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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 최대 종파 겔룩파의 총본산인 룸텍사원

c.unsplash.com/Expressive Capture

룸텍 사원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총 본부지만 인도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고 여권을 맡기고 들어가야 하는 사원이 되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티베트 불교에는 여러 종파들이 있는데 최대 종파가 겔룩파로 노란 모자를 쓴다 해서 ‘황모파’라고도 하며 그파의 수장을 ‘달라이 라마’라고 부른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계속 환생해서 현재 매우 유명하고 노벨상을 탄 달라이 라마는 14대다. 예전에 있던 뇌룡파는 부탄으로 와서 부탄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검은 모자를 써서 ‘흑모파’라 불리는 ‘각규파’가 있다. 그 각규파의 수장을 ‘까르마빠(Karmapa) 라마’라고 부르는데 부처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까르마빠 라마’와 ‘달라이 라마’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파가 다른 수평한 관계다.

"룸텍 사원(Rumtek Monastry)과 파벌 분쟁”

1959년 중국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고 탄압하자 최대 종파인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대’는 24세의 나이에 포탈라 궁에서 탈출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로 간다. 각규파의 지도자인 ‘까르마빠 라마 16대’도 1959년에 티베트의 추루푸 사원을 탈출해서 시킴의 룸텍으로 온다. 시킴에는 이미 1700년대에 각규파의 사원이 건립되었었고 새로 지은 룸텍 사원에서 16대 까르마빠는 이곳이 룸텍의 본산임을 선포한다. 그후 이곳은 각규파 학문과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1981년에 어떤 유언이나 계시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게 되자 각규파는 혼란에 빠진다. 그밑의 서로 뜻을 달리하는 승려들이 일단 집단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환생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갈라졌다.

까르마빠 라마 16대가 죽은지 11년이 지난 후인 1992년에 한쪽 파는 티베트를 방문해서 환생자를 찾아낸다. 1985년 8월에 출생했고 그 시절 일곱 살이었던 어린 소년을 16대가 환생한 ‘17대 까르마파 라마’로 결정했다. 이것을 훗날 달라이 라마 14대도 형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런데 다른 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티베트에서 10살난 소녀 ‘우켄 팅리’를 환생자로 찾아내서 1994년 4월 뉴델리에서 ‘17대 카르마빠’로 추대한다. 그러자 이미 소년을 까르마파 17대로 추대한 파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방해하면서 폭력사태로 번졌다.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각규파의 재산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룸텍의 각규파 사원에 ‘우겐 팅리’도 있지 못하고 뉴델리 남부로 거처를 옮기면서 강톡의 룸텍 사원은 지도자가 없는 사원이 되었다.
한편 티베트에 남아 있었고 달리이라마 14대로부터도 인정받은 소년 ‘카르마빠파 라마 17대’는 불안했다. 중국 정부도 그를 인정했지만 그들의 속셈은 어린 ‘까르마빠 라마 17대’를 이용하여 티베트인들의 영혼을 지배하려 했고 암살 사건이 시도된 적도 있었다. 불안에 떨던 ‘까르마빠 17대’는 14세의 나이인 1999년 12월 28일 밤에 사원을 나와 4명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12월 30일 무스탕을 거쳐 네팔로 왔고, 3일만인 2000년 1월 4일에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후, 1월 5일에 다람살라에 도착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 이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었다. 인도로 온 ‘까르마빠 17대’는 각규파의 본산지인 강톡의 룸텍 사원으로 오고 싶어했으나 이런 분란이 있어서 오지 못하고 다람살라의 어느 사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룸텍 사원을 인도 군인들이 지키고 있지만 그리 긴장된 분위기는 아니다. 룸텍 사원은 히말라야 산맥의 아름다운 경치로 둘러싸여 있고, 사원 안에는 많은 불교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매일 예불이 진행된다. 이곳에 가면 어린 스님들이 공부하다가 잠시 쉬면서 놀이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여전히 룸텍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가장 중요한 사원 중 하나로 여겨지고 매년 전 세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