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로고 카카오톡 상담하기
99 different holidays
75
5

엄청난 전쟁 속에서 살아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c.unsplash.com/Milana Jovanov

우리에게 사라예보는 과거 탁구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 사라예보를 품고 있는 보스니아는 내전, 학살 등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한 20세기 초반으로 올라가면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된 암살 사건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보스니아와 그 나라의 수도 사라예보는 이제 그런 상처를 딛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스포츠로 알려진 도시, 그러나 정치적인 사건으로 유명한 곳”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줄여서 보스니아라고도 불리는데 그 수도인 사라예보는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사라예보는 우리에게는 1973년 세계 탁구 선구권 대회의 단체전 우승으로 알려졌다. 지금과는 달리 50년 전, 대한민국은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은 전 국민을 감동시켰다. 구기 사상, 단체전에서 최초의 우승이었다. 그때의 대표적인 선수가 이에리사 선수였다. 그리고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로서 우리에게는 스포츠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시절 사라예보는 유고슬라비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정치적 사건과 많이 연결되어 있다. 146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된 곳이며, 그‘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었다. 그후 이곳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다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세르비아군에게 학살당하는 끔찍한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전쟁 후, 보스니아와 사라예보는 다시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해체와 갈등들”

1992년까지 존속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안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배경으로 한 6개의 나라가 있었다.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1974년 이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다른 연방 구성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진 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와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이끌던 나라는 세르비아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곳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하고, 1991년 9월 8일에는 마케도니아가 독립하며 1992년 3월 2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1992년 4월에는 세르비아 공화국이 몬테니그로와 함께 ‘신유고 연방’을 결성했으나 2006년에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되면서 연방이 해체되고 세르비아 공화국만 남았다. 또한 2008년 2월 17일에는 세르비아 내의 자치주로 있던 코소보가 독립하면서 한때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세르비아 공화국은 내륙 국가로 축소되었다.

독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진통을 겪은 나라가 보스니아와 코소보다. 보스니아가 1992년 3월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신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아가며 사라예보를 오랜기간 동안 포위하여 학살과 성폭행등을 자행했다., 코소보는 1998년 3월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저항했으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밀로셰비치 등은 알바니아계, 무슬림 주민을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하면서 억압했다. 그러나 2008년 2월에 코소보는 마침내 독립했다.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해체와 갈등들”
1992년까지 존속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안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배경으로 한 6개의 나라가 있었다.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1974년 이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다른 연방 구성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진 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와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이끌던 나라는 세르비아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곳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하고, 1991년 9월 8일에는 마케도니아가 독립하며 1992년 3월 2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1992년 4월에는 세르비아 공화국이 몬테니그로와 함께 ‘신유고 연방’을 결성했으나 2006년에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되면서 연방이 해체되고 세르비아 공화국만 남았다. 또한 2008년 2월 17일에는 세르비아 내의 자치주로 있던 코소보가 독립하면서 한때 유고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세르비아 공화국은 내륙 국가로 축소되었다.
독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진통을 겪은 나라가 보스니아와 코소보다. 보스니아가 1992년 3월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신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아가며 사라예보를 오랜 기간 동안 포위하여 학살과 성폭행등을 자행했다. 코소보는 1998년 3월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저항했으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밀로셰비치 등은 알바니아계, 무슬림 주민을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하면서 억압했다. 그러나 2008년 2월에 코소보는 마침내 독립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특한 정치 체제”
보스니아는 '두 개의 국가 세 개의 민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연방, 국토의 51%)과 스릅스카 자치 공화국(세르비아계, 국토의 48.5%) 등 두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1995년 12월, 국제 사회가 개입해서 체결된 데이턴(Dayton) 평화협정에 의해 그런 체제가 만들어졌다. 보스니아 내전 때 훗날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지역의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격하고 사라예보를 포위해서 학살을 자행했었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세르비아계가 많이 살고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무슬림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있다. 1국가 2체제는 국제 사회가 데이턴 협정을 통해서 만든 질서고 보스니아 내전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었기에 현실적으로 다른 종교, 다른 민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현재 스릅스카 공화국의 세르비아계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세르비아 공화국에 속하고 싶어 하는 정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보스니아 내에 있는 크로아티아계도 독립을 원하게 되고, 그럼 보스니아는 갈기갈기 찢겨지는 과정에서 나라의 존립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화약고가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라예보 포위전의 상처와 보스니아 독립과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구 구성은 무슬림인 보스니아계가 48%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37%였다. 세 번째는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4%였다. 그렇다보니 독립과정에서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라는 이름의 유래는 오스만어로 '보스니아의 궁전'을 가리키는 단어인 '사라이보스나(Saraybosna)'가 슬라브화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시작되었기에 보스니아계는 무슬림을 많이 믿고, 세르비아계는 동방정교회를 믿고 있다. 이처럼 민족, 종교가 다른 데서 오는 갈등이 독립과정에서 폭발했다.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그후 유고슬라비아 연방도 해체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원했지만 의견이 갈라졌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유고 연방에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고 반면에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독립을 원했다. 보스니아는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독립 여부에 대해서 투표를 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선거를 보이콧해서 투표율은 63.4%였는데 독립 찬성율은 99.7%였다. 그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2일 독립을 선포 한다..
그러자 보스니아에 속해 있던 세르비아인들 민병대 약 13,000명이 사라예보를 포위했다. 신유고연방의 지원을 받았던 세르비아 민병대는 대포, 박격포, 전차, 대공포, 중기관총, 로켓 발사기, 지대공미사일, 저격총 등을 이용하여 사라예보를 공격했다. 1992년 5월 2일부터는 사라예보를 봉쇄하고 도시 내부에서는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들을 죽였다. 이 포위전에서 민간인 5,434명을 포함한 13,952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실상이 밝혀지는데 집단 학살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포위 직전 사라예보의 인구는 525,980명이었는데 포위전이 끝난 이후 사라예보 내의 생존자들은 300,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사망자가 10만 -2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난민이 220만 명 정도가 발생했다.
1992년 8월에는 보스니아에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스릅스카 공화국을 만들어 독립하고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이름으로 보스니아를 계속 공격한다. 뒤에서 지원한 세력은 같은 세르비아계인 신유고 연방이었다. 1992년 4월 6일, 유럽연합 외무장관 12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고 통보했고 미국도 다음날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그러자 전쟁은 점점 확산 된다. 세르비아계 군인들은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 등의 국민들을 체포하고, 살해하고, 약탈했다. 보스니아의 많은 남성들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학살당했으며 많은 여성들은 구금되고,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군의 저항에 의해 전쟁은 포위전의 형태로 전개된다. 1992년 5월 세르비아계 군은 사라예보를 봉쇄하고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막았다. 1992년 하반기와 1993년 상반기 사라예보는 포위된 상태에서 계속 세르비아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한다. 1992년 5월 30일부터 유엔의 보급품으로 사라예보 시민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
사라예보 포위전은 현대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중의 하나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된 1992년 4월 5일부터 1996년 2월 29일 끝날 때까지 무려 1,425일 동안 스릅스카 공화국군에게 포위당했다. 이 포위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포위전보다 약 3배나 긴 기간이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보다 1년 더 길다. 그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사라예보는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시내를 걷다 보면 폐허들과 총탄 자국들이 가득한 건물도 볼 수 있다.

지속되던 전쟁 중에 1994년 2월 5일 1차 마르칼 학살이 발생한다. 민간인 68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하여 유럽의 NATO군이 개입하며 세르비아군에게 폭격을 가하게 된다. 세르비아군은 나토군에게도 저항하면서 전쟁은 이어졌지만 결국 세르비아군은 사라예보에서 철수하고 도시에 전기, 난방, 물 공급이 재개되었다. 1995년 10월에는 정전협정을 맺고, 12월 14일에는 데이턴 협정을 맺으면서 평화가 찾아온다. 보스니아 정부는 1996년 2월 29일 세르비아계군이 도시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사라예보 포위전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사라예보에 있던 세르비아인 7만 명도 보스니아를 떠나 세르비아인들이 새로 만든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후퇴했다.

전후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포위 전 기간 동안 있었던 반 인류 범죄로 여러 명을 기소했는데 그 중에서 ‘신유고 연방’의 대통령이었던 밀로 셰비치는 헤이그 국제사법 재판소에서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받았다. 그는 보스니아 학살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지만 특히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를 해서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2006년 3월 재판 받는 과정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또한 전쟁과 학살에 대해서 가장 책임을 많이 질 만한 위치에 있었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 카라지치(세르비아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분쟁은 여기만 있던 것이 아니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 인들은 크로아티아의 독립에 반발하여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그 후,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나자 크로아티아는 참전하면서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을 공격해 1998년 완전히 통합해 버렸다. 또한 카톨릭계인 그들은 한때 보스니아 내의 무슬림들도 죽였지만 세르비아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보스니와 연합하여 세르비아계와 싸웠다.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사라예보의 시민들”

약 30년 전까지 극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라예보는 이제 평화를 찾았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의 수도지만 소박하고 인구밀도가 낮다. 전쟁 전에는 사라예보의 인구가 525,980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 300,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줄어든 이유에는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함께 세르비아계들이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에는 고층 빌딩도 보이지만 무슬림 지구에 가면 튀르키예의 중소 도시같은 분위기다. 이곳은 물가도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내전 이후에는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다수인 도시 특성상 술을 팔지 않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고, 히잡을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정부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우려하여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와 전쟁 속에서 서로 다른 민족, 종교가 하나를 강하게 드러낼 때 다른 세력들이 반발한다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카톨릭계의 크로아티아와 동방정교회의 세르비아가 즉각 개입하게 되고 보스니아는 또 전쟁 속으로 휘말리기 때문이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무슬림, 동방정교회, 카톨릭 등 다른 종교가 혼재하며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의 서글픈 운명이다. 그렇기에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곳이 보스니아다.


“라틴 다리에서의 암살과 1차 세계대전”
사라예보에는 밀랴츠카 강이 흐르고 있는데 많은 다리가 있다. 그 중에서 라틴 다리(Latin Bridge)는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암살 사건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이곳에서의 사건이 전 세계의 변화를 촉발시켰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었다. 프린치프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했다. 그는 남슬라브인들이 모두 함께 남슬라브족 단일 국가를 만들자는 ‘남슬라브주의 운동’을 벌였는데 그 중심이 세르비아가 되어야 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한편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이 평등하게 지내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슬라브계 민족이 동등하게 동맹에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온건 정책이야말로 세르비아인들의 독립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보고 그를 제거시키려 한다. 처음에는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폭탄을 던졌으나 다른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황태자 부부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다가 라틴 교 인근의 골목에 숨어있던 프린치가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고 범인들 또한 세르비아인이었지만 사라예보에 살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것이 뒤에서 세르비아의 선동 때문이라 보고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오스트리아는 동맹국 독일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세르비아를 공격한다. 그러자 같은 슬라브계였던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한다. 이에 독일도 오스트리아 편을 들면서 참전하게 된다.
1914년 7월 28일- 1918년 11월까지의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이 한 편이 되고 러시아, 프랑스, 세르비아가 한 편이 되어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들이 계속 참전하게 된다. 독일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던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이 참전하고, 일본은 영일 동맹에 의거해서 독일에 선전 포고한다. 1914년 11월에 오스만 튀르키예도 참전하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서고, 이탈리아 왕국도 1915년에 참전한다. 그리고 미국이 1917년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세르비아의 편에서 참전한다.
1차 세계대전은 ‘황태자 암살 사건’이 촉발시켰지만 그 배경은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두고 일어난 세력 다툼이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고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은 패전하면서 영토가 찢겨 나가고, 러시아 제국은 전쟁 중에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망한다. 이렇게 국제 질서가 변했고 이런 불안한 구조는 결국 2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씨앗이 된다.
세르비아계 청년이 위대한 ‘남슬라브족’ 국가 건설이란 환상에 빠져 벌인 일이 전 세계를 어마어마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그 현장이 라틴 다리다. 역사를 알고 라틴 다리를 걷다 보면 그 다리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라틴 다리 앞 상점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사라예보 사건과 관련된 볼거리들이 전시되고 있다. 당시 황태자가 탔던 차의 복제품 등도 있다.

“사라예보의 볼거리들”
사라예보는 관광지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의 흔적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있다. 현재 사라예보 시청(Sarajevo City Hall)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기간 동안 사라예보에 건설된 가장 호화로운 건물이고 바슈카르지아(Bascarsija)는 1400년대부터 운영된 번화한 시장이자 문화적 명소로 식사와 쇼핑을 즐길 수 있는데 무슬림들이 많아서 튀르키예 분위기가 나는 곳이기도 하다. 세빌리 샘(Sebilj Brunnen, Fountain)은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중심에 있는 오스만 스타일의 목조 분수다.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Gazi Husrev-beg Mosque)도 있다. 1532년에 완공된 발칸 제국의 주요 오스만 건물 중 하나이자 국가 최대 이슬람 사원이다. 사라예보에는 카톨릭의 흔적도 있다. 사라예보 로마 카톨릭 대성당(Katedrala Sarajevo) 은 보스니아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자 가톨릭 예배의 중심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Bosnia and Herzegovina) 보스니아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