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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모태가 되었던 위대한 고도, 노브고로드의 크레믈린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s)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있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531km 떨어져 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189km에 떨어진 이 도시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통 조상이 시작된 나라로 알려져 있고 9세기에 처음 언급된 곳이다. 14세기 전성기에는 노브고로드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수도이자 유럽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1992년에 유네스코는 노브고로드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했고, 1999년에는 이 도시 이름에 ’Veliky‘(위대한) 부분이 추가되었다.

“러시아 국가의 요람으로 여겨지는 노브고로드 공국”
슬라브인들의 기원은 명확치 않으나 4, 5세기 게르만족이 훈족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대 이동하자 5, 6세기에 슬라브인들이 우크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투르크계에 지배당하면서 영향을 받다가 8세기 말에서 9세기 중반까지 동유럽지역에 ‘루스 카간’국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재는 확실하지만 정확한 위치와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원초 연대기’에 보면 슬라브인들이 루스의 통치자에게 가서 ‘우리 땅 전체는 광대하고 풍성하지만 질서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와서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루스의 통치자는 세 명의 형제들 중에서 첫째 아들 류리크는 노브고로드에, 둘째인 시네우스는 벨로오제로에, 셋째인 트루보르는 이즈보르스크에 자리잡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루스인들은 노브고로드 지역을 통치하며 862년에 ‘노브고로드 루스 공국’을 건국했고 2대 통치자 올레그는 중심지를 882년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키이우)로 옮겨서 ‘키예프 공국’이 된다. 그리고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나 벨라루스는 이 ‘노브고로드 루스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공동 기원이 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1862년에 건국 1,0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질 정도였다.

그럼 루스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루스키(러시아인)’들도 루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에 루스인은 러시아인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루스인의 기원에 대해서 설이 많다. 루스인 통치자들은 8세기말부터 스웨덴 쪽에서 내려온 노르만인들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을 루스(Rus)족(바랑기아)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루스인 통치자들은 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의 일파로 토착민 슬라브족들을 지배하면서 세력을 넓혀가는 가운데 피가 섞여서 러시아인들이 된 것으로 보는 설이 널리 유포되었었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인의 기원은 피지배 계층 슬라브족과 지배계층인 루스인(노르만인)의 결합이 되는데 이 설은 러시아 학자들이 거부하고 있다. 러시아 학자들은 ‘루스’가 노르만인이 아니라 동슬라브족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 흐루셰브스키도 노르만인들이 루스인이었다 설을 부정한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루스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서구에도 그런 집단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루스라는 이름은 그전부터 비잔티움 및 아시아 작가들에게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아 루스인은 스웨덴의 바이킹 출신인 노르만이 아니라 남부 러시아에 자리잡고 있던 슬라브족의 한 종족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이 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는 루스인이 스웨덴 쪽에서 내려온 노르만인들에서 유래된 것을 부정하고 슬라브족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전쟁과 각기 다른 역사관”
노브고로드 공국의 정체성을 알려면 러시아 역사는 물론, 우크라이나와의 역사적 관점의 차이도 알아야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의 갈등은 정치, 군사적인 이유 외에 ‘역사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측면도 있다. 러시아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원래 같은 나라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대 슬라브인’으로서 그들의 형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들을 통치했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어도 러시아어의 사투리 정도로 여기며,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옛날부터 러시아가 종주권을 행사했기에, 현재에 와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서방 세계에 넘어가는 것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것을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한국이 한때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일본이 전쟁에 지지 않고 다만 식민지가 해체되면서 한국이 독립했다고 치자. 그런데 일본은 여전히 한국에 대한 종주국 행세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상상하면 쉽게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일본이 ‘원래 일본은 고대시절 임나일본부를 두어서 한국 남쪽을 지배했다’고 강력하게 믿고, 또 일본과 한국은 같은 조상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이 형으로서 한국과 일본은 원래 한 나라이며 한국어는 일본어의 사투리 정도다. 그런데 중국, 러시아 혹은 미국에서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하면 우리는 참지 못하겠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로서는 어처구니가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런 역사 왜곡을 잘 모르는 서방 국가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는 비슷하고, 그들의 역사는 한뿌리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보면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면 우리로서는 속이 탈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인들의 심리가 이렇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이렇다.
우선 러시아의 입장은 노브고로드 공국이 훗날 ‘키예프(우크라이나어로 키이우) 루스 공국’(882년- 1240년)이 되었는데 이 나라가 몽골 제국에게 망한다. 그 후, ‘수즈달’ 지역에 있던 모스크바 공국이 ‘땅 모으기’를 통하여 노브고로드를 지배했고 또 키예프 루스 공국‘의 일부를 영토로 삼는다. 모스크바 공국은 이 과정을 통해서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물려받고 점점 더 성장해서 몽골로부터 독립하고, 이어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 러시아를 열었고, 혁명 후에 소련이 되었으며 현재 러시아가 명맥을 잇고 있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공국의 영토에 있었기에 그 명맥을 잇는 러시아의 부분이다. 근대에 들어 힘이 있는 러시아는 ‘대 러시아’로서 동생들인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소 러시아’를 지배했고 이끌어 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슬라브족으로서 같은 역사, 같은 언어를 갖고 있는데 그만, 우크라아나의 서방 세계, 자본주의 악에 물든 일부 지도자들이 위대한 슬라브족의 전통을 뒤로 하고 나토에 가입하려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배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이 망한 후, 주인 없는 땅에서 폴란드 등 많은 외세에 지배당한 사람들을 러시아에서 폴란드와 싸우며 보호해주었고, 또 소련 시절에 현재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만들어 주었는데 소련이 해체된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가 이제 서방 쪽에 붙으려 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라는 관점이다.

반면에 우크라이나측의 입장은 다르다. 러시아인들이 중요시하는 노브고로드 공국도 원래는 ‘키이우(러시아어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영역에 있었으며 자신들이 위대했던 ‘키이우 루스 공국’의 적통을 잇고, 그 정체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키이우 루스 공국’이 몽골로부터 망하자 노브고로드 공국을 모스크바 공국이 지배했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은 노브고로드 공국을 ‘키이우 루스 공국’의 후예로 보지 않고 다른 나라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모스크바 공국이 노브고로드 공국을 지배했다고 해서 그것이 ‘키이우 공국’의 적통을 잇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모스크바 공국 자제가 수즈달 공국의 변두리에 있던 작은 나라로서 ‘키이우 루스 공국’의 역사적 유산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여긴다. 다만 모스크바 공국이 힘이 세지면서 수즈달과 노브고로드 공국을 지배하고 또 훗날, ‘키이우 루스 공국’ 영토의 동부 지방을 점령하는 등 ‘땅 모으기’를 통해서 자신들이 ‘키이우 루스 공국’의 역사적 유산을 계승했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땅의 원래 주인이던 현재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소 러시아’로 취급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키이우 루스 공국’이 망한 후, 나라를 잃은 ‘루스인’들의 민족 정체성은 ‘리투아니아 지방’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훗날 리투아니아-폴란드 연방이 세워지면서 ‘키이우 루스’의 명맥은 그곳으로 이어졌는데 ‘키이우 루스 공국’의 옛 영토 중에서 서부 지역에 있는 할리치나 공국, 볼린 공국으로 이어졌으며 이곳은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반면에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은 모스크바 공국이 지배해왔지만 ‘키이우 루스’ 공국의 정통성은 그곳에 있지 않고 서부 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그후 현재 드니프로 강 유역에 코사크 집단이 나타나면서 지배 세력인 폴란드, 러시아와 지독한 투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타타르(투르크)와도 협조하고, 또 스웨덴과도 동맹을 맺으면서 폴란드, 모스크바 공국과 싸워 나갔다. 현재의 우크라이나인들은 그 당시 코사크족의 후예로서 강렬한 독립 의식을 가진 민족이었다고 말한다. 그후,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협약을 맺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보면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결코 ‘키이우 루스’ 의 후예들이 러시아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러시아 제국은우크라이나 지방을 지배하면서 끝없이 우크라이나인들을 괴롭혔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 동화정책을 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굴하지 않은 채 러시아인들에게 끝없이 투쟁한 역사가 있으며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독립 후에는 자신들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 현재 우크라이나의 입장이다.

어느 역사관이 맞는가, 진실에 부합되는가는 뒤로 하고서라도 분명한 것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역사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키이우(키예프) 루스 공국’이 몽골에 의해 망한 후, 이 지역을 모스크바 공국이 지배하면서 계속 러시아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키이우 공국’의 후예라 믿고 있는 현재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와 전혀 다른 과정을 겪어오며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들의 역사관을 잘 모르는 이들은 ‘비슷한 민족’인데 우크라이나가 서구화가 되어서 러시아와 싸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러시아의 역사관에서 오는 것이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부터 오랫동안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독하게 독립하겠다는 열망이 강한 것이다. 단지 서구화 바람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러나 현재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국경선은 소련이 만들어 주었기에 그 영토의 동부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러시아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동부와 서부의 역사의식과 정서가 다르고 자기들끼도 분열이 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러시아에 침공당하는 가운데 러시아군의 잔학성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반 러시아 정서’가 강해지면서 현대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세에 번영했던 노브고로드”
여행자들이 역사, 정치 쪽으로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에 속한 ‘노브고로드’란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면 한결 노브고로드가 다르게 보인다. 어쨌든 노브고로드는 현재 러시아에 속해 있고 노르만인이 내려왔든, 슬라브인이 살고 있었든 중요한 고대 왕국이다. 또한 키예프로 도읍지를 옮기고, 훗날 키예프가 쇠퇴했을 때도 노브고로드는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교역 중심지였다. 노브고로드는 전 러시아의 지도적인 도시로 부각되고 동쪽으로는 우랄산맥까지, 북쪽으로는 해안선을 따라 뻗어나간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류리크 왕조가 스웨덴의 노르만계든 아니든, 역사적 유물을 보면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인들이 왔다는 것은 증명되고 있다 한다. ‘키예프(키이우)’가 패권을 갖고 난 다음에도 ‘노브고로드’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노브고로드는 몽골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았으며, 동유럽 주요 교역로에 있어서 발전할 수 있다. 즉 북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교역로와 동시에 동서 교역로의 교차점에 있었다. 이곳은 키예프 대공들의 아들들에 의해서 종종 통치되었고 그 중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다소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훗날 키예프 루스 공국이 쇠퇴하면서 1156년 독립적인 공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노브고로드 공국은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공(1219-1263, 알렉산드르 네프스크기)은 북쪽의 스웨덴인들, 서쪽의 튜턴 기사단, 핀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독일인들과 싸워서 승리했다. 다만 알렉산드르 공은 몽골의 칸에게 굴복함으로서 노브고로드 공국을 파멸로부터 지켰다.

한편 작은 촌락에서 출발했던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몽골의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는데 킵차크 칸국은 모스크바 공국이 주변의 나라들의 공물과 세금을 걷게 하면서 간접 통치를 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은 킵차크 칸국의 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전 루스인의 대공으로 인정받으면서 크게 성장한다. 즉 노브고로도 공국이나 모스크바 공국 모두 몽골과 싸우지 않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가운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다 이반 3세때 모스크바 대공국은 힘이 커지자 몽골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반 3세는 또한 ‘땅 모으기’를 하는 가운데 노브고로드를 병합한다. 노브고로드 공국은 이에 저항하려 했으나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의 군대에게 1471년 패하면서 항복한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모스크바 공국을 전제적인 국가로 보면서 ‘우리는 위대한 노브고로드의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처럼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 때부터 전제적인 성격을 가졌고 그후 제정 러시아, 소련, 현재의 러시아를 거치면서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가져본 적이 없다. 왕정이건 공산주의건, 혹은 자본주의가 되었어도 서방처럼 시민들의 인권, 권리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겪어왔고 현재도 그렇다. 현재 러시아의 강한 민족주의, 독재 정치 체제는 과거 역사 속에서 오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는 전제적인 군주제의 전통을 갖고 있다.
1477년과 1478년에 계속 공격을 한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국에 통합된다. 그리고 1547년에 이반 4세는 차르로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적인 ‘루스 차르국’ 시대를 열고 공포 정치를 핀다. 이반 4세가 죽고 나자 그의 아들을 사칭하는 자들이 3명이나 나타나 혼란에 빠지자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1세가 1613년에 왕위를 계승하면서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된다. 표트르 대제가 훗날 러시아 제국을 크게 부흥시켰고 우리가 아는 강력한 제정 러시아로 성정하다가 1917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서 망한다.

“노브고로드의 크렘린”
한때 번영했던 역사를 갖고 있고,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요람이라고 있는 도시이기에 노브고로드에는 역사적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볼호프 강의 서쪽 기슭의 쾌적한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둘러싸인 크렘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크렘린으로 당연히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크렘린 궁보다 훨씬 오래된 곳이다. 원래 데티네츠(Detinets)라고 불렸던(지금도 종종 그렇게 불림) 이 요새는 9세기에 건설되었으며 14세기에 벽돌로 재건되었는데 현자 야로슬라프의 장남인 블라디미르 왕자가 설립했다고 알려진다.
크렘린은 노브고로드의 행정, 사회, 종교 중심지였고 이곳에서 선거가 열리고 전쟁 준비를 했으며, 노브고로드 성벽은 성 소피아 성당의 주요 성당과 노브고로드 대주교의 거주지를 보호했다. 또 연대기가 보관되고 책이 수집되고 복사되는 곳이 크렘린이었다. 크렘린 안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궁전(1433년)이 있으며, 이 궁전은 대주교의 주요 회의장 역할을 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15세기 중반)과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탑(1673). 시계탑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주요 박람회가 개최되고 도서관, 필하모닉, 예술 대학, 예술 및 음악 학교 등이 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크렘린을 가로지르는 길은 다리로 이어진다. 야로슬라프의 안뜰과 성 안토니오 수도원이 동쪽 아치에서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성 조지 수도원(St. George Monastery)의 종탑도 볼 수 있고 41m 높이의 전망대에서는 도시 전체와 주변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크렘린의 건물은 아름다워서 성벽 근처를 거닐며 공원과 도시의 전경을 감상하는 산책 자체가 즐거운 곳이다.

“소피아 대성당”
이 도시에는 중세 기념물이 다양한데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현자 야로슬라프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Vladimir Yaroslavich)의 후원으로 1045년에서 1050년 사이에 지어진 성 소피아 성당이다. 블라디미르와 그의 어머니 안나 포르피로게니타(Anna Porphyrogenita)가 대성당에 묻혀 있다. 대성당에는 서쪽 입구에 걸려있는 유명한 청동문이 있는데, 이 문은 1156년 마그데부르크에서 만들어졌으며 1187년 스웨덴 시그투나(Sigtuna) 마을에서 노브고로드인들이 빼앗아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러시아 정교회들이 가득한 노브고로드”
크렘린 성벽 밖에는 므스티슬라프 대왕 (Mstislav the Great)통치 기간에 건설된 세 개의 대형 교회가 있다. 므스티슬라프 가문의 프레스코화를 소장하고 있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 (1113~1123)이 있고 유리에프 수도원은 1030년에 만들어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이다. 또한 1119년에 지어진 3개의 돔이 있는 높은 대성당도 있다. 그 외에도 노보그라드 시내와 주변 지역에는 약 50개의 중세 및 초기 현대 교회가 흩어져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나치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그 중에서 초기 노브고로드 건축의 가장 위대한 걸작은 Nereditsa의 구세주 교회(1198)다.
13세기에는 노 세 개가 달린 디자인의 작은 교회가 유행했고 이런 교회는 페린 수도원(1230년대) 의 작은 예배당과 리프냐 섬의 성 니콜라스 성당(1292년, 14세기 프레스코화로도 유명)에 가면 볼 수 있다. 14세기에는 두 개의 독창적인 교회 디자인이 발전했는데, 그중 빼어난 곳은 성 테오도르 교회와 일리나 거리에 있는 구세주 교회다.
1478년 이반 3세가 노브고로드를 정복하면서 건축물의 성격이 바뀌었다. 모스크바의 영향을 받아서 모스크바 크렘린의 대성당을 본 따서 만든 교회들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쿠틴 수도원의 구세주 대성당(1515), 성모 대성당(1688), 비아스키지 수도원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1685) 등이 그렇다. 이렇듯이 노보그라드는 교회만 보더라도 역사를 알 수 있고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중세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