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최고 관광지, 시기리야와 피두란굴라 하이킹
스리랑카 중부의 정글 한 가운데 높이 약 180m 정도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솟구쳐 있다. ‘시기리야(Sigiriya 또는 Sinhagiri)’라는 바위인데 그 뜻은 ‘사자 바위’다. 5세기 말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왕이 있었다. 그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형제까지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자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해 시기리야 바위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 위에 올라서면 주변의 평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지만 이곳에는 슬프고 비참한 역사와 동시에 스리랑카의 미소가 새겨져 있다.
“아버지를 죽인 왕의 피해망상이 만든 튼튼한 요새”
455년부터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다투세나 왕에게는 장남 카샤파와 차남 목갈라나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 차남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가 출신이었다. 신분이 낮은 카샤파는 불안에 떨다가 473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 스스로 카샤파 1세가 되었다. 그리고 투옥한 아버지에게 숨겨 놓은 보물이 어디 있는가를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아버지, 다투세나가 가르쳐 준 보물은 그가 재임 중에 만들었던 저수지였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보물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카샤파 1세는 아버지 다투세나를 죽이고 만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평판은 떨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인도로 도망간 동생 목갈라나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기에 불안에 떨던 카샤파 1세는 477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시기리야로 옮긴다. 시기리야 일대는 이미 기원전 3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불교 승려들의 거주지였다. 그렇지만 카샤파 1세 이후 시기리야 일대는 왕의 도시이자 요새로 변모했다. 그는 바위 정상에 궁전과 부속 건물들,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수조를 만들었고 중턱의 작은 평지에는 사자의 문이라 불리는 관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벽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약 20년 후인 495년, 인도에서 병사를 몰고 온 동생 목갈라나가 형을 공격하고 전투에서 패한 카샤파 1세는 스스로 자결한다. 왕이 된 목갈라나는 이곳을 원래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승려들에게 돌려줬고 역사 속에 파묻힌다. 이것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31년 영국인 조나단 포브스(Jonathan Forbes)에 의해서였다.
“정상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
공원 입구에 들어가면 정원과 해자의 흔적인 연못들이 보인다. 정원이 끝나는 곳에서 계단이 시작되고 1200개의 계단을 밟고 거대한 바위 정상을 향해 올라가게 된다. 바위를 깎아 만든 좁은 계단들을 밟고 올라가다 보면 밑으로 정원과 평원이 펼쳐진다. 중간의 평평한 곳에는 프레스코 벽화들이 있는데 지금은 보존을 위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서 아쉽다.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이 140미터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갤러리인데 이곳에는 프레스코화가 약 20여점이 남아있다고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쓰고 간 낙서들도 남아 있는데 원래 이곳에 최대 500여점 이상의 그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금은 사진을 찍을 수 없지만 ‘스리랑카의 미소’라고 알려진 미소를 짓고 있는 반라 여인의 모습이 유명하다. 이 그림은 시기리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여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왕의 여인들이라는 설, 힌두교의 문화에서 온 ‘압사라’ 같은 요정들이라는 설도 있다. 바위의 약간 평평한 곳에는 테라스를 만들기도 했으니 단지 이곳은 요새를 넘어서 꽤나 공들인 문화적 공간이기도 했다.
중간 정도 가면 거대한 사자의 발이 보인다. 그 중간에 입구가 있는데 원래는 거대한 사자 머리가 있었으니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자의 입으로 들어감을 의미했다. 안으로 들어가 계속 계단을 올라가면 정상에 다다른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면 밑으로 푸른 숲으로 가득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저만치 다른 바위, ‘피두란굴라’가 보인다. 대개 시기리야를 본 후에 다시 피두란굴라에 들러 그곳에서 시기리야를 감상한다. 시리야의 넓은 정상에는 성벽 터와 유적들이 펼쳐져 있고 거대한 직사각형의 못이 있다. 그것을 나르기 위해 사람들이 평지에서부터 길어 와서 부어 넣었을 것이다. 왕은 이곳에서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동생에 대한 두려움? 끝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 그는 동생이 인도에서 군대를 끌고 돌아와 전투를 벌이다 스스로 자결했다고 하니 권력무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피두란굴라(Pidurangula)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야”
피두란굴라는 시기리야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5세기경 불교 사원 단지였다. 올라가는데 30분 정도 걸리는 이 길에는 사원의 흔적과 문 위에 달린 종도 보인다. 돌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바위 밑에 누워 있는 불상도 볼 수 있다. 길이 매우 좁은 바위틈의 길을 올라가면 드디어 정상이 나온다.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방금 올라갔었던 우뚝 솟은 시기리야 바위의 모습을 바라본다. 밑으로는 푸른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산맥이 어스름하게 보인다. 바라볼수록 이 평원에 우뚝 솟은 시기리야가 신비스럽다. 우뚝 솟은 시기리야의 멋진 전망을 보려면 피두란굴라로 와야 한다. 시기리야 여행은 피두란굴라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