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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영광, 사마르칸트

서울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역 근처의 중앙아시아 거리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우즈베키스탄은 몰라도 사마르칸트(Samarkand)는 알 것이다. 이름에 ‘사마르칸트’가 들어간 식당들이 많다. 사마르칸트, 스타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 시티, 그랜드 사마르칸트, 사마리간트 등. 그만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사마르칸트는 상징성이 있는 도시다. 부하라와 함께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며 중국과 유럽을 잇는 천산북로, 초원의 길에서 번영을 누렸던 영광된 도시였었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 초원의 길에서 번성했던 도시였다.”
한때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에 속해 있었기에 매우 먼 변방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사마르칸트는 중국과 유럽을 잇는 교역로로서 중앙아시아의 번화한 지역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사마르칸트에 도시가 건국된 시기는 기원전 8세기, 7세기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도시가 크게 번성한 시기는 14~15세기 티무르 왕조 시대 때였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시기에는 그리스, 로마에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 시절에 그곳에 살던 소그드인들의 언어 ‘아스마라칸트(Asmarakand)’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마르(Samar)’는 돌 혹은 바위, ‘칸트(kand)’는 성채 혹은 도시를 가리킨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의 역사”
현대의 사마르칸트는 구시가지와 소련 시대에 개발된 신시가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구시가지에는 역사적인 기념물, 상점 등이 있고 신시가지에는 문화센터 및 교육기관, 행정기관이 있다. 사마르칸트는 교역로였기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종들이 등장한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소그드인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었다. 이들은 이란계 민족으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살았다. 이들은 동서교역에 종사했으며 중국측의 사료에도 등장한다.
고대에 페르시아(이란)의 아케메네스조 왕조에 속해 있던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329년에 알렉산드로스 원정군에게 정복된다. 그후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이 도시는 번성했는데 알렉산더 죽음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곳을 지배한 세력들은 많았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박트리아(Bactria,대하,大夏), 기원전 255년경~기원전 139년)에 속하고, 이어서 대월지(大月氏)와 쿠샨(Kushan, 기원후 40~240)과 이란에서 일어난 사산조 페르시아 (Sāsān,226~651)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그리고 6세기에는 돌궐족, 즉 튀르키예 족들에게 지배당했으며 8세기부터는 이슬람화 되었다.
그 무렵에 사마르칸트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인도 지방에서 온 불교와 힌두교, 유대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등 다양한 종교가 있었는데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조로아스터교였다. 그러나 사마르칸트는 차차 이슬람을 주로 믿게 되고 이슬람과 아랍어 학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그후 이슬람의 아바스왕조 기간 동안인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잡은 두 명의 중국 포로로부터 종이 만드는 제지 기술을 알아냈고, 사마르칸트에는 이슬람 세계 최초의 제지 공장이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후 제지 기술은 유럽으로 퍼지게 된다.
사마르칸트는 그 시절 매우 발전한 도시였다. 10세기에 이곳을 여행한 페르시아 작가 이스타크리는 ‘스마르칸트 소그드(Smarkandian Sogd)’라고 불리는 이곳은 녹지와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으며 마을마다 요새가 있고, 집집마다 정원과 흐르는 물이 있으며, 어디나 나무와 과일이 풍부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마르칸트의 주역인 소그드인들은 다른 민족들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살았지만 실크로드에서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중세 이란어의 일종인 소그드어로 후일 투르크인들과 몽골인들이 침입하면서 소그드어는 사라졌다. 사마르칸트는 이 소그드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 지역은 호례즘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현재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의 ‘코녜 우르겐치’ 지방에서 일어난 호례즘 제국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비롯한 트란스옥시아나 지방, 이란까지 지배하는 동부 이슬람권의 최강자가 된다. 그러다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서 1221년 무렵 호례즘 제국의 사람들과 사마르칸트의 사람들은 몽골군에게 엄청나게 학살을 당하면서 사마르칸트는 황폐화 되었다. 몽골인들은 이곳의 성채와 모스크에 피신한 모든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완전히 약탈한 후, 3만 명의 장인과 3만 명의 젊은이를 징집했다. 그 시절에 파괴된 흔적이 아프라시아브 유적(Ruins of Afrasiab)이다.
그후 몽골계인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를 약 150년 동안 받던 사마르간트는 1370년부터 티무르 제국의 통치를 받는다. 1365년, 사마르칸트에서 차가타이 몽골의 지배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킨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인 아미르 티무르는 1370년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다. 서(西) 차가타이 칸국 출신인 아미르 티무르는 주변 국가 들을 점령하면서 대제국을 일으켰다. 그는 통치하던 35년간(재위기간 1370-1405) 제국 전역에서 모집한 위대한 장인과 공예가들로 하여금 도시를 재건케 했다. 그는 적들에게는 무자비했지만 예술가들을 후원해서 티무르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엄청나게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 35년 동안 온 도시의 건물들이 끝없이 건축되었고 그 시절의 영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15만 명이었다.
이 시기에 이곳을 방문한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사마르칸트를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도시 중 하나이며 아름다움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도시’라고 불렀다. 수도인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번영했다.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한 티무르풍(風)의 이슬람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아미르 티무르는 여세를 몰아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1405년, 중간에 병이 들어 죽고 만다. 티무르의 사후 왕실의 상속 싸움이 계속되면서 수도를 헤랏으로 옮겼지만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 벡(재위기간 1409-1449) 치하에서 사마르칸트는 중세 과학, 교육의 세계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과학 특히 천문학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아서 1428년에는 울루그 벡 천문대를 완공했다. 그의 사후 티무르 제국은 몰락하다가 우즈벡족의 침입으로 1500년에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고, 그 시절 이전했던 새로운 수도 헤라트도 1506년에 함락되면서 티무르 제국은 약 130여년 간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이 남겼던 찬란했던 번영의 흔적은 지금도 사마르칸트에 남아있다.

1500년이 되어서야 우즈베크 유목민 전사들이 등장한다. 우즈베크인들은 몽골계 킵차크 한국의 일파였는데 주요 구성원은 튀르크 민족이다. 그들의 전신인 오구즈 튀르크인들의 조상은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튀르크인들로 6세기부터 이들에 의해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의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슬람을 믿는 튀르크 유목민들을 우즈베크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 중에서 16세기초에 ‘무함마드 샤이반’이 티무르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빼앗은 후 중앙아시아 서북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그는 칭기즈 칸의 손자인 ‘주치’의 다섯 번 째 아들이라고 알려졌으며 ‘샤이바니 칸’이 된 후 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부하라에 수도를 두고 ‘부하라 칸국’을 만들었다. 그후 대항해 시대가 열리며 실크로드의 가치가 떨어지자 사마르칸트의 지리적 중요성은 점점 사라졌고, 중앙아시아 일대가 유목민들의 침략과 내전으로 황폐화되면서 18세기에 사마르칸트는 황폐화 되었다.
샤이반 가문 역시 그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부하라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맹주로써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들은 차차 몰락하다가 다른 가문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1785년 나라의 이름이 ‘부하라 아미르국’으로 바뀌었고 1868년 러시아 제국에게 패배하여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가 침입했고 부하라 아미르국은 소비에트 연방 내의 국가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가, 소련 성립 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동부 일부는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면서 완전히 멸망한다. ‘부하라’라는 국가는 사라져 버렸고 이름은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부하라로 남아 있다.
부하라 칸국과 비슷한 시기에 우즈베키스탄 영토 내의 다른 지역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인들이 건국했던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도 있었다. 그 나라들은 부하라 칸국과 함께 성장하다가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다. 러시아는 1873년에는 히바 칸국을 점령했고 1886년에는 코칸드 칸국도 점령한다. 러시아는 코칸드 칸국을 완전 합병해 한 주로 만들었지만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은 조약을 맺어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후 187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 신세였던 히바 칸국은 1917년의 러시아 11월 혁명과 뒤 이은 적백내전에 휘말렸다. 공산주의자들은 전 근대적 칸국인 히바 칸국을 봉건적 잔재로 간주하여 청산 대상으로 보았고 히바 칸국 내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면서 나라는 붕괴되고 1924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분이 된다.

이처럼 현재, 우즈베키스탄이란 국가는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소련 연방 내에서 등장한 국가였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 의해 점령당하기 전까지 우즈베키스탄의 나라들 즉,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드 칸국의 영토가 우즈베키스탄에 있었고, 그들은 우즈베크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었기에 현재 우즈베키스탄인들의 전통은 그곳에서 오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사마르칸트에는 우즈베크인들보다 타지크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주민의 70%가 타지크인이다. 타지크인은 이란계(페르시아계) 인종으로 인도 유러피안에 속하는 백인계다. 타지크인은 튀르크, 몽골계와 관련이 있는 우즈베크인들과는 다르다. 타지크인은 사마르칸트에서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소그드인들의 후예와 튀르크인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민족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은 티무르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고 티무르 제국의 칸인 울루그 베크 칸의 동상을 레기스탄 광장에 세워 놓았지만 사실, 우즈베키스탄 민족은 티무르 제국을 몰아낸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몰아냈다 하더라도 우즈베키스탄 민족은 티무르 제국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하면서 성장한 것이 사실이고 이 영토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와 문화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편 우즈베크인들에게 쫒겨난 티무르 제국의 왕족들 중 하나가 바부르인데 그는 중앙아시아를 떠나 인도 서북부에 무굴제국을 건국한다. 결국 인도 무굴제국은 사마르칸트에서 부흥했던 티무르 제국이 우즈베크 왕조에 의해 쫒겨나면서 만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제국은 인도 서북부를 지배했던 무굴제국과 연결된다.

“사마르칸트 가는 길”
사마르칸트로 가려면 일단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로 가야한다. 그곳에서 고속열차를 타면 사마르칸트까지 약 2시간 10분이 걸린다. 출발 당일 기차역에서 고속열차표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주일 전쯤에 인터넷으로 예매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만 고속선이다. 부하라등의 도시도 기차가 다니지만 고속 열차가 아니다. 우즈베크 국내 항공을 타면 타슈겐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 30분 정도 걸린다.

“사마르칸트 관광”
사마르칸트 관광은 ‘레기스탄 마이도니(Legistan maydoni)’로 시작해서 ‘레기스탄 마이도니(Legistan maydoni)’로 끝난다. 레기스탄(Registan)은 ‘모래가 있는 땅’을 뜻하고 마이도니는 ‘광장’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레기스탄 광장’이라고 부르는데 ‘사마르칸트의 심장’이라고 알려졌다.
광장 안에는 이슬람교의 학교인 마드라사가 3개 있다. 광장 왼쪽에는 울루그 베그 마드라사(Ulugh Beg, 1417년 ~ 1420년), 오른쪽에는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1619년 ~ 1636년), 가운데에는 틸랴코리 마드라사(Tilya-Kori, 1646년 ~ 1660년)가 있다. 이 광장은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이곳에서 알현식, 사열식, 각종 모임 둥이 열렸다고 한다. 14세기 후반, 티무르 통치 시기에는 대규모 시장이 있었고 그의 손자 울루그 베크 때, 즉 15세기 초반에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Madrass, 이슬람 교육기관)이 세워졌다. 그는 한국의 세종대왕 같은 인물로 학문과 과학을 장려한 위대한 왕이었고 그의 거대한 동상이 이곳에 세워졌다. 레기스탄 광장의 현재 모습은 우즈베크족이 일으킨 부하라 왕조의 샤이바니 왕조 때 만들어졌다.
레기스탄 광장 근처에는 '비비하님 모스크(Bibi-Khanym Mosque)가 있다. 가로 167m, 세로 109m의 사각형 회랑에 50m 높이의 거대한 미나렛과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돔이 아름다운 모스크다. 내부는 대리석과 테라코타, 모자이크, 푸른색과 금색으로 그려진 프레스코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맞은편에는 ‘비비하눔’이 잠들어 있다는 푸른 돔의 아름다운 모스크가 있다. ‘비비하눔(Bibi-Khanum)’은 티무르가 사랑한 중국인 왕비였다. 1398년 인도로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티무르를 깜짝 놀래켜주기 위해 그녀는 이 거대한 사원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건축가가 왕비를 남몰래 사랑했었다. 건축가는 왕비가 자신에게 입맞춤을 해준다면 기일내에 완공시켜주겠다고 말했고 결국 왕비는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훗날 왕비의 볼에 남겨진 입맞춤 자국을 보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티무르는 건축가를 사형시켰다. 왕비에게는 평생 차도르를 쓰고 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버전으로는 왕비가 미나렛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은 모든 것이 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근처에는 최대 전통시장인 '시옵 바자르'가 있어서 이곳에 가면 농산물 위주의 시장을 구경할 수 있다.

사마르칸트에는 ‘아프라시압 언덕‘도 있다. 이곳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220년까지 사마르칸트의 동북지역의 중심지였으므로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기억 속에 잊힌 곳을 1950년대 한 목동이 벽화를 발견하면서 찬란했던 문화가 드러났다고 한다. 아프랍시압 언덕 아래에는 샤히진다(Shahi-Jinda)가 있다. 티무르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들이다.
또한 이곳에는 우리가 책에서도 많이 접한 벽화가 있는 곳이다. 소그디아나 궁에 그려진 벽화로, 여기에 여러 나라 돌궐, 당 등에서 사신들과 접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 중에 고구려 사신들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 학계에는 이 두 인물이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보낸 사신으로 보는 설이 있다. 이 벽화는 현재 복제품으로만 볼 수 있고 원본은 풍화로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국내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복제품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