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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중세 시대를 볼 수 있는 곤다르

곤다르(Gondar, Gonder)는 1635년에서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였다. 그곳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중세 시대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대부분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지어진 성, 교회 및 기타 왕실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며 모든 에티오피아의 유적지 중에서 ‘스톤 처치’가 있는 랄리벨라(Lalibela) 다음으로 눈에 띄는 곳이다.

“에티오피아 관광의 중심지”

곤다르(Gondar, Gonder)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서북쪽으로 300여km 떨어져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인구가 36만 명이라 아디스아바바에 이어 에티오피아 제2의 도시다. 시가지는 청나일강의 발원지로 유명한 타나 호수 근처에 있다. 타나 호수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2,133m의 고원 도시며 7, 8, 9월에 비가 많이 온다.
곤다르에는 1635년 ~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 제국의 파실 게비(Fasil Ghebbi, 왕실 구역)가 있다. 이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파실리데스(Fasilides) 왕이 세운 파실리데스 성이다. 이것은 튼튼하고 요새같은 성이다. 그외에도 이야수(Iyasu)의 궁전, 다윗(Dawit)의 홀, 연회장, 마굿간, 멘테압(Mentewab) 황후의 성, 도서관 및 세 개의 교회들이 있다. 18세기 초엽 이야수 2세가 건설한 데브라 베르한 셀라시에 성당은 누추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차 있어서 감탄을 자아낸다.
곤다르 근처에는 파실리데스 욕탕(Fasilides’ Bath)이 있으며 매년 열리는 뜸캇(Timcat) 축제,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 때는 이곳에서 의식을 치르고 목욕을 한다. 또한 곤다르 시내는 1930년대 후반 이탈리아 점령의 영향 때문에 이탈리아풍의 건물들이 있다. 한때 점령 관리와 이탈리아 주민들이 살던 인근의 빌라와 아파트도 이탈리아풍이다.

“유서 깊은 에티오피아의 고대, 중세 역사”

곤다르(Gondar)나 랄리벨라(Lalibela) 같은 유적지를 음미하려면 그 나라의 고대, 중세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가가 없던 상태에서 부족들로 살다가 서구 열강들의 식민 정책에 의해 근대 국가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에티오피아는 먼 옛날부터 역사를 갖고 있던 나라였다. 인류학자들은 에티오피아 고원과 주변 지역에 고인류의 기원이 된 인간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루시’라고 이름 붙여진 32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아프리카 아시아어족 인구가 나일강 또는 중동 지역에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구약 성서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 시바 왕국(Sheba)은 아라비아 반도의 끝, 지금은 예맨 부근에 있던 왕국이었다. 기원전 950년부터 기원전 115년까지 존속했던 왕국이었는데 여왕의 본래 이름은 마케다이고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빌키스’로 기록하고 있다. 시바의 여왕은 기원전 950년 – 930년 경 시바의 금과 향료 및 보석으로 가득찬 800마리의 낙타가 이끄는 무리를 이끌고 솔로몬을 방문해 그의 지혜를 시험한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었고 거기서 나온 아들 메넬리크 1세인데 훗날 아버지 솔로몬을 찾아가서 십계명을 담았던 ‘언약궤’를 갖고 온 후, 에티오피아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에티오피아인들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검은 아프리카인들과 생김새가 다르다. 그들은 중동 지방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혼혈종이다.)
이런 이야기는 구약 성서 ‘열왕기 상‘ 10장과 ’역대 하‘ 9장에 나와 있고 코란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사이에서 나온 메넬리크가 에티오피아의 고대국가인 악숨 왕국을 건국했다고 한다. 이것은 역사에 비추어볼 때 전설처럼 들린다. 악숨 왕국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세기 경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에 오늘날의 에리트레아와 티그라이 지역에 해당하는 홍해 연안에서 ’다못‘으로 불리는 왕국이 세워져 기원전 4세기까지 존속하였는데, 이들은 홍해 건너편의 나라들과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못 왕국의 멸망 후 서기 1세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악숨 왕국‘이었다. 그런데 악숨 왕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기원전 1000년경에 셈족 계열의 민족이 서아시아의 농법과 철의 기술을 가지고 홍해를 건너 오늘날 에티오피아 지역에 이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기원전 300년대, 기원전 500년대에 왕국이 세워졌다는 등 설이 많다. 그러므로 기원전 1000년경에 아주 조그만 왕국을 지배한 왕이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낳은 메넬리크 1세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훗날 악숨 왕국이 4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자기들 왕국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기독교 구약 성경책에 나오는 시바왕국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선조를 의도적으로 연결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진실이야 어떻든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지배자가 솔로몬 왕의 핏줄이라는 것을 믿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어쨌든 악숨 왕국은 기원전 120년경에 악숨을 도읍으로 하였고 기원후 1세기경에는 에티오피아 고원 이외에 북동부의 사막에서 동부의 소말리아, 홍해 너머 아라비아 반도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3세기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예언가 마니는 당대 가장 강력한 국가 4개로 로마, 페르시아, 중국과 함께 악숨을 꼽을 정도로 번영한 나라였다는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이후, 20년이 지난 333년에 악숨 왕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339년에는 국교로 선언해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등과 함께 초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다.
악숨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에티오피아인’이라고 밝혔고, 기독교를 초기에 받아들인 나라였기에 현재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악숨 왕국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주변 국가들이 전부 이슬람을 믿고, 또 에티오피아도 이슬람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유지된 것은 이런 역사 때문이다. 거기에 자신들의 기원을 기원전 1000년 경의 솔로몬왕과 시바의 여왕에 두는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스스로 지키게 했다.
악숨 왕조는 6세기경 이슬람의 발흥으로 영토를 빼앗기면서 기독교 나라들과의 무역이 점점 멀어지며 고립되었고 결국 10세기경에 망한다. 훗날 ‘자그웨 왕조’가 등장하는데 자그웨 (Zagwe) 왕조는 랄리벨라에 독특한 ‘스톤 처치’를 세운 왕조였다.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이 왕조는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하고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자신의 국가에 ‘새 예루살렘(랄리벨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에 자그웨 왕조는 망한다.
그후 13세기 중반, 솔로몬 왕조가 나타나 자신들이 악숨 왕조의 혈통이라고 내세웠다. 기독교를 믿던 솔로몬 왕조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차차 귀족들이 반항을 하고 이슬람 세력이 저항하면서 나라가 축소된다. 이때 솔로몬 왕조를 도운 것이 포르투갈이었다. 그러나 오로모인의 침입으로 남동쪽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곤다르(Gondar)로 옮긴다.
(오로모인들은 현재 에티오피아의 다수 민족으로 약 4천만 명이다. 종교는 55-60%가 수니파 무슬림을 믿고, 40-45%가 에티오피아 정교회 및 개신교를 믿고 있다 한다. 오로모인들 민속 신앙은 아프리카 여러 부족과 다르게 유일신 신앙인데 아브라함을 믿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구분을 철저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
1632년 곤다르로 수도를 옮긴 후, 18세기에 군벌들에 의해 나라가 분열될 때까지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이어졌지만 왕권은 쇠퇴하고 1769년에서 1855년까지 이곳저곳에서 왕을 옹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분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