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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매력적인 오아시스, 투루판

투루판(吐鲁番)은 중국 서부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로, 신장성 성도 우루무치에서 남동쪽으로 150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남북 60km, 동서 120km, 해발 154m에 위치한 낮은 분지다. 중국에서 가장 낮은 곳이며 세계에서는 이스라엘의 사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곳이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유적지들과 전통 우물인 카레즈와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매력적인 도시다.

“투루판 가는 길”
돈황에서 밤 기차를 타고 서역으로 가다 보면 북쪽으로 톈산(天山)산맥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간다. 일본 열도를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거대한 천산산맥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다른 해와 다른 달, 다른 바다와 다른 인종, 그리고 다른 동식물….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아침이 오고 기차는 투루판역에 도착한다.
투루판역에서 투루판 시내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 거리다.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위구르족 호객꾼들의 차량이나 미니버스를 이용해 얼마쯤 달리다 보면 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동서 120km, 남북 60km로 해발 마이너스 154m의 깊은 바닷속 같은 투르판은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사해 다음으로 낮은 분지다. 이곳에 오면 사람과 문화도 모두 바뀐다. 투루판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황량한 풍경은 사라지고 나무가 우거지고, 물이 넘쳐난다. 사람들도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쓴 위구르인들이 대부분이다.

“투루판의 역사”
투루판의 역사는 길다. 중국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에도 이곳에는 흉노족, 이란계, 위구르족들이 이룩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현재는 한족과 위구르족 등 24만 명이 섞여 살고 있으며, 위구르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서역의 입구이다.
투루판은 한때 천산남로의 핵심 도시로 엄청난 번영을 누리던 곳이었다. 고창국이란 왕국은 번영을 누렸으나 당 태종이 보낸 소정방에 의해 서기 651년 멸망한다. 그후 투루판이라는 지명은 15, 16세기에 이 분지에서 세력을 떨쳤던 고대 왕국인 투루판국과 그 도성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투루판은 위구르어로 '파인 땅'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투루판의 지형은 분지다.

“투루판의 유직지들”
이곳은 개인적으로 돌아보기가 힘들다. 교하고성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고창고성은 차로 가야될만한 거리라서 하루 차를 대절해서 전체를 돌아보기도 한다.

교하고성(交河故城)
투루판 근교의 유적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교하고성(交河故城)이다. 글자 그대로 하천이 마주치는 곳에 세워진 성인데 동·서·남쪽은 약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밑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곳이 고창고성과 함께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전한 시대에는 차사국(車師國)으로 불렸는데 ‘한서’에 의하면 700가구에 인구 6천 50, 병사 8백 65명의 조그만 왕국이었다. 차사국은 교통의 요지여서 항상 주변의 강국에 시달렸다. 한나라와 훙노족의 중간에서 시달리다가 급기야 왕이 한나라로 망명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무제가 훙노족을 완전히 몰아낸 후, 이곳에도 평화가 찾아오는데, 그후 중심지가 고창고성(高昌古城)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곳은 투루판 지역의 중심지였다.
교하고성은 14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잘 유지된 편이다. 그 이유는 이 거대한 도시는 벽돌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위에서 파 내려갔기 때문이다. 관청, 주택가, 집, 감옥 등 모든 시설이 남아 있는데 위에서 파 내려가면서 만든 것이다. 이 성이 오래도록 보존된 이유는 그런 공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벽돌로 만들어졌다면 폐허가 된 후, 주변 주민들이 다 갖다가 퇴비로 썼을 것이다. 남쪽에는 현장 스님이 방문해서 기거했다는 사원의 터도 남아 있다.

고창고성(高昌古城)
고창국의 도성이었던 고창고성 역시 폐허로 남아 있다. 후한이 멸망한 후 투루판 분지는 흉노족, 티베트족, 돌궐족(투르크족), 한족의 세력 각축장이었다. 원래 고창고성에 살던 이들은 한족이었는데, 후한 멸망 후, 4세기 무렵에 세력을 키워왔고 당나라보다 오히려 돌궐족과 가까웠다. 결국 당 태종은 소정방을 보내 서기 651년 고창국을 멸망시킨다.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들은 이 머나먼 서역 땅에도 등장했었다. 이곳은 교하고성과 달리 폐허로 남았는데 벽돌을 만들 때 버들가지나 마른 풀을 섞는 바람에 주변의 농부들이 퇴비로 썼기 때문이다.

화염산(火焰山)과 베체크리크
화염산은 메마른 산이다. 약 100km에 이르는 길고 긴 이 산을 현지인들은 ‘쿠즈로다고’라 부르는데, 빨간 산이란 뜻으로 불길이 치솟는 형상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지금은 건조 지대지만 먼 옛날에는 비가 내려 그 빗물 줄기가 깊이 패여서 만든 풍경이 마치 불이 치솟는 불길처럼 보인다. 이 산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은 여름에는 지표 온도가 60도를 넘고 겨울에는 – 20도까지 된다.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 인적 없는 화염산 중턱에는 베제크리크(바이쯔커리커) 석굴이 고즈넉이 들어서 있는데, 석굴 안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서양 탐험대에 의해서 반출되었고 이슬람교도들의 소행으로 눈이 뽑히고 팔과 목이 잘려 나갔지만, 한적한 이곳에 서면 폐허의 미를 감상할 수 있다.


“투루판의 매력”
투루판은 여름 기온이 50도까지 치솟아서 여름에 가면 졸음이 온다. 시장에 가도 다들 낮잠을 자거나 졸고 도시 전체가 잠에 빠져든다. 이때는 숙소에 와서 쉬어야 한다. 반면에 겨울에는 엄청난 추위가 몰아친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투루판은 중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가 수확되는 도시며 포도주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여름에는 포도나무 가로수에서 포도들이 매달려 있을 정도로 포도가 많은 도시다.
투루판에는 천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파낸 카레즈라는 우물이 있다. 수천 개에 이르는 이 투루판의 전통 우물은 당시 주민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며 연애하던 장소였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보존되고 있지만 연 강우량 16.6mm, 여름에는 기온이 보통 섭씨 50도를 넘는 이곳에서 카레즈는 삶의 휴식처였다. 지금도 위구르족의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여름철, 서늘한 밤이 되면 호텔의 야외 무대에서 화려한 복장의 위구르족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고 사내들은 코믹한 오리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무희들이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같이 춤을 추게 한다. 투루판은 이런 유적지를 돌아보고, 포도주를 마시고, 위구르족과 함께 춤도 추는 재미있는 곳이다. 현재 투루판은 개방화 물결을 타서 현대식 건물과 공원들이 생기고 거리는 번잡스러워졌지만 여전히 포도 덩굴 우거진 낭만적인 길과 유적지들의 폐허는 여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