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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입구, 돈황의 막고굴과 거대한 모래 언덕 명사산

중국어로는 ‘둔황’이라 발음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돈황’이란 표기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3대 석굴인 막고굴이 있는 곳을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요도시다.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라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敦(돈)은 크다는 뜻이고, 황(煌)은 ‘성하다’라는 뜻이니 돈황이라 크게 번창할 도시란 의미를 갖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이 도시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막고굴과 주변에 명사산이란 사막이 있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돈황의 역사적인 중요성”
돈황이 중국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한무제 때다. 약 2천 3백년 전,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던 그는 이 서역에도 하서 4군을 설치한 후, 돈황을 중심으로 서역지방을 경영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흉노족이 이곳을 지배했었다. 후에 토번(티베트], 위구르족, 서하, 돌궐족(투르크족) 등의 지배를 받았던 이 지역 주변에는 지금도 한족을 비롯해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이 살고 있다.

“돈황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돈황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한 서역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었다. 이른바 서역북도와 서역남도의 분기점이었다. 그런데 당시 번영했던 돈황은 지금의 돈황이 아니다. 그 시절의 돈황은 현재의 돈황에서 서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사막 밑에서 잠자고 있다. 그 다음 시기의 돈황이 어느 자리에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현재의 돈황은 18세기 초 청나라 때 만들어졌다.

“돈황 가는 길”
시안(西安)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란저우(蘭州)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서부터 작은 동산만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바퀴 소리조차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적막함 속에서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손오공과 저팔계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이 길을 허시(河西)회랑이라 부르는데, 황허 서쪽에서 돈황에 이르기까지 북쪽의 고비사막과 남쪽의 치롄(祁連)산맥 사이의 동서 800에 이르는 긴 띠 모양의 지대를 말한다. 즉 황허 서쪽의 긴 복도라는 뜻으로 동서를 잇는 동맥이었다. 당승 현장은 이 길을 가며 이렇게 외쳤다.
“길이 없다. 다만 사막을 헤매다 죽은 사람의 뼈를 보고 표적을 삼는다.”
그 험한 길을 지금은 쉽게 갈 수 있다. 시안에서 저녁 기차를 타면 두 밤을 보낸 후 새벽 네시쯤 돈황 역에 도착한다. 현재 돈황시는 돈황역에서 약 130km 떨어져 있다. 날이 밝은 후 버스나 합승 택시를 타고 황사 바람을 헤치고 사막 가운데 난 외줄기 길을 따라 2시간을 달리면 돈황이 나온다. 돈황에 도착하면 비로소 서역의 입구에 당도한 느낌이 든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돈황은 어딘지 푸근한 느낌이 든다. 시내는 별로 넓지 않아 걸어서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 호텔, 시장, 극장, 작은 백화점 등이 있는데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돈황의 여인들은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복스럽게 생겼는데 벽화 속의 여인들 같다.

”중국의 3대 석굴 중의 하나인 돈황석굴“
돈황이 유명한 것은 막고굴(莫高窟) 때문이다. 돈황 시내를 벗어나 버스나 차를 타고 사막 길을 30분 정도 달리면 벌집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산이 보인다 그곳이 막고굴이다. 천불동(千佛迵)이라고도 불리는 데 중국의 3대 석굴은 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석굴이다. 그 중에서 돈황석굴은 굴은 아담하지만 벽화가 가장 뛰어나다. 돈황 석굴은 벽화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고 특히 당나라 때의 벽화가 가장 아름답다.
막고굴 들어가기 전에 돈황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주요한 동굴과 벽화를 복제하듯이 만들어 놓아서 들러 보면 좋다. 또한 주로 17굴에서 발견한 문서 및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중요한 문서가 이미 스타인과 페리오가 영국이나 프랑스로 유출시킨 상태다.
막고굴은 서기 366년부터 만들어졌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모두 1000여개가 조성됐지만 현재 발굴된 것은 492개다. 1300년간 사막에서 잠자던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의 지리학자 스타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서였다. 1900년 막고굴의 주지로 있던 왕원록은 우연히 16굴 안에 봉해 있던 17굴에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한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스타인은 왕원록에게 약 1만 건의 문서를 산다. 한편 뒤늦게 달려온 펠리오는 20여일 동안 1만 5천여 건의 문서를 살피며 중요한 문서 5천점을 발견하는데, 여기에 신라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은 17굴로 장경동이라고도 하는데, 16굴로 들어가는 통로의 오른쪽에 따로 있는 조그만 굴로 막혀져 있었다.
흙벽으로 가려진 이곳에 수많은 불서가 보관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은 10세기 말 카슈가르(카스·喀什)에서 일어난 이슬람의 카라한 왕조로부터 불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다. 카라한 왕조는 서역 남도에 있는 호탄(허톈)을 점령한 후 불서를 깡그리 파괴했는데, 돈황을 그 시절 지배하고 있던 서하를 공격하려 하자, 서하는 불서를 장경동에 넣고 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오천축국전’이 이곳에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지만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다.
혜초 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719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스승의 권유로 인도 순례길을 떠났는데,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배를 타고 인도의 콜카타로 들어가 성지를 순례했다. 그리고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의 신장 지방으로 온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그가 4년간의 인도 순례에 관해 쓴 책이 ‘왕오천축국전’으로 그 당시 인도, 중앙아시아 등의 풍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혜초 스님은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오대산 보리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수많은 막고굴 안에는 불교에 관련된 수많은 벽화와 아름다운 불상조각들이 있는데, 237굴과 335굴의 벽화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신라인이 그려져 우린 민족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건조한 기후와 관광객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벽화와 조각들이 점점 손상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10여개 정도만 개방하고 있는데, 중요한 굴은 바로 밖의 박물관에 그대로 본떠 만들어져 있다.

“명사산(暝沙山)의 거대한 모래언덕과 밤하늘”
돈황 시내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명사산이란 사막이 있다. 밟고 올라갈 때 울린다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디. 칼날 같은 능선을 바라보며 모래산을 오르면 그 옛날 실크로드를 가던 대상이 된 기분이 든다. 명사산에는 월아천(月牙泉)이란 초승달 같은 호수가 있다. 길이 약 2백m, 폭 30m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신선이 산다 하여 호수 옆에 도교 사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가 있다. 단오날에는 근처 사람들이 모두 근처의 모래산에 올라가 액을 막기 위해 모래를 타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져서 마치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사막의 풍경을 즐긴다. 명사산의 사막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하고 환상적인 모래 바다다. 칼날 능선을 따라 사막길을 걸어가다 사막속으로 들어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있고, 낙타를 타고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으며, 모래 썰매를 타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여름철에는 밤 9시 30분까지 사막을 개방하니, 이곳에 가서 사막의 밤을 즐기고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사하라 사막같은 거대한 사막을 보고 싶다면 가까운 돈황의 명사산으로 가시라. 그곳에서 엄청난 모래 사막과 낭만을 즐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