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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 대상들이 목숨을 내걸고 횡단했던 고비사막

c.pixabay.com/Nyamdorj

고비사막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으로 몽골과 중국 사이에 넓게 펼쳐진 사막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으로 알려져 있다. ‘고비’는 몽골어로 ‘거친 땅’이라는 뜻인데 사하라 사막같은 모래 언독도 있지만 대개는 지독하게 거친 황량한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알타이 산맥과 스텝지대, 남쪽은 티베트 고원, 동쪽은 화베이 평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은 깐수성(감숙성)의 돈황, 주천 등이 있어서 서쪽의 고비사막 끝은 한족에게 변방의 끝으로 여겨졌었다. 고비 사막의 모래가 날려와서 한국에서는 황사라 부르고 있다.

- 돈황을 가려면 항공으로 고비사막을 넘어야 하고, 육로가 아닌 항공이동입니다

“고비 사막을 통과해 서역으로 가는 하서회랑(河西回廊) 길”
과거에 고비 사막 횡단은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구도자와 대상들은 말과 낙타를 타고 목숨을 내걸며 횡단하던 길이지만 지금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편하게 달린다.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천수(天水)라는 곳을 지나면서부터 공기가 건조해지고 메마른 벌판에 집채만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고비사막의 풍경이다.
기차가 난주(蘭州)를 지나고 황하를 지나면 하서회랑(河西回廊)이 펼쳐진다. 하서회랑은 황하의 서쪽에서부터 돈황에 이르기까지의 긴 띠 모양의 길인데 북쪽으로는 고비 사막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기련(祁連, 치이렌)산맥이 있다. 그 중간에서 ‘긴 복도’처럼 800km에 걸쳐 뻗어나가는 길을 ‘하서회랑’이라 하는데 사람들은 고비사막의 한 가운데를 피해 이 길을 통로로 사용했었다.
이 길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오아시스들이 있었다 기련산맥의 눈녹은 물이 만든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했고 대상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서역으로 갈 수 있었다. 즉, 하서회랑은 동서를 잇는 동맥이었다. 또 몽골 초원의 유목민과 티베트 고원의 강족(티베트족)을 이어주는 연결 기지로서 하서회랑은 십자로같은 교통의 요지였다.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 다툼은 치열했는데 주역은 한족과 흉노족이었다.

“흉노족이란?”
흉노족은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흉칙하고 늘 중국을 침략하던 유목민이라 야만적인 종족 같은 임지를 주지만 그것은 한족의 입장에서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흉노족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한족은 늘 북방의 초원지대를 두고 유목민족과 갈등을 겪었다. 한족은 흉노족은 물론, 몽골족, 만주족등 늘 싸웠고 결국 몽골족에게 지배 당해 원나라, 만주족에게 지배당해 청나라가 되었으니 중국의 역사는 사실 유목민족의 역사와 섞인 셈이다.
흉노족은 기원전 4세기말부터 1세기까지 약 5백년 간에 걸쳐 몽골 초원에서 위세를 떨쳤었다. 이들의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로 원래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서방의 초원 지역에 살며 다뉴브 강 유역까지 세력을 떨쳤던 민족으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목을 시작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는데 필요한 마구류 등을 발전시켰었다.
흉노족은 스키타이족의 일파로서 몽골 초원이나 천산 산맥, 기련산맥 부근에서 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흉노족이 발전한 것은 기원전 3세기말 등장한 영웅 묵특선우(선우는 흉노 언어로 ‘왕’이란 뜻)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몽골 초원을 통일한 후, 강력한 흉노 왕국을 건설한다. 훙노는 진시황의 공격을 받아 만리장성 밖의 고비 사막으로 추방되고 진시황은 이들을 경계하여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진이 망하자 흉노족은 다시 한나라를 친다, 이때 한 고조 유방은 포위되어 곤경에 처하는데 이후 흉노에 한나라 왕실의 공주를 보내게 된다. 감숙 지방에 살던 월지국도 흉노의 등쌀에 못 견뎌 천산북로의 이리지방(이닝)으로 쫒겨 가면서 흉노는 하서회랑 및 서역지방을 다스리게 된다.

“흉노족의 터전이었던 기련 산맥과 하서회랑”
흉노족은 매우 씩씩하고 거친 유목민이었다. 사기의 흉노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아이들도 말을 잘 타고 활로 새와 쥐를 잡는다. 조금 성장하면 여우와 토끼를 잡아먹는다. 전투에는 용맹하되 불리하면 달아난다. 이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젊은이는 기름지고 좋은 것을 먹고 노인은 그들이 남긴 것을 먹는다. 아버지가 죽으면 미망인이 생모가 아닐 경우 자기의 아내로 삼는다. 형제가 죽으면 미망인은 당연히 다른 형제가 차지한다.”
기원전 140년 한 무제가 즉위해서 흉노를 치니 이들은 몽골 초원으로 쫒겨나고 한나라가 하서회랑 및 서역 지방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다. 한 무제는 하서회랑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한다. (마치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하듯이). 그 위치는 현재의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이었다. 이후 흉노는 1세기쯤 역사에서 사라진 후, 약 200년이 지난 다음, 서양에서 ‘훈족’으로 등장하여 유럽을 침략한다.
이 흉노족의 터전이 기련산맥이 있는 하서회랑이었다. 하서회랑을 통과하다 보면 멀리 눈덮인 기련산맥이 보인다. ‘기련(치이렌)’이란 말은 훙노어로 ‘하늘’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즉 한민족에게 백두산, 천지가 하늘과 연관이 있듯이 이들에게는 물과 목초지를 제공해주는 ‘기련산맥’이 하늘의 산으로 신성시되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언지산(焉支山)있다. 연지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광대한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훙노족의 터전이었다. 이 땅에서 쫓겨나던 흉노족은 이런 슬픈 노래를 불렀다.

“기련산을 빼앗겨 소나 양과 함께 하던 생활을 잃었다. 또 연지산을 잃어 아가씨들이 화장할 연지도 이제는 없다.”

연지는 우리도 양 볼에 물들이던 바로 그 연지를 말한다. 그 원료가 되는 붉은 꽃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지 문화는 북방 훙노족에서 왔고, 미간에 찍는 ‘곤지’는 인도 쪽에서 온 문화로 보인다. 아마 연지, 곤지를 다 찍는 문화는 한국인만 갖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는 북방, 남방 문화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만리장성의 끝 가욕관
고비 사막의 끝에 있는 요새가 가욕관(嘉峪關, 자위관)이다. 동쪽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에서 출발한 만리장성이 6,300km를 달린 후, 이곳에서 머문다. 이곳은 서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출입국 심사를 받던 곳이고 외적의 침입을 막던 곳이다. 명나라 때인 1372년에 세워져 약 200–300명의 병사가 상주하고 있던 변방의 외로운 요새다. 그러니까 명나라 시절만 해도 이곳이 서쪽의 국경선인 셈이었다. 그후 1540년까지 여러 차례 복구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청나라가 되면서 국경이 확장되고 신장성이 중국 영통 포함되면서 가욕관은 더 이상이 변방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가려면 주천(酒泉)이란 역에서 내려 숙소에 짐을 풀고 버스를 타고 갔었다. 주천 시내에서 버스를 타면 30분 후에 도착하던 이곳이 이제는 곧바로 가욕관(자위관)역에 내려 갈 수 있게 되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현재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숙소나 식당들이 많은 곳이 되어서 옛날 변방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가욕관이 번성해도 주변은 여전히 사막이다. 가욕관에 오르면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고 고비 사막에서 불어오는 뽀얀 먼지 바람만 가득하다. 가욕관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으로 되어 있는 매우 견고한 고비 사막의 요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위풍당당한 3층의 성루가 인상적이다. 고비 사막에서 불어오는 사나운 바람이 이곳을 때리고 뽀얀 황토빛 먼지가 어지럽다. 지독한 바람을 맞다 보면 세상의 끝에 온 느낌이 든다.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세 가지”
주천의 가욕관을 나서면 본격적으로 고비 사막이 펼쳐진다.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사막을 통과해야 했다. 문명의 세계를 떠나 황량한 죽음의 세계로 통과하는 것이다. 그길에 세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여름이면 살인적인 투루판의 무더위, 겨울이면 하미 서북쪽에 있는 진서(鎭西)의 추위와 안서(安西)의 강풍이다. 예전의 구도자들이나 대상들은 낙타를 타고 가며 안서의 강풍에 눈을 못 떴고, 여름에는 투루판의 무더위에 시달렸으며, 겨울에는 진서의 강추위에 목숨을 걸고 길을 갔었다. 지금은 버스나 기차로 편안하게 갈 수 있다.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고비 사막의 풍경이 펼쳐진다. 남쪽에는 기련 산맥이 위용을 자랑한다. 하서회랑의 길을 달리는 것이다. 크고 작은 고비의 오아시스 마을이 30-40킬로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황량한 누런 벌판에 눈이 익을 무렵 갑자기 싱싱하고 푸른 포퓰라 나무들이 나타나면 마음도 푸근해진다. 양과 말이 넓게 펼쳐진 푸른 목초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그렇게 끝없이 고비 사막을 달려야만 돈황에 다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