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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의 보석, 스리랑카의 환경과 역사

흔히 스리랑카를 인도양의 보석이라고 한다. 국토의 면적은 65,610km²로 남한 면적의 65% 정도로 작은 나라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자연도, 문화도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다. 아름다운 해변, 트레킹 할 수 있는 고원 지대, 평화로운 차 밭, 곳곳에 숨어 있는 싱할라 왕국의 역사 유적지, 바위 위의 왕궁과 사원들, 희귀한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사파리 여행, 440년 동안의 식민기간 형성된 네덜란드, 영국풍의 건물과 문화들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와 친절 등 여행자들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고 감동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담긴 보석 같은 섬이다. 또한 저지대는 덥고 습하지만 고지대는 서늘하고 쾌적하며, 남서부와 북부의 날씨가 서로 달라 일년내내 아무 때고 갈 수 있는 섬이다.

c.unsplash.com/Jura

“아직은 한국인에게 낯선 스리랑카지만”
스리랑카는 인도 바로 옆에 있다 보니 모든 것이 인도와 비슷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스리랑카는 인도와 많이 다르다. 인도보다 훨씬 안전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편해서 마음이 느긋해진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또한 한국에 다문화 가정을 이루거나 일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 보니 스리랑카를 동남아의 나라들과 비슷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동남아의 싼 비행기 삯과 비교하면서 ‘왜 이렇게 비싸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천에서 태국의 방콕은 직항으로 5시간 반, 스리랑카의 콜롬보까지는 직항으로 8시간 반 정도 걸린다. 스리랑카는 비행기로 세 시간을 더 날아 가야 하는 먼 나라다.

“보석같은 스리랑카”
유럽인들은 스리랑카를 아시아의 파라다이스로 여기고 있다. 유럽인, 러시아인들이 스리랑카에 많이 오고 아시아인들은 드물었지만 요즘 들어서 중국인들이 많이 오는 편인데 한국인은 여전히 적다. 다만 스리랑카 옆의 몰디브로 가는 한국 신혼 여행객들이 잠시 들렀다(스톱오버) 가는 경유지로만 여겼었다. 또한 이미 끝났지만 예전에 있었던 타밀 반군과의 내전,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이슬람의 테러 등,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그랬다.
한국에서 매년 아웃바운드 2900만 명 중 스리랑카 가는 사람은 2만 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 40만 명, 말레이시아에 50만 명, 베트남에 400만 명, 태국에 200만 명 가는 것과 비교하면 스리랑카는 너무 저평가되었다. 스리랑카는 지나쳐 가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아름다운 섬이다. 2022년 중반에 스리랑칸 항공이 인천 – 콜롬보를 취항했고 점점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스리랑칸 항공은 스리랑카가 “역사 투어 외에 모험적 탐험 투어, 싸이클, 골프 투어, 시푸드를 중심으로 한 미식 투어, 생물 다양성 탐사 여행 등도 할수 있으며, 스리랑카섬 동쪽과 서쪽의 기후가 달라 날씨와 관계없이 이곳저곳 쾌적한 곳을 찾아 여행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세계 각지를 수없이 돌아본 여행자들도 자신 있게 스리랑카 여행을 추천하고 있다. 일단 풍경 좋고, 기후 좋고, 인심 좋고, 편하고 느긋해서 한두 달 보내고 싶은 곳이라고 말한다.

“언제 갈까? 언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열대 몬순 기후인 스리랑카지만 고원 지대가 많아서 기후가 각기 다르다. 콜롬보나 해안 지방에서는 더워도 기차를 타고 1, 2천미터 대의 고원지대로 올라가면 금방 가을 날씨가 된다. 평균적으로 보면 매달, 평균 최저 기온이 22도에서 25도로 비슷하고, 평균 최고 기온이 28도에서 31도 정도로 여름, 겨울 등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고원지대로 올라가면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인데 아침, 저녁에는 5도에서 10도 정도로 내려가 꽤 싸늘하다. 신경 쓸 것은 비가 오는 몬순 시즌이다. 남서부 지역은 5월–8월, 북동부 지역은 11월–2월이 몬순 시기인데 남서 몬순이 몰려오는 시기에 해안 지방에서 피해가 발생된다. 2018년 몬순 홍수로 인명 피해가 났고 약 40만 명이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했었다. 남서 몬순은 일반적으로 스리랑카에서 5월 말에서 6월 초에 절정을 이루는데 콜롬보, 누와라 엘리야, 갈레도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비가 안오는 지역을 찾아가면 되지만 관광객들은 대개 11월에서 2월에 많이 여행한다. 이 시기는 북동부 지역에 비가 오지만 대개의 관광지는 북동부 지역을 피해 있기에 부담없이 쾌적한 날씨 속에서 다닐 수 있다.

“스리랑카는 위대한 섬”
공용어는 싱할라족이 사용하는 싱할라어와 타밀족이 사용하는 타밀어가 있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오랜 지배를 받았기에 영어도 넓게 쓰이는 편이다. 스리랑카 스리(스리)는 존칭어로 영어의 ‘Sir’, 한국어의 ‘님’에 해당하고, 랑카는 ‘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스리랑카는 ‘위대한 섬이란 의미다. 우리에게는 실론(Ceylon)으로도 많이 알려졌고 지금도 ’실론 티‘가 익숙한데 실론은 서양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었다.

“스리랑카의 역사”
인류학적으로 보면 4, 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온 현생 인류 크로마뇽인은 아프리카에 남기도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가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고, 계속 동진하는 가가운데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본다. 반면에 한 갈래는 인도, 남태평양 쪽으로 전진하면서 뉴기니까지 갔고 이들 중의 일부는 일본으로 와서 조몬인이 되었다. 이때는 빙하기로 지금과 지형이 좀 달랐다. 지금의 해안선은 1만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바닷물 수위가 높아진 후의 해안선이고 그전까지는 빙하기로서 바다 수위가 낮아 육지로 연결된 부분이 많았다.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던 크로마뇽인의 일부가 3만 년 전에 인도 남부를 거쳐 스리랑카에 와서 살고 있던 것을 추정된다. 이들은 베다(Vedda, 웨다)라고 불리는 오스트랄로이드 계열 종족이었다. 이들은 북쪽의 추운 빙하지대에 살고 있던 종족과는 다른 진화를 하면서 여전히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대륙에서 건너온 아리안족이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후 아리안족과 베다인들의 혼혈이 싱할라족으로 발전하여 기원전 337년 싱할라족은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건국한다.(기원전 337년–기원후 1017년) 이 왕국은 불교를 수용했고 1300년 동안 불교를 기반으로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한다. 그 후예들이 현재 스리랑카 주민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이다. 그때부터 스리랑카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정통파로서 '실론 불교'의 전통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리랑카의 역사는 매우 깊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1300년 동안 유지되다가 1017년 인도 타밀나두주에서 건너온 타밀족의 나라 ‘촐라 왕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때 인도 동남부의 타밀족들이 스리랑카의 북부로 많이 건너왔다. 점령자로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에 내전을 벌였던 싱할라 족과 타밀족의 갈등은 역사가 1000년이나 된다. 촐라왕국의 지배는 오래 가지 않았다. 53년간 이어지다가 1070년에 끝난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타밀족의 촐라왕국은 스리랑카에 시바파 힌두교 신앙을 퍼트리기 위해 많은 불교 사원들을 파괴하여 스리랑카 북부의 승단이 붕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싱할라족과 북부 지역의 타밀족과의 사이는 좋을 리 없었다.
싱할라족은 저항했고 타밀 세력의 수도였던 폴론나루와를 2차례의 원정을 거쳐 점령하여, 폴론나루와 왕국(Polonnaruwa, 1055/1056년 ~ 1215년)이 세워진다. 그러나 이 왕국 역시 인도 대륙에서 건너온 새로운 힌두계 침략자들에 의해 무너진다. 힌두계 왕국은 북부에 자리잡았고 싱할라족들의 왕국은 분열을 한다. 여기에 명나라의 ‘정화 함대’까지 나타나 개입하고, 다시 인도에서 온 타밀족의 개입 등으로 약 300년간 혼란스러웠다.
고대 싱할라인들의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무역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타밀인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싱할라인들의 수도는 점점 내륙 벽지로 옮겨졌다. 내륙에 위치한 폴론나루와, 감폴라, 캔디는 타밀인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는 좋은 장소였을지 몰라도 해상 무역을 관리하기에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계속된 전란 와중에 고대부터 관리되어 온 관개시설 상당수가 파괴되면서 싱할라인들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궁핍해졌다.
그리고 16세기 초인 1505년부터 약 440년간 스리랑카에는 외세가 개입된다. 1505년에서 1658년까지는 포르투갈 지배, 1658년에서 1796년까지는 네덜란드 지배하는데 이들은 해안 지방만 정복했기에 중부의 캔디 왕조를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796년부터 영국이 등장하는데 영국은 1815년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조인 캔디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스리랑카 전체는 1948년까지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각 서양 나라는 식민통치 스타일이 달랐다. 포르투갈은 서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스리랑카에 정착한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후손인 무슬림 스리랑카인들 이른바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였고 대량 학살 및 강제 개종으로 스리랑카의 무슬림 인구는 급감한다. 그러나 스리랑카 동부의 캔디(Kandi) 왕국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이루어져 한동안 독립성을 지켜내었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중부 지역의 캔디 왕국을 제외하고 해안지방을 대부분 점령하였으나 통치의 주목적이 향신료 무역 독점에 있었기에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영국은 1815년 싱할라족 최후 왕조인 캔디 왕국을 멸망시킨 뒤, 스리랑카 전역을 식민 통치 했다. 영국은 스리랑카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소수민족인 타밀족을 더 우대하였다. 영국인들은 어딜 가나 ‘분할과 지배’ 정책으로 소수민족을 이용해 다수민족을 지배했다. 당연히 다수 민족인 싱할라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더군다나 타밀족은 약 천 년 전부터 싱할라족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민족 아닌가? 오래전부터 스리랑카에 정착하여 살아왔던 타밀족들은 스스로를 힌두교 상층 카스트라 생각했고 영국으로부터 대접받으면서 지배계급이 되어 갔다.
그런데 1860년대부터 커피 재배에 착수한 영국은 인도로부터 약 100만 명의 타밀족(IndianTamil) 노동자들을 이주시켰다. 1880년 커피나무 전염병이 퍼지자 영국은 스리랑카에서 커피 대신 차(茶) 재배로 전환하였으며, 이후 차・코코넛・고무는 식민지 스리랑카 경제의 3대 농작물을 구성하게 된다. 새로운 경제제도 채택과 영어 공용어화 등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19세기경 스리랑카 전통은 극도로 약화되었으나 점차 고유문화에 대한 인식과 민족의식이 싹텄다. 그후, 1948년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여 '실론 자치령'이 되었고 197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국호도 '실론(Ceylon)'에서 현재의 국호인 '스리랑카'로 변경하였다.

독립 후, 스리랑카의 지배자들은 싱할라족이었지만 그동안 영국 정부 밑에서 권세를 행사하고, 상층 카스트로서 자부심이 많던 타밀족 지배자들은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스리랑카가 독립한 후에, 그들 스스로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열망이 강했다. 이들이 스리랑카 정부군과 무장투쟁 해온 실론계 타밀족(Ceylon Tamil, SriLanka Tamil 또는 Jaffna Tamil라고도 함)이다. ‘타밀반군’이라 알려진 이들이다.
그런데 모든 타밀족이 타밀반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식민 통치 하에서 스리랑카에 차밭 노동자로 온 타밀족 (Indian Tamil)은 하층 계급 즉 수드라, 불가촉 천민들이어서 온순한 편이었고 그전부터 살아왔던 타밀족들로부터 깔봄을 당했다. 같은 타밀족이라도 1천 년 전에 스리랑카에 온 이들과 근대에 이주해 온 이들 사이에는 언어 소통의 문제도 있었다.
수많은 갈등과 내분이 있다가 1983년 7월 타밀 반군에 의해 13명의 스리랑카 군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였고 타밀족 공동체들이 싱할라족에게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400명의 타밀족이 사망했고, 15만 명의 타밀족들이 캐나다, 영국, 호주 등으로 피신하였으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길게는 천년의 갈등, 짧게는 몇십 년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타밀족을 공격한 폭도들의 배후에 스리랑카 정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타밀 반군은 1993년에 싱할라족 정치인을 살해하고 내전이 시작되었으나 1994년 내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1999년 데통령 선거 이후 다시 정부군과 반군인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와 정부군 간의 내전이 재발되었으나 2008년 5월 타밀 반군 지도부 대다수가 사살되면서 반군은 패배를 시인했고, 5월 19일 정부측이 승리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26년간 끌어온 내전이 종식되었다. 내전 와중에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종족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고대사부터 누적되어온 인종적, 역사적 갈등과 영국의 식민 정책 등에서 누적된 갈등이 어우러져 형성된 것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이 스리랑카 역사를 보면 인종, 종교, 정치, 경제, 신분제 등의 갈등이 얽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만 복잡하고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등의 아프리카 나라들, 우크라이나 등 현재 근대화가 늦게 되고, 분쟁이 있는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매우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다.
현재 스리랑카의 가난과 빈곤은 이들이 게을러서라기 보다는 이런 역사적 갈등, 구조적 갈등 때문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는 데서 왔다. 이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 와서 노동하는 스리랑카인들, 동남아인들은 더럽고 힘든 일을 억척스럽게 하며 돈을 벌고 있다. 우리도 몇십 년 전에는 게으른 민족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 누가 우리를 게으르다고 하겠는가? 너무 성급하고 빨라서 문제지. 그렇듯이 스리랑카도 계속 변해갈 것이다.
스리랑카의 관광지 길목에서는 가끔. 사기도 치고, 거짓말도 하고, 궁색한 면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며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자만심이 높은 사람들도 있지만(아마도 타밀족의 상층 계급의식 혹은 돈에 물든 졸부 의식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선하고 아량이 넓으며 베풀 줄 안다. 스리랑카의 3등 열차를 타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복잡한 곳에서 서로 돌아가며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스리랑카인들의 모습이다. 이들과 소통하고 정이 들면 스리랑카의 많은 것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함께 그들의 순박한 인심이 깊이 가슴에 남는다. 한번 스리랑카에 정들면 자꾸 가고 싶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