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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대를 포용하는 군산의 저력

c.unsplash.com/insung-yoon

군산은 신시가지에 가면 높은 아파트, 쇼핑몰 등이 있고, 드넓은 은파호수 공원과 주변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우며, 시립 도서관은 쾌적하고 현대화되어 있다. 그러나 군산의 구시가지 월명동에 오면 1930년대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군산은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도시고 먹을 거리가 풍부하다. 군산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해산물 풍부한 바다가 있고 북쪽의 금강, 남쪽의 만경강 사이에 곡창지대가 있다. 먹을 것이 많으니 음식문화가 발전했고 인심이 좋다. 각종 해산물과 짬뽕이 유명하고 이성당의 단팥 빵은 유명하다. 주변에는 고군산도의 중심인 선유도가 있어서 아름다운 해변을 볼 수도 있다.

“1930년도로 돌아가는 군산의 구시가지 월명동”
군산의 월명동에는 일본풍의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다다미가 깔린 게스트 하우스인데 예전에는 고우당 게스트 하우스로 불렸는데 지금은 여미랑 게스트 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은 1930년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는데 이곳에 새롭게 일본풍의 가옥들을 만들어 게스트 하우스, 우동, 소바집, 카페 등 일본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일본 어느 소도시에 온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이곳은 군산시에서 2012년에서 2013년에 ‘근대역사 체험 공간’이란 취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주변의 신흥동에는 ‘히로쓰 가옥’이란 곳에 가면 그 시절 일본인 부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근처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일본인들의 절이었던 일본풍 절, 동국사가 나온다.
바닷가에는 박물관들이 있다. 근대 역사 박물관, 근대건축관, 근대 미술관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역사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193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래서 이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1930년대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다양한 문화를 품고 끈질기게 살아온 군산의 저력”
그러나 이곳에는 화교들의 흔적도 있다. 근대 역사박물관 건너편의 영화동에는 화교들이 하는 오래된 중화반점들이있고 작은 화교박물관도 있다. 이곳에 일본인들만 살던 곳은 아니다. 또한 이곳의 주인은 한국인들이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부터 이성당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수많은 식당들과 삶의 터전들이 보인다. 복탕집, 통닭집, 쌀집, 게스트하우스, 시장, 한의원, 생선구이집, 콩나물국밥집 등이 끝없이 펼쳐진다. 대로로 나가면 편의점도 있고 롯데리아도 보인다. 100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이성당 빵집도 있다. 일본풍의 가옥은 군산 전체에서 얼마 안 되는 것이며 월명동 쪽에 조금 있을 뿐이고 긴 세월을 버티고 살아온 우리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수많은 맛집들이 즐비한 곳이다.
군산은 1930년, 일제 시대를 넘어서 더 깊고, 더 넓고, 더 풍요로운 시간으로 가는 통로다. 근대문화유산을 넘어서 눈길을 돌리면 자연이 펼쳐진다. 새만금방조제, 선유도. 금강철새조망대, 은파호수등이 있다. 비록 일본식 가옥들이 많이 보여도 지금 거기서 영업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들이다. 이런 곳을 거닐다 일본풍의 카페에 앉아 옛날 유행했던 프랑스 샹송을 듣다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일정 시절 예술가들이 이곳에 앉아서 1930년대 이런 곳에 앉아 그 시절 꿈나라 같은 프랑스, 영국, 미국을 그리며 근대적인 문화, 지식, 예술에 목말라 했을 것이다. 현대의 여행자들은 그 시절의 예술가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 군산은 비록 일본풍의 가옥들을 내세웠지만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군산은 일본, 중국의 것들을 품고, 녹여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저력을 갖고 있다. 여행자들은 일본풍보다도 그것을 포용하고 녹인 ‘군산’을 좋아하는 것이다.

“경암동 철길 마을”
이곳은 지금 쓰이지 않는 철길 따라 옛날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 마을이다. 이곳은 추억의 불량식품, 즉 라면 땅, 쫀드기, 달팽이 과자 등을 팔고 있다. 검정 고무신, 하얀 고무신도 팔고 있었다. 캔들집, 문방구, 교복 대여점도 있다. 50대, 60대들이 추억의 교복을 입고 철길에서 혹은 철길에 전시해 놓은 기차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다. 얼굴은 늙어도 교복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악동으로 돌아간다.다. 예전에 인기 있었던 만화영화 그림도 보이고 물방개로 뽑기 하는 곳도 있다. 또한 ‘달고나’ 혹은 ‘뽑기’라고 불렀던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설탕을 녹인 후 소다를 넣어 부풀린 다음에 쇠틀을 얹어서 여러 모양을 찍어 내는데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군산의 역사”
원래 마한 지역에 속해 있던 군산은 서기 4세기경 백제에 편입되었고, 7세기 중엽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군산 건너편이 충남 장항이고 금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부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백마강이라 부른다. 군산과 장항 사이의 포구, 즉 기벌포는 660년 당나라군이 백제를 침입하던 통로였고 663년 왜군 400척의 배가 ‘백촌강 전투’를 벌이다 패배한 곳이다. 고려 시대에도 군산은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는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 즉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와 운반하는 관청을 전국 60개 포구에 두었는데 군산에도 두었다. 이곳 창고에 모인 곡식은 배를 통해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 옮겨졌는데 고려 말에 왜구들이 세곡을 탈취하기 위해 엄청나게 침략했었다. 1200년대 초부터 약탈 행위를 한 왜구의 침입은 1300년대에 들어와 더 빈번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고려는 최영장군의 주도로 왜를 진압해 나간다. 그는 수군을 강화하여 제주에서 몽골계 토호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1380년 8월, 진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왜구 1만 명은 500척에 이르는 대 선단을 이끌고 와 대다수 병력이 육지로 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백성들의 죽은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약탈한 곡식을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 자도 넘게 땅에 쌓였다고 한다. 최무선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이런 왜구들을 화통, 화포를 사용해 공격했고 왜구의 배 500척을 모두 파괴시켰다.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은 경남, 전남 일대의 내륙으로 들어와 약탈을 했는데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소탕하는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다. 이성계가 영웅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세종대왕은 고군산에 수군 진을 설치했고 훗날 진포(현재의 군산)에 진을 옮겼다고 한다. 군산 앞바다에 있는 고군산도, 특히 선유도에는 비가 많이 와도 처마 밑으로 다니면 비에 젖지 않을 정도로 집이 많았고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풍족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산은 조선 시대에도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다. 대한제국은 군산을 국제 조계지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고 군산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 근대 도시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