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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매력을 갖고 있는 문화, 교통의 교차로 페샤와르

c.unsplash.com/Muhammad Hussam

파키스탄 중부에 페샤와르(Peshwar)란 도시가 있다. 북쪽은 중국, 동쪽은 인도, 서쪽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뻗은 길이 교차하는 곳이다. 중국에서 온 비단이 여기를 거쳐 서방과 인도로 갔고,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이곳을 지나 중국으로 넘어갔다. 지금도 페샤와르는 수많은 물건과 여행자들이 오가는 흥겨운 곳이다.

- 일정 종료후 선택사항 입니다.

“페샤와르, 혼돈의 매력”
폐샤와르의 구시가지에 가면 정신이 없다. 알록달록한 문양을 그린 트럭이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질주하고 삼륜차를 개조해 만든 오토릭샤, 자전거, 당나귀 수레들이 어지럽게 얽히는 거리다. 터번과 회색 숄을 걸친 남자들과 검은 차도르로 몸을 숨긴 채 걷는 여인들이 길거리에서 뒤섞이고 토담집 사이의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논다. 이런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삶의 생기는 넘쳐 흐른다. 구시가지 노천시장 바자르는 온갖 잡화점과 음식점들이 있고, 카세트 테이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늘 넘쳐나고 있다. 또 폐샤와르의 근교에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이 있다. 구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소련군이 물러난 뒤에도 이곳에 살고 있다. 만약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정치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곳이 되면 이 도시는 세계 각지에서 오가는 문명과 인간들의 교차로로서 엄청난 매력을 가진 곳이 될 것이다. 사람들도 활력있고 친절한 편이어서 정이 드는 곳이다.

“페샤와르의 역사와 중요성”
페샤와르 지역은 여러 왕국과 문명이 거쳐 갔다. 기원전 326년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당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데, 대왕의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 발전한다. 그후 인도에서 일어난 마우리아 제국은 이곳에서 수도 파탈리푸트라 (파트나)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놓았고, 이는 현대의 그랜드 트렁크 로드로 이어지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잇는 길이 되었다. 그렇게 페샤와르 지역으 2천 년간 간다라 지방의 교통 중심지였다. 마우리아 왕조가 쇠퇴한 후, 기원전 2세기말부터 그리스계의 박트리아 왕국, 서기 1세기에는 파르티아 왕국, 2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페샤와르 지방은 불교화되었다. 그리고 간다라 미술과 불교가 결합되면서 이웃한 스와트 계곡, 택실라와 함께 간다라 예술과 불상이 이곳에 등장하게 된다.
그후 10세기부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세력들이 이곳에 등장하다가 12세기경에는 이슬람 세력인 호라즘 왕조에 지배당했지만 다시 몽골 제국의 침입을 받는다. 13세기 전반에 몽골은 이곳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14세기에 델리 술탄 왕조에 의해 재건되고 15-16세기에는 파슈툰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현재까지 인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무굴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16세기 후반에 반란이 일어났으나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에 의해 진압당하고 폐샤와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 18세기에는 아프간을 중심으로 나타난 두리니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중반에는 시크 왕국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849년에는 제2차 시크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그 후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 독립되면서부터 파키스탄의 도시가 되었다.
인도,파키스탄 분할 후 폐샤와르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주민들은 인도쪽으로 대부분 떠나 버렸고 1960년대에는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미국의 CIA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60-70년대에는 이국적인 문화를 갈구하던 히피들이 모여들어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곳이 되었고 그런 성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페샤와르에는 아프간 난민 50만명 정도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파키스탄내 파슈튠 족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현재 파키스탄 제6의 도시로,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21세기 들어서도 페샤와르는 몸살을 앓고 있다. 다른 북서부 도시들과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의 테러에 시달려서 2010년에만 111건의 테러가 벌어졌고, 2013년에는 시내 교회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었다. 2014년에는 테러로 200명 정도가 사망했고 2022년 3월 쉬아 모스크에서 테러가 터져 60여 명이 사망했다. 2023년 1월에는 경찰본부 주변에 있는 모스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101명이 사망하고 22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페샤와르란 도시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민족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혼재해왔고 지금도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로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도시 인구의 약 20%가 아프간인이며 현재도 테러 활동, 마약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폐샤워르로 가는 이유는 많은 문명, 상황이 혼재하고, 무질서, 혼돈의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며,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북쪽의 훈자, 길기트, 중국으로 가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서쪽의 카이버 패스, 동쪽의 인도, 남쪽의 파키스탄 남부로 가기 위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는 간다라 예술의 요람인 택실라, 스와트 계곡도 있다.

“동양, 서양의 물결이 밀려온 곳, 카이베르 패스”
페샤와르 서쪽 50킬로미터 지점에 카이베르 고개(Khyber Pass·카이바르 Khaibar)가 있다.그곳에 가면 커다란 성채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카이베르 패스가 시작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600년경에 아리안족이 살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점령했던 곳이다. 카이베르 패스는 거기서부터 한국의 속리산 말티고개처럼 구불구불 온몸을 뒤틀며 뱀처럼 정상을 향해 기어오른다. 지금은 평화로운 길이지만 세계 역사의 파동이 크게 칠 때마다 물결이 넘실거리던 현장이었다. 이 고개를 넘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인도로 향하는 부푼 꿈을 키웠고, 칭기즈칸은 세계 정복의 꿈을 불태웠다. 이슬람 세력이 이 고개를 넘어 인도로 들어갔으며, 영국도 이곳을 지나서 인도로 왔다. 카이베르 패스는 이 격동의 사건들을 모두 지켜봤다. 카이베르 패스를 넘으면 란디코탈이란 국경도시가 나온다. 예전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을 때나 알 카에다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그곳까지밖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후에는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고개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갔었다. 그후 엄청나게 사회가 변했었다. 엄격한 이슬람에 의해 통치됐던 그 도시에 웃음과 몸을 파는 외국 여인들까지 등장했었다. 그러나 탈레반이 다시 점령한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가혹한 탈레반 정권이 등장한 상황이다.

“아프간 난민들의 부슈카시 게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페샤와르 근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부슈카시(bushkashi)’라는 게임을 한다. 삼륜차를 타고 근교로 가면 흙담에 둘러싸인 운동장이 있고 20여 마리의 말과 기수들이 게임을 벌인다. 게임은 간단하다.. 기수들이 말을 탄 채 목이 잘린 양의 사체를 팔이나 발로 거머쥐고 본부석 앞의 원에 갖다 놓으면 상금을 타는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힘들다. 늠름한 기수가 양을 잡고 멀리 벗어나서 양의 한 발을 손으로 잡고 오른 다리로 양의 몸통을 감아 말에 밀착시킨 후, 본부석 앞의 원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린다. 그러면 나머지 기수들이 그에게 다가들어 양을 뺏는다. 양 다리를 잡고 뺏느라 양이 찢어질 것만 같다. 편도 없고 자기를 제외한 모든 이가 적인 셈이다. 어떤 이는 채찍으로 양을 잡고 있는 이의 말 잔등을 사정없이 후리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을 뚫고 어떤 이가 양을 원에 갖다 놓으면 즉석에서 100루피의 상금이 수여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게임이 반복된다.
그런데 기수와 말이 겪는 고통은 대단해 보인다. 기수가 모자를 벗으면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고 기진맥진한 표정을 짓는다. 가끔 낙마해 말발굽에 밟히는 이도 있다. 여기서는 말이 20∼30마리지만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00마리도 넘게 참가한다고 하니 부슈카시는 상당히 격렬하고 위험한 기마민족의 경기로, 세련된 서양의 폴로 게임이나 우리의 격구 게임의 원형처럼 보인다. 페샤와르는 빈곤하지만 이렇게 여러 문화의 원초적인 흔적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돈을 내고 총을 쏘는 ‘다라’ 지역”
폐샤와르 남쪽 약 40㎞ 지점에 ‘다라’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사는 파탄족(Pathans)의 마을이다. 파탄족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영국군, 구소련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근래에는 미군을 괴롭혔던 용맹한 산악 부족이다. 이들은 무기 제조에도 매우 능해 어떤 무기든 한 번만 보면 몇 시간 내에 뚝딱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다고 한다.
다라 근처에 가면 이쪽저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M16을 든 청년이 다가와 총을 쏘라고도 권한다. 공터에서 약간의 돈을 내고 권총이나 소련제 칼리시니코프등 다양한 총을 쏠 수 있다. 그 외에도 근처의 무기 상점에서는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박격포 등을 팔고 볼펜 총도 판다. 이들은 한때 이런 무기를 만들어 무자헤딘(성전 전사)들에게 팔았다. 주변에는 마리화나나 하시시 같은 마약을 만드는 집들도 있다.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하시시를 만들어서 팔고 있는데 이 을은 파키스탄 경찰도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한다.

“주의할 점”
주의할 점이 있다. ‘다라’와 발음이 비슷한 ‘바라’라는 곳에 갔다가 납치당할 뻔한 한국 여행자도 있다. 이곳은 매우 험악한 곳이고 웬만한 외국인은 납치당하는 곳으로 파키스탄 사람들도 무서워서 가지 못하는 곳인대 그만 다라와 바라를 착각하여 가게 된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2023년 현재는 페샤와르는 위험한 곳으로 외국 여행자들이 잘 가지 않고 있다. 가더라도 경찰서에서 퍼밋을 받아야 하고 보안요원이 호위하는 경우가 많다. 가기 전에 미리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샤와르는 이슬라마바드, 라호르, 훈자와는 상황이 다르다. 카이베르 패스나 다라는 혼자 가지 말고 팀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 카이베르 패스, 란디코탈은 경찰서의 퍼밋을 받고 경찰이 호송하여 가게 된다. 아프간 난민의 부슈카시를 보려면 오토릭샤를 타고 펠다우스라는 곳으로 간 뒤 그 근방에서 호나산 캠프로 가는 스즈키(삼륜차)를 타면 되지만 과거의 일이고 현재 상황은 모른다. 페샤와르의 상황은 계속 변하므로 가기 전에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