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을 숭배하는 치미 라캉(Chimi Lakhang) 사원
푸나카는 팀푸에 비해 작고, 인구 6천 명밖에 안되는 한적한 도시지만 300년 넘게 부탄의 수도였던 곳이라 역사 깊은 사원들이 있다. 그중에서 치미 라캉(Chimi Lakhang)은 독특한 사원이다. 라캉이란 뜻이 사원이므로 ‘치미 사원’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대개 ‘치미 라캉 사원’이라고 부른다. 부탄에서 ‘곰파’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지만 ‘라캉’은 일반 신도들도 와서 기도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다. 이곳에는 남자들의 성기를 숭배하는 남근 숭배 사상의 흔적이 서려 있다.
“남근 숭배 사상이 깃든 치미 라캉 사원”
치미 라캉은 15세기 부탄의 ‘드럭파 쿤리’(Drukpa Kunley) 스님에게 헌정된 사원으로 드럭파 쿤리의 사촌이 건립했다. 이 사원은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사원이다. 사원은 물론 인근 마을의 집과 상점 담벼락에 ‘남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 생소한 풍경이 외국인 관광객과 부탄 순례자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치미 라캉 내부에는 드럭파 쿤리 스님과 그가 데리고 다니던 개 사치(Sachi)의 동상과 샤브드룽, 석가모니 및 1001개의 손을 가진 자비와 연민의 보살인 첸라식 관음상이 있다. 여기에 작은 제물을 바치면 아이가 없는 여인들은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원 오른쪽의 벽화는 쿤리 스님의 다채로운 삶과 사건과 도츄라 고개의 세 악마를 묘사하고 있다. 드럭파 쿤리스님은 도츄라 고개의 악마가 사람들을 괴롭히자 ‘지혜의 벼락’인 금강저로 악마를 제압했는데 이 시원에서는 나무로 만든 금강저를 보관하고 있다 한다. 금강저는 불교 의식에서 쓰이는 용기로 제석천(인드라신)이 코끼리를 타고 악마를 물리칠 때 사용했던 무기다. 금강석으로 만든 절구공이 같은 무기로 이것은 금강, 즉 다이아몬드 같은 지혜로 악마를 물리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금강저를 갖고 수행하면서며 악마를 물리친다고 한다.
“자식 없는 이들이 많이 찾는 치미 라캉 사원”
이곳은 자식 없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이 사원에 보시를 하면 스님이 나무로 만든 남근으로 축복을 내려준다. 부탄 신도들은 그렇게 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사원을 구경하다 보면 부탄 스님이 다가와 앨범을 보여주며 보시를 하라고 한다. 앨범에 있는 사진들 중에는 서양 여인들과 아기들이 많이 보인다. 이 여인들이 여기서 보시하고 불공을 드린 후, 돌아가서 아기를 낳은 후 그 사진을 보냈다는 설명을 한다. 또한 이곳의 영험한 기운으로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치미’(Chimi 혹은 Chimmi)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고 한다.
“탄트리즘을 수행했던 드럭파 쿤리 스님”
‘드럭파 쿤리’는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힘든 스님이다. 1455년에 출생하여 1529년에 입적했는데 한쪽에서는 위대한 스님이라 하지만 한쪽에서는 신이 내린 ‘미친 승려’라고 혹평한다.
그는 티베트에서 출생하여 뇌룡파의 총 본산인 티베트 랄룽 사원에서 출가헸으며 ‘페마 링파’의 제자였다. 그는 탄트라 요가를 수행한 ‘넬조르’(요기라는 뜻으로 요가 수행자)로서 티베트와 부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노래, 유머, 충격적인 행동으로 중생을 가르쳤다는데 그는 성과 관련된 일화도 많다. 심지어는 그를 초대한 손님, 지원해주는 사람들의 부인들까지 성적인 대상으로 삼기도 했고 불교 탱화에 소변을 보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고의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불교와 깨달음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을 깨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의 엄격한 관습과 생각이 진정한 깨달음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 만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마을에서 ‘까딱’(축복을 내려주는 무명천)을 그의 목에 걸어 주자 드럭파 쿤리는 그것을 곧바로 자신의 성기에 휘어 감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신도에게 앞으로 많은 여인과 함께 하며 자식들이 번성하는 행운이 깃들 것이라고 기원해주었다고 한다.
“다산을 원했던 사람들의 남근 숭배 사상”
이런 남근 숭배 사상은 부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힌두교에 광범위하게 스며 들어간 탄트리즘의 영향으로 인도 전역에서도 볼 수 있고 여러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지금의 관점과는 다르게 인구가 부족한 그 당시에는 ‘다산’이 축복이었다. 특히 부탄 같은 농촌에서는 더욱 새로운 생명이 귀했을 것이다.
이 문화권에서 남근은 다산을 상징하므로 이 지역의 민가나 상점에는 곳곳에 남근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집안의 우환을 차단하고 아이를 많이 출산하고 싶은 소원을 빌기 위해 그런 풍습이 남아 있다. 의인화시킨 남근이 징그럽지 않고 귀엽게 보여서 많은 외국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