 토스카나에 있는 가장 뛰어난 로마네스크 건축물 중 하나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멋진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로마 황제 데키우스 시절(출생 201- 사망 251) 로마군에 복무했던 아르메니아 대공 ‘산 미니아토(혹은 미나스)’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로 참수를 당했으나 그는 스스로 잘린 자신의 머리를 집어 들고 아르노강을 건너 그의 운둔지였던 피오렌티누스 언덕(Mons Fiorentinus)으로 걸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 성소와 예배당이 세워졌는데 현재 보고 있는 교회는 1013년 알리브란도 주교에 의해서 건설되기 시작했고 그후에도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성당 내부는 넓은 지하 묘실 위에 설치된 단 위로 솟아 있는 성가대석이 있는 초기 성당의 모습인데 모자이크 무늬가 들어간 바닥과 함께 장식들이 화려하다. 지하 묘실에는 ‘산 미니아토’의 유해가 있다고 하지만 이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메스’로 옮겨갔다고 한다.
피렌체 전체 풍경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이곳을 찾아온다. 특히 일몰 풍경을 보러 많이 온다. 그렇다고 산 정상이나 바다에서 서쪽 하늘의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니다. 남쪽의 언덕에서 북쪽의 피렌체를 바라보는 것인데 거대한 산맥의 스카이 라인과 은은한 핑크빛 속으로 흐릿하게 잠겨 들어가는 장엄한 피렌체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