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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중요 도시였던 투르크메니스탄의 코녜 우르겐치

‘우르겐치(Urgench)’와 코녜 우르겐치(Konye-Urgench)는 다르다. 쿠냐 우르겐치(Kunya Urgench)라고도 불리는 코녜 우르겐치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속해 있고, 우르겐치는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다. ‘코녜’라는 말은 ‘옛날’이란 뜻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 이전에 있었던 ‘옛날 우르겐치’를 의미한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였으며 11세기- 16세기 유적지가 남아 있어서 200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코녜 우르겐치는 다르다“
우즈베키스타의 우르겐치는 현재 문화 유적지 ’히바‘에 가기 위해 들르는 역이 있는 도시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르겐치역에 내리자마자 차를 타고 모두 40km 정도 떨어진 히바로 향한다. 반면에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코녜 우르겐치’는 이 도시 자체에 유적지가 많다. 튀르크어로 ‘코녜(Konye)’는 ‘옛날’을 뜻한다. 즉 ‘옛날 우르겐치’를 말하는데 이곳이야말로 원래 히바 칸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코녜 우르겐치’는 실크로드의 번영하던 도시였다”
코녜 우르겐치(Konye-Urgench, 옛날 우르겐치)는 2개의 주요 캐러밴 경로, 즉 페르시아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남북 경로와 중국과 비잔틴 제국을 연결하는 동서 경로의 교차점에 있었다. 이곳에 호례즘 왕국이 있었다.(호라즘, 화례즘 등으로도 불린다.) 이 지역 은 아무다리야 강 하류의 비옥한 저지대를 말하며 북으로는 아랄해, 동으로는 키질쿰 사막, 서로는 우스튜르트 고원, 남으로는 카라쿰 사막과 접한다. 트란스 옥시아나(부하라, 사마르칸트 지역)의 일부로 보고,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지역을 말한다.
10세기에 등장한 호례즘(호라즘, 화례즘) 제국은 북부 투르크메니스탄과 서부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다리야 삼각주 전역을 다스렸다. 그 제국의 수도가 ‘코녜 우르겐치’였고 부하라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슬람의 심장', '1000명의 현자의 수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중 두 명인 알 비루니(Al-Biruni)와 아비센나(Avicenna)는 둘 다 이곳에서 살았다. 12∼13세기 초가 전성기였고 아랍의 지리학자 야쿠트 이븐 압둘라는 1219년에 이 도시를 방문하고 나서 “이 도시보다 더 크고 풍족하며 아름다운 도시를 일찍이 본 일이 없다”고 기술하였다.
4세기 초반부터 11세기 이전까지 호라즘의 지배 세력은 아프리그 왕조(Afrighids)라고 불리는 토착 이란계 왕조였다. 이 왕조는 사산 왕조에 복속하면서 반독립 왕조로 유지되면서 호례즘 샤라는 칭호를 썼다. 8세기경 아랍 세력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 후에는 트란스 옥시아나에서 일어난 페르시아계 왕조인 사만 왕조에 복속되었고, 9세기에는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런데 이 호례즘 제국도 평탄치는 않았다. 계속 왕조가 변한다. 서기 995년에는 귀족 마문(Ma'munids)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아프리그 왕조를 멸망시키지만 사만 왕조를 계승한 튀르크계 굴람 왕조인 가즈니 왕조에게 점령당한다. 그러나 가즈니 왕조 역시 1040년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해 호례즘 지역을 전부 빼앗겨서 이곳도 셀주크 제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셀주크 제국은 총독을 보내어 호례즘 지방을 다스린다. 1077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직속 굴람이었던 아누쉬테긴 가르차이가 호라즘 샤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호례즘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굴람이란 옛 이슬람 국가들에 존재하던 정예 부대의 이름으로 맘루크라고도 불린다.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 군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술탄의 직속부대였다.
아누쉬테킨이 죽자, 그의 아들 무함마드 1세(1097 ~ 1127)가 후임 ‘호례즘 샤’가 되었다. 무함마드 1세의 아들인 아트시즈(1127 ~ 1156) 처음 10여 년 동안은 셀주크 제국에 순종했으나, 그 뒤에는 반기를 들었다. 그후 셀주크 터키의 공격을 받자 항복했으나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서요의 진격으로 중간에서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지만 독립왕조는 유지했다. 그후 아들끼리 내분이 일어나고 술탄과 서요 사이에서 복잡한 정치가 전개된다.
그러다 1193년 셀주크 터키를 공격하고 이란 서부까지 진출하면서 1200년에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세력들을 끌어들였지만 이들이 난폭해서 피점령지 주민들의 저항을 받았고, 주변 세력들이 경계했으며 체제는 허술해서 불안정한 상태였다. 1200년 호례즘 왕조의 지도자 테키쉬가 죽자 이란 서부 지역 주민들이 호례즘 주둔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도 일어난다. 새로 등극한 무함마드 2세 (1200 ~ 1220)는 이를 모두 진압하고 외국의 침략을 몰아내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그곳을 다스리던 서요의 세력도 몰아낸다. 그후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던 카라한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수도를 구르간지에서 사마르칸트로 천도한 후, 아프간 북부와 가즈니 일대까지 차지했다. 호례즘 왕조는 그때 역대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으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최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복 전쟁을 하는 동안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였기에 체제는 안정되지 못했고 불안했다. 그러다 몽골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서요를 멸망시키고 3명의 사신과 친서를 대상을 통해 보냈는데 호례즘령 오트라르의 ‘아미르(영주)’이면서 무함마드 2세의 친척인 ‘이날추크’가 사신과 대상들을 죽였다. 죽인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대상 중의 한 명이 이날추크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추크는 ‘가이르칸’이라는 공식적 칭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가 함부로 옛 시절의 본명인 ‘이날추크’라고 불러서 이날추크가 분노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상인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이들을 가둔 후, 무함마드 2세에게 보고하자 무함마드 2세가 칭기즈칸 사절단을 처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후 간신히 탈출한 대상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칭기즈칸은 ‘오트라르 아미르(영주)’의 처벌에 대해 항의성 사신을 다시 보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고 한다. 분노한 칭기즈칸은 결국 호례즘 왕조를 친다. 호례즘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초기에는 호기롭게 몽골군을 공격했지만 결국 패하게 된다. 몽골군은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들이닥쳤고 무함마드 2세는 도피한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발흐, 마르브, 니샤푸르 등에서 엄청난 학살이 일어나고 그 지역은 몽골 제국에 편입된다.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는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생포되었고, 두 눈에 금을 녹인 물을 들이붓는 끔찍한 처형을 받았다. 무함마드 2세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허술한 체계 속에서 군 동원은 쉽지 않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으로 도망갔다가 폐렴으로 죽었다고 알려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1221년 무렵. 호례즘 사람들은 몽골군에게 엄청나게 학살을 당했다. 그후 이곳은 몽골계의 차가타이 칸국이 지배했지만 1370년 티무르제국이 트란스옥시아나 지방과 호례즘 지역을 장악한다. 호례즘을 다스리고 있던 유세프 수피는 1379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살해당했고, 1388년 수피 왕조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티무르는 우르겐치를 완전히 파괴하고 인구를 학살했으며, 도시의 관개 시스템을 파괴했다.
그후 우즈베크족의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티무르 제국을 몰아내고 부하라 칸국을 세운 후, 트란스 옥시아나(사마르카트, 부하라 일대)를 점령하고 1505년에 호례즘 지방, 즉 ‘코녜 우르겐치(옛날 우르겐치)’도 점령한다. 1506년 부하라 칸국을 세운 샤이바니는 계속 팽창하지만 1510년 페르시아인들에게 패한다. 그후 호례즘 지역은 페르시아인이 잠시 점령했지만 1511년 히바칸국을 세운 또 다른 우즈베크인들은 1512년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코네(구) 우르겐치’ 지역을 지배한다. 그러나 17세기 아무다리야강의 지류인 코녜 다리야강이 말라버리면서 주민들은 현재의 우르겐치, 즉 우즈베키스탄 내의 우르겐치로 모여들면서 1619년, 아랍 무함마드 1세는 ‘코녜 우르겐치’를 버리고 현재의 ‘히바’를 히바 칸국의 수도로 삼았었다.

코녜 우르겐치 역사지구에 남아있는 유적은 주로 11∼16세기 건물들로 모스크, 요새, 첨탑 등이 남아있다. 특히 이곳의 첨탑은 높이 60m로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벽돌 첨탑이었으며, 얌(Jam)의 첨탑보다도 먼저 세워졌다. 200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코녜-우르겐치는 20세기 초에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코녜-우르겐치의 문화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16세기 인도 무굴 제국의 건축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코녜 우르겐치는 오늘날까지도 면화밭에 에워싸여 있는 농촌으로 남아 있고 역사의 유물들이 남아서 관광객들이 찾아 들지만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이렇듯이 ‘코녜(옛날) 우르겐치’는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 근교에 세웠던 히바칸국의 고향이었기에 투르크메니스탄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즈베키스탄 역사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코녜(옛날) 우르겐치(Urgenchi)의 유물들”
쿠틀루그 티무르 미나렛(Kutlug Timur Minaret)은 이 지역에서 가장 눈에 잘 뛰는 유물로. 11~12세기에 제작된 이 기념물은 높이가 60m로 공원에서 가장 높은 기념물이다. 투라벡-카눔 영묘는 쿠틀루그 티무르(Kutlug-Timur,1321~1336년 통치)의 아내인 투라벡 하눔(Turabek-Khanum)의 영묘다. 이것은 코녜(옛날) 우르겐치의 북부에 있다. 우아한 디자인과 멋진 타일 장식이 인상적이다. 영묘의 가장 인상적인 건축학적 특징 중 하나는 메인 홀을 덮고 있는 원형 돔이다. 테케쉬 영묘는 호례즘 제국의 창시자이자 1172년부터 1200년 사이에 통치했던 술탄 알라 알 딘 테키쉬(SultanAla al-Din Tekish)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돔과 팔각형 사이의 구조는 16개의 얕은 벽감(벽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양식은 바그다드 이슬람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반원형으로 중앙아시아 스타일이 아니다. 그 외에도 많은 유물이 있다.
외곽으로 나가면 요새들이 있다. 남서쪽에 있는 아크 칼라라고 하는 요새는 높이가 6~8m인 성벽이 1km 이상 뻗어 있다. 또한 코녜 우르겐치 박물관에는 유적지의 역사, 지역의 전통 예술과 공예, 우르겐치의 건축 전통 등에 중점을 두고 전시하고 있다.

“코녜 우르겐치 가는 방법”
코녜 우르겐치(Konye Urgench)는 다쉬 오구즈(Dashoguz) 시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시가바트에서 다쉬 오구즈(Dashoguz) 사이의 여행은 여행사를 통해 투어로 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하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정치 체제로나, 여러 가지 교통 편의상 개인 여행이 매우 불편하게 되어있다. 대개 아시가바트, 지옥의 문(다르바자 가스 분화구), 코녜-우르겐치를 돌아본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를 통해 히바, 누쿠스 쪽으로 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