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로고 카카오톡 상담하기
56th of 99 different holidays
56
6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가 있는 ‘엘 미라도르’ 마야 유적지 트레킹

c.unsplash.com/paweł wielądek

과테말라 북부, 멕시코와의 국경 지역에는 ‘Reserva de Biosfera Maya’ (마야 생활권 보호지역)이라는 거대한 삼림이 있다. 이 정글 깊숙한 곳에 엘 미라도(El Mirador, 전망대라는 스페인어)라는 마야 문명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문명은 마야 문명 중 가장 오래된 문명이다. 기원전 1000년 – 서기 250년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기원전 3세기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가 기원후 1세기까지 번성했으나 차차 소멸되었다. 그러다 9세기에 다시 후손들이 건설을 하려 했으나 9세기 말경 포기했다. 이 문명이 만든 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다고 알려졌으나 정글 속에 파묻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그동안 숨어 있었다.

“엘 미라도르의 번영과 멸망”
엘 미라도르 유적지는 1000년의 세월을 정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지금도 그곳까지 가려면 정글로 뒤덮여 있어서 몇박 며칠의 트레킹이나 비행기로 갈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그렇게 꽁꽁 숨어 있던 이 유적지는 1885년 클라우디오 루루티아(Claudio Urrutia)에 의해 조사되었지만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후 이 안 그라함(Ian Graham)이 1962년에 이 지역의 첫 번째 지도를 만들고, 1978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의 Bruce Dahlin의 지도 아래 고고학 프로젝트로 시작되면서 주목을 받았고. 여러 연구자들이 함께 작업하면서 1983년에야 작업이 끝났는데 놀랍게도 엘 미라도르 문명이 티칼같은 지역의 큰 마야 고전 도시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1000년경에 일어났으며 기원전 3세기에 번성했던 문명이란 것을 밝혀냈다.
기원전 3세기에 어마어마한 돌로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그 돌의 합이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더 크다고 하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 작업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했을까?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는데 분명한 것은 그것을 만들만큼 인구가 풍성했고 힘을 모을 만큼 중앙집권적 사회였다는 것이다. 마야인들은 피라미드 신전을 '쿠 나(K'uh nah)'라고 불렸는데 이는 '신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전들은 단을 쌓아올린 제단 위에 건설되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피라미드 형태였다.
학자들은 인구 증가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이 지역의 있는 많은 바조(계절 늪)이라고 한다. 열대림 토양에는 영양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대부분의 영양분은 비에 의해 씻겨 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마야 문명은 매우 생산적인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들은 돌을 쌓고 그 안에 진흙을 채워 넣는 테라스 밭을 만들었다. 거기에 늪에서 영양분이 많은 수천 톤의 진흙을 캐내 테라스 밭을 채웠다. 그러자. 양분이 많은 흙에서는 옥수수, 호박, 콩, 카카오, 목화, 야자 등 다양한 작물이 잘 성장했고, 땅에 영양분이 고갈될 때마다 진흙을 한 겹 더 추가하면 테라스 밭의 작물은 잘 자랐다. 이렇게 식량이 풍부해지자 당연히 인구는 늘어났고 어마어마한 피라미드를 만들 인력이 생겼다.
엘 미라도르 유적지에는 마야식의 3개의 커다란 피라미드가 있는데 하나는 엘 티그레(El Tigre, 숲에서 높이 55m)라는 별명을 가진 피라미드, 다른 하나는 La Danta 피라미드(높이 약 72m), Los Monos 피라미드(높이 48m)가 있다. 특히 La Danta 피라미드 총 부피(2,800,000 제곱미터)를 고려하고 사원이 세워진 거대한 인공 플랫폼(약 180,000제곱미터)를 계산에 포함하면 일부 고고학자들은 La Danta를 기자 피라미드보다 더 큰 건축물이라고 간주한다.
엘 미라도르 분지의 도시와 자매 중심지는 기원전 300년과 기원 후 1세기 사이에 번창했지만 그 주변 지역의 모둔 주요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기원후 약 150년경에 버려졌다. 이 도시를 버린 이유로는 삼림 벌채로 인한 토양 침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축물을 치장하기 위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태워야 했고, 또 마야인들은 건물, 집, 바닥을, 스투코(stucco)라고 불리는 석회 회반죽 층으로 미장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회반죽은 페인팅을 쉽게 하는 멋진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었다. 이렇게 치장된 벽토를 사용하여 마야인은 매끄러운 벽으로 된 피라미드와 '포장된' 도로, 아름다운 공예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것이 과시적 소비로 진화하기 시작하면서 나무의 숲을 너무 사용했다는 것이다. 1톤의 석회 시멘트를 생산하는데 5톤의 석회석과 5톤의 목재가 필요했다고 계산하고 있다. 결국 나무가 사라지자 토양이 느슨해지고, 물이 흙을 씻어내려 가며 도시를 뒤엎고 영양분이 많은 흙이 있는 비조(늪)도 덮으면서 이제 농부들은 양분이 많은 늪의 흙을 테라스 밭에 사용하기도 힘들어졌다. 결국 농작물의 수확은 줄어들었고 기아와 사회 붕괴로 이어졌다. 후에 9세기에 다시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테말라의 신비로운 마야 유적지 엘 미라도르 트레킹”
엘 미라도는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트레킹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테말라 북부, ‘페텐 이트사 호수’ (Lago Peten Itza) 근처의 ‘Flores’란 도시에 가면 많은 여행사들이 있고 그곳에서 하는 투어를 이용하면 된다. 어떻게 코스를 잡는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왕복 80 – 120km 정도를 4일에서 6일 사이에 걷는 트레킹이다. 2천년 전 마야인들이 다녔던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정글 체험은 어드벤처다. 자연을 헤쳐가며 2천년 전의 역사를 더듬어가는 도전이 흥미진진한 길이다. 불편하지만 야생 동물 울음소리도 듣고, 정글에서의 깊은 밤도 체험하게 된다. 또 적막한 유직지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가운데 2천 년 전의 마야인의 생활을 상상한다. 이런 경험은 다른 마야 유적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트레킹을 하면서 오기에 너무 멀고 험한 길이기에 사람들이 없다. 그만큼 짜릿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말을 타고 가는 여행”
엘 미라도르까지 말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트레킹 기간을 2-3일 정도 줄일 수 있지만 편한 것은 아니다. 정글 속의 불편함을 견디고 야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에 이런 여행도 택할 수 있다.

“헬리콥터 여행”
‘엘 미라도르’ 유적지까지 헬리콥터를 타고 가능 방법도 있다. 이것 역시 여행사를 이용하면 된다. ‘페텐 이트사 호수’ (Lago Peten Itza) 근처에 있는 ‘플로레스(Flores)’라는 도시의 공항 ‘Aeropuerto Internacional Mundo Maya’에서 헬리콥터를 타면 엘 미라도 유적지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 길도 없고, 집도 없고, 농장도 없이 다만 푸른 정글만 펼쳐진 세상 위를 날아간다. 한 시간 정도 날아가면 마야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큰 피라미드가 보인다. 하늘에서 보면 어떻게 이런 정글 속에서 문명이 번창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헬리콥터는 그 정글 속의 조그만 빈 터에 착륙한다. 이곳에서부터 엘 미라도 유적을 돌아보는 시간은 4시간. 가이드가 앞장서서 기원전 300년경에 건설된 건축물들과 정교한 예술품과 장식품들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가장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 널리 펼쳐진 정글숲을 바라본다.

“갑자기 사라진 고대 마야 문명”
잉카, 아즈텍 문명은 13세기에서부터 16세기 사이에 등장했던 중세 문명이다. 그러나 마야 문명은 기원전 2000년 경에 등장해서 서기 1200년대에 소멸된 긴 고대 문명이다.

잉카(Inca) 문명은 잉카제국이 일으켰다. 잉카 제국은 13세기 초부터 나타나 페루의 쿠스코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잉카 제국은 1438년부터 무력 정복과 평화 조약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영토를 넓혀 현재의 페루, 에쿠아도르, 볼리비이의 남서부, 아르헨티나의 북서부, 칠레의 북부, 콜롬비아의 남부 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지배하다가 스페인 원정군에게 1533년 멸망 당한다. 잉카제국에는 다양한 건국 신화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창조신 ‘비라코차’가 백인의 얼굴에 수염이 있었는데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 원정군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비라코차 신이라고 여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즈텍(Aztec) 문명은 아스테카(Azteca) 문명이라고도 하는데 스스로는 메히까(Mexica)라고 불렀고 현재의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명이다. 이들은 1250년경부터 1521년 즉 스페인의 원정군, 코르테스에 의해 멸망 당하기 전까지 번성했던 왕국이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호수의 테노치티틀란 섬에서 시작했으며 이들 역시 잉카 문명처럼 허망하게 코르테스에게 멸망당했다. 이들은 잉카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가 잉카문명보다 먼저 망했다.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아즈텍 문명의 전설에 나오는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로 여겨 환대했었다. 아즈텍 문명은 적을 포로로 잡으면 인신공양을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마야(Maya) 문명은 중남미 대륙에서 가장 번성했던 문명이다. 마야 문명이 가장 오래되었고 신비하며 수준 높은 문명이다. 마야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1200년경까지 드넓게 퍼졌고 약 3천년간 흔적을 남겼던 고대 문명이다. 잉카나 아즈텍처럼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몰락하고 사라졌다가 나중에 그 유민들이 스페인 제국에 흡수를 당했다.
마야 문명은 멕시코 동남부와 유카탄 반도,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등 중미에서 번영했던 문명이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 체계와 고도의 문화를 향유했으며 높은 수준의 예술, 건축, 수학, 달력, 천문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라는 단어는 당시 유사한 지역 전체에 살고 있던 민족들을 통칭하는 단어지만 정작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동일한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여기지 않았고 도시 국가 형태로 살았으며 스스로를 마야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각 도시 국가 중에 과테말라에 있던 ‘엘 미라도르’ 왕국은 기원전 1000년 – 서기 250년에 번영했던 왕국으로 차차 소멸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후손들이 건설을 하려 했으나 9세기 말경 포기된 유적지다. 그후 온두라스의 코판 유적지(기원전 750년- 800년)가 있고, 멕시코의 팔렝케 유적지(기원전 200년– 800년), 멕시코 시티의 테오티우아칸(기원전 2세기-7세기), 과테말라의 티칼 유적지(200년-900년), 멕시코 쪽에 있는 치첸 이차 유적지(600년-1200년) 등이 있다.
이 도시 국가들은 서로 연결된 마야 제국이 아니라 도시 국가들로서 마야 문명을 가진 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마야 문명은 단일한 제국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으로서 드넓게 퍼졌는데 약 3천 년 동안 유지되다가 명확한 이유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기원도 명확치 않다. 다만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어났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길게 보면 기원전 6, 7천년경. 황하 문명이 기원전 5천년경,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천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보면 이들의 후예가 베링 해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후,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넘어가면서 구대륙의 기술과 관습이 북미 인디언, 중남미 대륙에 축적되면서 기원전 2천년 경부터 서서히 문명을 일으키며 피라미드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마야문명의 시기”

마야 문명은 시기가 길다 보니 구분을 한다.

고대 기원전 8천년- 기원전 2천년
이 시대에는 첫 정착촌들과 농업의 초기 형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마야 선고전기(Preclassic period)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25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본다. 이때 최초의 마을들과 농업이 만들어졌다. 마야인들이 쿠엘로(현재의 벨리즈)에 정착한 시기는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기원전 2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태평양 해안에는 약 기원전 1800년경에 도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당시 마야인들은 이미 옥수수, 콩, 칠리 고추들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정착해 생활하며 도자기를 만들고 점토로 상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후 조그만 마을들이 점차 도시들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50년경에 지어진 신전들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유카탄 반도의 북부 저지대에서도 점차 사람들이 정착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00년 경 거대한 사원들이 등장하고 기원전 400년경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군주와 왕들이 등장하게 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상형문자들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페텐 분지, 과테말라와 같은 지방들에서 절대다수의 도시들이 생겨났다.
마야 고전기(Classic period)
기원후 250년부터 나타난다. 마야 달력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형식의 신전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도시국가들이 복잡한 교역로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마야 저지대에 티칼과 카라크물 이 두 개의 도시가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때는 멕시코 지역의 테오티우아칸이 마야 문명을 가진 국가들에게 거대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현재의 멕시코 시티에 있는 이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는 누가, 언제, 왜 만들었고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어서 ‘테오티우아칸 문명’이라고 따로 부르고 있다. ‘테오티우아칸’이란 이름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라진 뒤 600년 정도가 지난 후인 1250년경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성장한 아즈텍 문명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9세기경이 되자 마야의 전통적인 도시들은 모두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아마도 식량난, 전염병 때문에 살 수 없는 땅이 되었고,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이 도시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이주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만 하고 있다.

마야 후고전기(Postclassic period)
마야 문명은 일부 지방에서는 번영을 유지했다. 버려진 도시에 재정착하지 않았고, 유카탄 반도는 버려졌으며, 문명의 중심지는 북부 저지대와 고지대로 올라갔다. 치첸이차가 마야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6세기가 되어 스페인 제국의 세력이 침투하면서 차차 마야 문명의 소왕국들은 강제적으로 병합되기 시작했고 1697년에 마지막 마야 도시인 노즈페텐이 스페인에 함락됨에 따라 마야의 전통적인 역사는 끝나게 된다.

“마야인들의 문화”
마야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신화들을 수많은 책에 기록했는데 스페인 식민시대에 많이 파괴되어서 현재 3권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마야의 석비나 건물들에 새겨진 문자들을 사용하여 고대 역사를 해독해내고 있다. 마야인들은 매우 복잡한 달력 체계를 만들어 냈으며 수학에 0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문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0은 인도 문명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마야의 전통 신앙과 언어는 열성적인 가톨릭 선교사들의 포교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존속했다. 260일을 1년으로 잡는 마야 전통 의식 달력은 여전히 과테말라 북부에서 사용될 정도고 현재에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마야어를 자신의 모어로 사용하여 조상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마야 문명이 평화로운 천문학자-즉 사제들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1950년대부터 점차 마야의 문헌들이 해독되기 시작하면서 그 안에 적혀 있던 호전적이고 잔인한 마야 지도자들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마야인들이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아스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과는 달리, 마야 문명은 단 한번도 1개의 거대한 왕국이나 제국으로 통합된 적이 없다. 마야 문명 속에서 각 도시국가들은 다양한 정치구조를 갖고 독자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통일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정치구조 속에서 각 국가 지도자들은 동맹, 복속, 전쟁 등을 하면서 이합집산을 했다. 전쟁은 마야 문명에서 매우 흔했고, 원인은 무역로 확보, 전쟁 포로 확보, 상대 도시 국가의 파괴 등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야인들은 초현실세계를 믿었고 현실 세계와 중재시켜주는 이들이 샤먼이었다. 샤먼들은 환각제를 사용하여 신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권력층들은 종교적인 제사를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확립했고, 천상계에는 13개의 층이 있었으며 지하에는 9개의 층이 있다고 믿었다. 지상계는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의 층들은 정확한 방위들로 또 나뉘었다. 마야에도 동양과 같이 사방색이 있었는데, 북쪽은 흰색, 남쪽은 황색, 서쪽은 검은색, 동쪽은 붉은색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들은 이 방위들과 색깔들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피는 마야의 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제물로 여겨졌다.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 그 피를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은 마야의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였다. 전쟁에서 잡혀온 타국의 높은 직위의 귀족이나 왕족 포로들이 제물로 바쳐졌으며, 낮은 계급의 포로들은 제물로 바칠 가치가 없다하여 노예로 썼다. 포로로 잡힌 왕을 죽일 때에는 함부로 목을 베지 않고, 포로에게 신과 같은 복장을 입힌 뒤 목을 쳐 죽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옥수수의 신이 죽음의 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었던 당시의 마야 신화를 재현한 것이었다. 인신공양은 잉카 문명에서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아즈텍 문명이 대량으로 인신 공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