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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바사에서 캄팔라로 달리는, 미친 특급 열차 Lunatic Express

c.unsplash.com/David Lutta

영국은 우간다 빅토리아 호수 주변의 비옥한 땅과 케냐의 해안선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1896년, 케냐의 해안 도시 몸바사와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사이에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우간다에 주둔하던 영국 군인들에게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유럽인들이 케냐에 발을 들여 놓기전 케냐의 킴뇰(Kimnyole)이라는 주술사는 앞으로 사악한 ‘철뱀’이 나타나 평원을 가로질러 가축을 잡아먹고 그들의 땅을 약탈할 것이라 예언했다. 이 철뱀은 바로 ‘미친 급행 열차(Lunatic Express)였다.


“이 철도를 만들려고 했던 목적”

이 철도 건설은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투입된 32,000 명의 인도 인부들 중에서 2,500명이 사고, 질병, 마사이족의 공격, 사자의 공격 등으로 사망했다. 그 시절, 철도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영국인들은 주로 이집트, 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에 주둔했는데 광대한 지역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서아프리카를 점령했고 그곳에서 서서히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여 동서를 잇는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에 맞서 영국은 케냐의 해안에 있는 몸바사 항구와 나일강의 발원지인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동쪽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여 나일강 자체를 통제함으로써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의 진출을 막으려 했다.

“철도 건설의 어려움”

1895년 12월, 케냐-우간다 철도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은 영국 엔지니어 조지 화이트하우스(George Whitehouse)는 케냐의 몸바사 항구로 와 작업을 수행하는 가운데 프로젝트 비용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몸바사는 광대한 물없는 지역이었고 그 너머에서 사자와 말라리아를 퍼트리는 모기가 우글거리는 500km의 사바나와 덤불을 통과해야만 했다. 또한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로 분할된 화산 고원 지역이 있었으며 호수 기슭까지의 마지막 150km는 축축한 습지대였다.

철도 건설은 1896년 몸바사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5년 동안 엄청난 양의 자재가 몸바사 항구에 도착했다. 레일 200,000개, 침목 120만 개, 생선 접시 200,000개, 생선 볼트 400,000개, 강철 열쇠 및 강철 대들보 480만 개. 창고가 건설되고 노동자 숙소가 건설되었으며 수리점과 작업장이 열렸다. 한적한 해안 마을 몸바사는 현대적인 항구로 빠르게 변모했다.
그러나 첫해에 노동력의 절반이 말라리아, 이질 및 기타 열대성 질병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더위와 먼지 폭풍이 일꾼들을 괴롭혔다. 너무 환경이 열악해서 마치 아프리카의 정신이 백인 철도의 침입에 분개한 것만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식인 숫사자들의 공격”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1898년 차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 사자들이 캠프장을 공격해 잠자는 일꾼들을 공격해 죽였다. 일꾼들이 밤마다 천막에서 죽어 나가자 캠프는 곧 ’인간 정육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0개월 동안 135명의 노동자가 잔인하게 살해된 후에야 프로젝트 리더 패터슨 대령은 마침내 사자를 유인해서 죽일 수 있었다. 그 시기 동안 수백 명의 노동자가 차보에서 도망쳤고 공사는 거의 중단되었다.
철도 건설 중에 총 2,500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는데 이는 설치된 선로 1마일(1.6km)당 4명이 죽었던 것이다. 이 공사가 끝난 후, 약 6,700명의 인도 인부는 케냐에 남았고 케냐 최초의 인디언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Lunatic Line”

철도 건설 비용은 초기에 500만 달러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 900만 달러가 들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생기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반대자인 헨리 라부세르(Henry Labouchère) 하원의원은 영국 외무장관 조지 커즌(George Curzon)의 프로젝트 지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 형식으로 조롱하는 답변을 했었다.

비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목적은 머리로는 추측할 수 없으며,어디서 시작할지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으며,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용도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으며,운반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정의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George Curzon의 탁월한 강의에도 불구하고,그것은 명백히 정신나간 대사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운데 철도는 "미치광이"라는 ’lunatic’이란 단어로 묘사되었고 훗날 1971년 Charles Miller가 저서 The Lunatic Express: An Entertainment in Imperialism‘로 인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철도를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철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미치광이 특급 열차로 인한 변화”

그 후 100년 동안 철도는 동아프리카 내륙을 개척하고 해안과 연결하는 등 지역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도가 생기기 전 나이로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늪지대였지만 철도를 계획한 화이트 하우스( Whitehouse)는 나이로비 지역을 본부로 삼았다. 19세기 말에 나이로비는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춥고 습한 공급 캠프에 불과했다. 나이로비는 높은(해발 1,700m) 위치에 있으며 원래는 늪지대였다. 마사이족은 이곳을 "시원한 물"을 의미하는 "enkare nyarobi"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장소는 철도본부로 성장했고 1907년 영국 보호령은 나이로비를 수도로 선택했다. 그 후 도시는 급속한 성장을 했으니 철도가 도시를 만든 것이다. 결국 기차로 인해서 나이로비는 인구 3백만이 넘는 케냐의 가장 큰 도시로 변화했다.

그러나 우간다쪽 철도는 1963년 케냐 독립 이후 방치되었다. 다만 열악한 철도 사정과 잘 지켜지지 않은 시간, 연착에도 불구하고 이 기차는 케냐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다. 2016년 나이로비에서 몸바사까지 24시간이 걸릴 정도로 느린 열차지만 이런 느린 철도 여행, 불편한 철도 여행이야말로 ’아프리카다운 것‘으로 여기며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옛날 어려웠던 공사 현장도 상상하고, 차창 밖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초원, 습지대, 해안지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현지인들과 함꼐 어울리며 가는 시간은 인상적인 여행이었다.


“지금은 고속 열차가 달린다”

지금 중국의 투자로 생긴 고속 열차가 케냐 나이로비에서 몸바사까지 달리고 있다. 기차역이 매우 깔끔하고 기차도 현대식이다. 나이로비에서 고속 열차를 타면 몸바사까지 4, 5시간에 돌파한다. 일반 열차도 6시간 정도면 간다. 이것을 이용하려면 나이로비 공항 근처에 있는 고속 열차 역을 가야 하고, 또 몸바사 역에서 내리면 시내까지 들어오는 차를 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