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최고의 관광지, 트라카이 역사 국립공원 하이킹
트라카이 역사 국립공원(Trakai Historical National Park)은 1992년 지정된 리투아니아의 국립공원이다.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약 28km 떨어진 역사적인 도시 트라카이와 그 주변의 숲, 호수, 마을이 포함된 곳으로 즐겁게 하이킹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유럽에서 유일한 역사 국립공원이다. 트라카이, 특히 호수의 섬에 있는 트라카이 성은 섬에 지어진 유일한 동유럽 성으로 여행자들이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서유럽의 번잡한 관광도시처럼 예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하며, 아늑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리투아니아의 역사적인 도시 트라카이 국립공원 하이킹”
빌뉴스에서 약 28km 떨어진 트라카이 국립공원에는 32개의 호수가 숲들에 둘러싸여 있다.자연이 아름다우면서도 중세의 성이 있는 아늑한 중세 마을이다. 가장 큰 호수는 21개의 섬을 품고 있는 Glavė 호수고 가장 깨끗한 호수는 Akmena 호수다. Kudrionys 숲과 Plomėnų 및 Varnikai 습지에는 많은 동물고 새들이 찾아 들고 있다. 플로멘치(Plomėnų) 늪에는 물새들과 다양한 보호 식물들, 검은머리 매기의 대규모 서식지가 있다.
가장 큰 Glavė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 그곳에 있는 트라카이성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호숫가를 산책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만 보고 급히 떠나기에는 너무 아쉽다. 물론 성도 매력적이지만 이 마을을 경쾌하게 하이킹하면서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고 역사, 문화의 향기를 느끼는 시간을 즐겨야 한다.
트라카이는 14세기부터 이곳에 살면서 최고의 전통 페이스트리인 키비나이를 만드는 카라임 공동체로 유명하며 카라임(Karaim)의 전통 주택은 타라카이(Trakai)의 주요 거리에서 볼 수 있다. 또한 트라카이 마을과 바르니카이 습지 주변을 하이킹하여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트라카이 역사국 (Trakai Historical National Park Authority)은 1996년 바르니카이 식물원및 동물원 보호구역에 바르니카이 코지티브 워킹 웨이 (Varnikai Cognitive Walking Way) 를 설치했는데 이 트레일의 절반 정도는 일겔리스 습지를 통과하고 약 1.3km 길이의 목조 산책로가 놓여져 있다. 길은 작은 호숫가, 아름다운 초원, 숲을 따라 이어진다. 이 트레일에서는 희귀한 식물과 곤충, 새,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 많은 생물을 찾아볼 수 있어서 많은 이들이 이길을 방문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들르는 트라카이 성(Trakai Castle)”
트라카이에 있는 갈베 호수의 섬에 세워진 트라카이 성은 14세기 케스투티스(Kęstutis)에 의해 시작되었고, 1409년경 그의 아들 비타우타스 대왕(Vytautas the Great)이 완성했다. 트라카이(Trakai)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로 이 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었다. 성은 1950년대~1960년대에 트라카이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기차나 버스를 타고 올 수 있는데 그곳에서 트라카이 성까지 걸어오는 30, 40분의 거리는 하이킹하는 기분으로 꼭 걸어볼 만하다. 거리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호수들이 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멋진 호수, 그 호수에 어린 하늘과 숲...트라카이 성에 오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치에 감동한다. 또한 Galvė 호수로 이어지는 Karaimų 거리에는 다채로운 목조 주택인 카라임 전통 주택이 늘어서 있고 그들은 14세기부터 이곳에 살면서 최고의 전통 페이스트리인 키비나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호숫가에 오면 건너편 섬에 뾰족한 원추형을 탑을 갖고 있는 환상적인 성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성 자체보다도 호수와 성 너머 하늘에서 솟구치는 하얀 구름이 어우러져서 더욱 멋지다. 성까지는 호수에 설치된 목조 계단을 통해 걸어갈 수 있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돌 깔린 공간이 나오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성안을 돌아볼 수 있다. 지금 이곳은 많이 복원되었고 박물관처럼 그 시절의 방들에 중세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사람들의 인형조각도 보인다. 트라카이 성은 여러 단계에 걸쳐 건설되었다. 먼저 14세기 후반에 성은 케스투티스 대공(Grand Duke Kęstutis)의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는데 1377년 튜턴 기사단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다.
튜튼 기사단은 십자군 전장 시절 조직된 기사 수도회로, 독일 기사단국의 모태다. 이 기사단은 사자의 갈기, 독수리의 날개. 황소의 뿔, 그리고 사람의 머리 형상을한 투구를 썼었다. 이는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 저자인 마르코(사자), 사도 요한(독수리), 루카(황소), 그리고 마태오(사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단원은 모두 기사였으며 동시에 수도자로,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없었다. 그만큼 튜튼 기사들의 전투력은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잔인했다. 이들은 특히 이교도들에게 잔인했는데 이슬람교는 물론 당시 다른 신을 믿던 발트계 부족들을 괴롭혔다. 특히 가까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공격했었다. 기독교 지역에서도 내정에 간섭하는 행동을 했는데 이들의 전통은 훗날 독일 기사단국과 프로이센 왕국을 거쳐 독일제국으로 이어졌다. 튜튼 기사단이 훗날 루터 교회로 개종하고 기사단국을 세속 국가로 전환한 것이 프로이센 왕국의 시발점 중의 하나라고 한다. 강하고 공격적인 특성은 프로이센 왕국의 장교들에게 이어졌고, 훗날 나치즘에도 스며들었다. 현재는 옛날과 달리 독일 기사단(Deutsche Orden)은 오스트리아 빈을 근거지로 하는 가톨릭 봉사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어쨌든 튜튼 기사단은 14세기에 리투아니아를 괴롭혔었다. 케스투티스가 암살된 후, 리투니아에서는 요가일라과 비타우타스 대왕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다가 요가일라(Jogaila)와 비타우타스(Vytautas) 사이의 화해 직후 두 번째 건축이 시작되어 1409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남쪽에 6층(35미터) 규모의 성채가 건설되었다. 붉은 고딕 벽돌로 지어진 이 성채에는 예배당과 거주 공간이 있었다. 15세기초에 세 번째로 성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2.5m의 성벽이 강화되었고 모퉁이에는 세 개의 주요 방어 탑이 건설되었으며 남서쪽 탑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트라카이 섬의 성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이 되었고 대공 비타우타스는 왕으로 즉위하지 못한 채 1430년 이곳에서 사망했다. 그후, 이곳은 짧은 기간동안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17세기 모스크바 공국과의 전쟁 중에 성은 파괴되었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복원되었다. 1946년에 대규모 재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1961년에 완료되었다. 이 성은 15세기 스타일로 재건축되었으니 우리는 그 시절의 모습을 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